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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heON _ 낯익은 풍경의 뒷면
낯익은 풍경의 뒷면
사진가 오석근
덧대어진 시간의
흔적을 좇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오석근 사진가

오석근, 인천(仁川) 01, 2019, 디지털 시-프린트, 가변크기(동양화학)
밤이면 차창 밖으로 기묘한 풍경이 흘러갔다.
동양화학 공장 옆, 폐석회 웅덩이가 어둠 속에서도 초록빛으로 선명했다.
정확히는 ‘형광빛이 감도는 크리미한 소다색’이었다.
그 위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소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제2경인고속도로를 달리다 그 풍경이 보이면, 집에 거의 다 왔다는 것만 알았다.
오석근은 도원동에서 태어나 용현5동에서 자랐다.
‘토지금고’라 불리던 동네, 옛 염전을 메워 만든 땅이었다.
수인선이 지나고 그 너머로 연안부두와 인천항이 이어졌다.
목재가 산처럼 쌓인 부두, 악취 나는 갯벌, 바다를 가로막는 펜스.
너무 오래 보아 그저 낯익은 풍경이었다.
그러다 그는 인천을 떠났다.
동티모르에서 사진병으로 보낸 1년, 가톨릭과 전통 건축이 뒤섞인 성당 앞에 섰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인도네시아로 이어진 지배의 흔적이 아프게 새겨져 있었다.
영국에서 다시 2년을 보낸 뒤에야 인천으로 돌아왔다.
어린 날에는 그저 집이었다. 길이었고, 항구였고, 바다였다.
이제는 안다. 그 자리마다 누군가 살아낸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 선명하던 초록빛.
사진기를 손에 든 그가, 그 빛이 머물던 자리에 선다.

오석근, 적산(敵産) _ 인천(仁川) 88, 2024, 피그먼트 프린트, 가변크기

오석근, 인천(仁川) 91, 2021, 피그먼트 프린트, 가변크기(산곡동 영단주택)
유일한 해방구
‘공부, 공부, 공부.’
학창 시절, 오석근은 스스로를 ‘전형적인 철수’로 기억한다.
집에서 바라는 대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성공해야 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그다음이었다.
그 시절, 숨을 돌릴 수 있는 곳은 동인천이었다.
대한서림 맞은편 골목, 낡은 건물 6층까지 계단을 올랐다.
어둑한 공간에는 눅눅한 냄새가 배어 있었고, 벽마다 누군가 남긴 낙서가 빼곡했다.
심지음악감상실. 신청곡을 적어 내면 DJ가 그 곡을 틀어주었다.
록, 메탈, 올드팝.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압도적이었다.
근처 음반가게를 기웃거리고, 극장에서 영화도 봤다.
훗날 원하지 않던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간 뒤 한동안 방황했다.
그러다 영화동아리에 들어갔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비디오테이프는 재생하면 화면이 지직거리고 형체가 흐릿하게 번졌다.
그래도 그 안엔 어렵게 구한 명작들이 있었다.
동아리 동기들과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함께 비디오카메라를 들었다.
그렇게 만든 작품으로 한 단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부상으로 비디오테이프가 아닌, 진짜 필름이 주어졌다.
서울예대에 다니던 선배가 찾아와 사진을 가르쳐주었다.
처음 손에 든 사진기는 친구에게 빌린 니콘 FM2였다.
영화는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야 했지만, 사진은 달랐다.
혼자 시작해 혼자 끝낼 수 있었다.
“긴 서사가 아닌 압축된 시 같아서 사진에 더 끌렸습니다.”
덧대어진 시간

