역사
인천에서 인천으로 | 그림 밖에서 만난 사람들
웃는 얼굴
그림이 된 미소, 다시 만나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에이이미지스튜디오 165

화실에서, 류성환 작가.
오래 바라본 끝에, 한 사람의 얼굴이 그림이 된다.
웃음에도 저마다의 시간이 있다.
어떤 웃음은 하루를 견딘 끝에 피어나고,
어떤 웃음은 눈물을 참은 뒤에야 찾아온다.
누군가는 그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그린다.
‘서걱─.’ 목탄을 쥔 손이 종이를 지그시 누른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눈빛이 살아나고, 굳게 다문 입술 끝에 미소가 옅게 번진다. ‘스윽─.’ 붓끝이 그 위를 지나자 마른 종이가 물기를 머금는다. 색이 번지고 스며들어 흑백의 얼굴에 표정이 깃든다. 하얀 종이 위로 한 사람의 웃는 얼굴이 피어난다.
청라의 한 작은 화실. 오후 햇살이 벽에 기대어 선 얼굴들을 차례로 비춘다. 서로 다른 얼굴이지만 어딘가 닮아 있다. 류성환 작가는 스무 해 넘게 사람을 그려왔다. 단지 얼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화폭에 담아왔다.
시작은 도화동, 사람이 찾지 않는 오래된 시장에서였다. 팔리지 않은 채소를 가지런히 추스르던 할머니가 있었다.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자 희뿌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서두르는 기색도 아쉬운 표정도 없었다. 그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그의 시선은 사람에게 머물렀다. 이름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스쳐 지나가는 얼굴도 그의 손끝을 거치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오늘도 그는 붓을 든다. 아직 그림이 되지 않은 얼굴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품고 그를 기다린다.

자화상을 그리는 류성환 작가.
붓끝이 머문 자리에 웃음이 피어난다.

아직 마르지 않은 붓끝에, 한 사람의 삶이 깃든다.

황선순, 류성환, 이영순(왼쪽부터).
류성환 작가가 그린, 세 사람의 얼굴

화실에서, 류성환 작가.
한 사람의 시간이 그의 화폭 위에 머문다.

이영순, 류성환 작가가 그린 그림 앞에서.
그날의 웃음을 다시 마주한다.
고단한 하루를 마친 세 친구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웃었다.
짧은 순간은 지나갔지만, 그날의 미소는 그림으로 남았다.
"우리가 함께 웃던 그 모습 그대로였어요."
함께 웃는 이유
웃는 사람 곁에는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가게 문이 열린다. 한 사람이 먼저 다가가 웃는다.
“어서 오세요.”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이영순의 하루는 이 네 마디로 시작해, 다시 그 네 마디로 저문다.
청라 커낼웨이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카페. 커피를 내리고, 잔을 나르고, 계산하는 사이에도 그의 시선은 사람을 먼저 향한다. 혼자 온 어르신이 말을 건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손님이 다친 손을 내밀 때도 있다. 그럴 땐 약과 밴드를 꺼내 말없이 건넨다. 사람들이 마음속 이야기를 한잔씩 내려놓고 돌아가는 동안, 카페는 어느새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웃음을 잃는 건 그 자신이었다. 손님에게 정성껏 만든 샌드위치를 건네고 돌아서면, 사춘기를 힘겹게 지나던 아들이 떠올랐다. ‘정작 내 아이 밥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잔이 채워질 때마다, 마음이 담긴다.

한 잔의 온도가, 오늘도 정성껏 맞춰진다.

류성환 작가의 화실에서, 여백 위의 얼굴들
이 년 전 가을부터는 혼자 카페를 지켰다. 두 사람이 나눌 인건비조차 나오지 않았다. 문을 여는 일부터 커피를 내리고, 설거지하고, 불을 끄는 일까지 하루 열두 시간이 그의 몫이었다.
주방이 온통 어질러진 채 혼자 지쳐 앉아 있는 날들이 계속됐다. 가게를 그만둘까 생각하던 어느 날, 단골손님이 검은 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사장님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생각이 나서.”
그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찐빵이 들어 있었다. 설거지하던 손이 멈췄다. 물에 젖은 손으로 봉지를 받아 든 채 한동안 싱크대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 따뜻함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혼자 버틴다고 생각했던 시간에도, 곁에 누군가 있었다.
문이 다시 열린다. 그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세요.”
사람은 저마다 다른 얼굴로 나이 들어간다.
기다리고, 견디고, 끝내 다시 웃으며.

황선순, 류성환 작가가 그린 그림 앞에서.
꽃보다 환하게 웃음이 피어난다.
활짝 핀 꽃 한 송이가 얼굴 위에 피어났다.
그림 속에서 스스로도 알지 못하던 표정과 마주했다.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한참 바라봤어요."
웃음 너머의 얼굴
지나온 시간이 모여,
비로소 한 사람의 얼굴이 된다.
복날 아침이다. 커다란 냄비에서는 삼계탕이 부글부글 끓고, 뜨거운 김이 주방 가득 피어오른다. 누군가는 닭을 씻고, 누군가는 분주히 뚝배기를 나른다. 황선순은 그 한가운데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반긴다.
이곳은 평일엔 식당이고,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된다. 벽에 걸린 십자가도 강단도 없다. 밥 한 끼 먹으러 왔다가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앞치마를 두른 목회자, 황선순. 사람을 맞고, 밥을 나누고, 이야기를 듣는 일이 그의 목회가 되었다. 그에게도 한때는 다른 꿈이 있었다.
“어릴 때 꿈은 현모양처였어요.”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지만 오래 붙잡지는 못했다.
“미술은 돈이 안 되니까 다른 일을 해라, 부모님이 그러셨지요.”
붓을 내려놓은 채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견디려 애쓰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내 눈높이에서 사람을 바라봤지만, 이제는 그 사람이 살아온 배경과 인생이 먼저 보여요.”
누군가 건넨 ‘현재의 나는, 살아온 시간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칠순쯤에는 살아오며 만난 사람들 얼굴을 그려서 개인전을 열어보고 싶어요.”
내려놓았던 붓을 다시 드는 꿈이다. 그의 얼굴에, 웃음 너머 지나온 시간이 잠시 비친다.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웃음은 지을 수 있어도, 살아온 시간은 감출 수 없다.
새벽마다 문을 열고 누군가를 기다린 시간,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던 날,
그래도 다시 웃을 수 있던 날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삶을 살아낸 시간은, 한 사람의 얼굴이 된다.

앞치마를 두른 목회자 황선순.
오늘도 웃는 얼굴로 사람을 맞는다.

성경 넘기는 손.
손끝이 머문 자리마다, 지나온 시간이 있다.
“어릴 때 꿈은 현모양처였어요.”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지만 오래 붙잡지는 못했다.
“미술은 돈이 안 되니까 다른 일을 해라, 부모님이 그러셨지요.”
붓을 내려놓은 채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견디려 애쓰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내 눈높이에서 사람을 바라봤지만, 이제는 그 사람이 살아온 배경과 인생이 먼저 보여요.”
누군가 건넨 ‘현재의 나는, 살아온 시간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칠순쯤에는 살아오며 만난 사람들 얼굴을 그려서 개인전을 열어보고 싶어요.”
내려놓았던 붓을 다시 드는 꿈이다. 그의 얼굴에, 웃음 너머 지나온 시간이 잠시 비친다.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웃음은 지을 수 있어도, 살아온 시간은 감출 수 없다.
새벽마다 문을 열고 누군가를 기다린 시간,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던 날,
그래도 다시 웃을 수 있던 날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삶을 살아낸 시간은, 한 사람의 얼굴이 된다.

류성환, 「웃으며 산다 1, 2」, 캔버스에 유채, 60호, 2026
웃는 얼굴, 사람을 그리다
웃음은 완벽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부족함과 상처를 품고도 오늘을 살아가기에 아름답다.
이름은 없다. 얼굴만 남았다.
여기 모인 얼굴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가족이고, 친구이며, 이웃이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웃음이라는 하나의 표정으로 서로 이어진다. 어떤 웃음은 햇살처럼 번지고, 어떤 웃음은 그늘처럼 머문다. 어떤 웃음은 오래된 상처를 품고 있고, 어떤 웃음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기다린다.
류성환은 그 얼굴들을 그리며, 겉모습이 아닌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완벽해서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라, 부족함과 상처를 품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얼굴이다.
전시는 끝났다. 하지만 그림 속 얼굴들은 오늘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묵묵히 삶을 이어가고 있다.

류성환, 「타이어 펑크 나던 날」, 캔버스에 유채, 30호, 2026

류성환, 「난 아이스 말차라떼만 마신다」, 캔버스에 유채, 50P,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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