오석근, 인천(仁川) 22, 2019, 디지털 시-프린트, 가변크기(신흥동)
2000년, 사진병으로 입대했다. 1년을 인천에서 멀리 떨어진 동티모르에서 보냈다.
가톨릭 성당 한 채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서로 다른 지배의 흔적이 뒤섞여 있었다.
시대를 거치며 권력과 문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다는 것을, 처음 실감했다.
영국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인천항, 수인선, 경인고속도로, 연안부두. 모두 그대로였다. 그런데 낯설었다.
너무 익숙해서 들여다보지 않던 풍경이었다.
그러다 2011년, 신흥동에서 낡은 일식가옥 한 채를 마주쳤다.
처음 지어진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다. 다른 시대의 흔적이 여기저기 덧대어 있었다.
그런데도 낯익었다. “어릴 적 살던 용현5동 양옥집이 떠올랐습니다.”
적산가옥敵産家屋, ‘적의 재산’이라 불리던 집.
일본이 패전한 뒤 미군정 소유를 거쳐 한국인들에게 넘어온 것이다.
사람들은 70년 넘게 그 오래된 뼈대를 삶에 맞춰 고쳐 쓰며 살아왔다.
“시대와 욕망에 따라 건축양식도 달라져 왔습니다.
그 모습이 오히려 우리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골목에서 시작된 걸음은 다른 도시로 이어졌다.
부산, 김해, 진해, 대구, 광주, 군산, 정읍, 목포, 서울.
오래된 집들이 지나온 시간도, 남겨진 모습도 도시마다 달랐다.
2018년, 그의 시선은 다시 인천으로 향했다.
오래 보아온 풍경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매립되기 전 북성포구의 갯벌, 낡고 좁은 신흥동 골목.
밤마다 초록빛을 뿜어내던 화학공장도, 사라지고 있었다.
그 앞에 서서 셔터를 눌렀다. 찰칵.

오석근, 기복(祈福)01, 2023, 피그먼트 프린트, 가변크기(광주 산수동)

오석근, 배치와 재배치 05, 2025, 피그먼트 프린트, 가변크기(한국GM 부평조립2공장)
사람이 남긴 것
영국에서 돌아온 뒤부터, 오래된 문양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십장생도 있었고, 호랑이를 그리거나 새긴 것도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2022년, 광주 산수동에서 찾아왔다.
골목을 걷다 한 대문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쇠로 만든 단단한 표면에 갖가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비와 학, 소나무와 구름.
불교와 도교, 이슬람과 아르누보, 한국과 중국, 일본의 상징들.
“이 문양이야말로 한국인의 종교와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느꼈습니다.”
그 문양이 어디서 왔는지, 주물대문을 만드는 공장까지 찾아갔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매캐한 쇠 냄새가 공기를 채웠다.
벌겋게 달아오른 쇳물이 식어가고, 문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차갑고 단단한 쇠 위에 사람들은 소망을 새겼다.
기복祈福, 가족이 평안하기를, 별탈 없이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2025년 어느 날, 그는 사진기를 들고 한국지엠 부평2공장을 찾았다.
컨베이어 벨트가 밤낮없이 돌아가던 산업화의 현장이었다.
2022년 11월을 마지막으로 공장의 불빛은 꺼졌다.
아버지의 첫 승용차, 대우 로얄XQ도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그 차 뒷자리에 형과 나란히 앉아 온 가족이 어디든 함께 떠나곤 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던 풍경, 그 안을 채우던 웃음소리.
그 차 한 대가 달리기까지, 누군가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나사를 조였을 것이다.
땀에 젖은 상처투성이 손으로.
“인천은 땀으로 세워진, 노동자의 도시입니다.”
그에게 인천은 붉게 물든 하늘과 제2경인고속도로의 굉음,
꺼지지 않는 공장 불빛과 녹슬었어도 여전히 돌아가는 기계들로 채워진 도시였다.
이제는, 그 기계를 움직이며 묵묵히 살아온 사람들을 본다.
그 하루하루를 버텨온 사람들이, 곧 인천이었다.
오늘, 우리도 그 시간을 살아간다.
오석근 사진가
1979년 인천에서 태어나 고향 인천을 기반으로 작업해왔다. 2011년 인천의 일식가옥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2021년부터 부산·김해·진해·대구·광주·군산·정읍·목포·서울 등으로 〈적산〉 연작을 이어왔다. 2018년에는 사라지고 변화하는 인천의 풍경을 담은 〈인천〉을, 2022년에는 광주 산수동에서 발견한 문양을 계기로 〈기복〉 연작을 시작했다. 2019년 개인전 《인천》(인천도시역사관·스페이스빔), 2024년 개인전 《실용과 기복》(서울 시청각 랩)을 열었으며, 2022년 부산비엔날레 《물결 위 우리》, 2023년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등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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