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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heON | 유병용 작가

2026-09-06 2026년 9월호

가까운 것들의 깊이


사진가 유병용, 오래 머문 자리에서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유병용 사진가



「바다를 꿈꾸며」-003, 2011


따각, 따각. 계산기를 두드리는 손끝은 흐트러짐이 없어야 했다.

숫자 하나만 틀려도 그날은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은행원으로 그렇게 마흔 해를 살았다.

그 팽팽한 시간의 틈으로, 사진이 끼어들었다.


1971년 2월 20일, 첫 월급을 받은 날이었다.

곧장 충무로의 한 카메라 상점으로 향했다. 

손바닥만 한 캐논 데미17Canon Demi17을 품에 안았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멀리 갈 수 없는 삶이었다. 시선은 가까운 곳에 머물렀다.

담장에 핀 장미, 골목 어귀의 오래된 벽, 그리고 소래 포구.

갯벌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살갗이 구릿빛으로 그을렸다.

그 위로 법성포를 뛰놀던 어린 날의 자신이 스쳐 지났다.


1978년, 동짓재에 올랐다. 고향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 풍경을 그는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소년은 어느새 백발의 사진가가 되었다.


2005년 어느 새벽, 바닷가 공판장.

팔려나갈 생선들이 비닐 아래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감기지 않은 검은 눈동자들, 다시는 바다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아직 바다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바다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다를 꿈꾸며」-01, 법성포, 2005


사진집 『ROSE』 표지, 1988, 방배동



빨간 등 아래서


전남 영광 법성포. 집 앞에 ‘문화사진관’이 있었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2층짜리 적산가옥이었다.

어린 소년에게 그곳은 늘 궁금한 세계였다.


어느 날, 증명사진을 찍으러 계단을 올랐다.

의자에 앉자 눈앞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펑.’

빛이 눈앞을 훑고 지나갔다.

다음 날, 인화된 사진 한 장을 받아 들었다.

순간 스쳐 간 표정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호기심 많은 제게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튿날, 동생 둘을 데리고 다시 그 계단을 올랐다.

사진이 나오는 과정을 보여달라고 몇 번이고 졸랐다.

사진사가 마지못해 암실 문을 열어주었다.

어둠 속에는 빨간 등 하나가 켜져 있었다.

현상 용기에 담긴 종이 위로 희미한 윤곽이 번지기 시작했다.

나란히 앉은 세 남매의 얼굴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신비로웠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었다.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고 한참을 나무라셨다. 

그래도 사진만은 버리지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세 남매는 그 사진 속에 함께 있다.


그 후로 틈만 나면 사진관으로 달려갔다.

암실에서 쓸 물을 길어다 날랐다. 심부름 값은 없었다.

그저 곁에서 사진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때 다짐했다. 커서, 반드시 사진을 하겠노라고.

그러나 삶은 그를 다른 길로 이끌었다. 

사진을 마음에 품은 채, 소년은 자라 은행원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80년대 중반,

아내의 반대에도 아파트 베란다 한쪽에 기어이 작은 암실을 꾸렸다.


빨간 등이 다시 켜졌다.



중학교 1학년, 세 남매의 기념사진, 1965


소래포구 하동夏童들, 1984



소래포구 수인선 협궤, 1985



법성포 전경, 1984


다시, 인천


인천에서, 그는 첫 발령을 받았다.

1971년 8월, 배다리 사거리에 있는 외환은행 인천지점이었다.

자유공원 자락에 머물렀다.

창밖으로 언덕 아래 개항장이 내려다보이고,

바람이 불면 바다 냄새가 방 안까지 밀려들었다.


2년 만에 군에 입대하며 인천을 떠났다. 

이 도시와도 그렇게 멀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은행에서 인천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1982년 겨울, 부평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다시, 인천이었다.


간석동에 살림을 차렸다. 멀지 않은 곳에 소래가 있었다.

염전이 넓게 펼쳐지고 그 끝자락에 갯벌과 어시장이 이어졌다.

바람이 지나가면 염전의 수면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낯설지 않았다. 


“소래에 가면 고향 법성포가 떠올랐습니다. 그게 참 좋았습니다.”

필름에 소래의 풍경이 한 장씩 쌓여갔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갯벌 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놀았다.

햇볕에 그을린 어깨 위로 흙탕물이 튀었다. 

첨벙, 첨벙.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가 갯바람을 타고 번졌다.


뷰파인더 너머로 낯익은 얼굴 하나가 겹쳐 보였다.

진흙투성이 손으로 게를 잡고, 굴을 캐던 어린 자신이었다.


그날의 사진에 그는 짧은 글귀를 남겼다. 

‘소래포구 아해들, 갯벌을 벗 삼아 구릿빛으로 변해간다.

어릴 적 법성포구, 그 아련한 기억의 편린.’


“인천은 제 사진의 고향입니다.”


 

위  「바다를 꿈꾸며」-07, 2017


아래  「바다를 꿈꾸며」-05, 2024



‘바다를 꿈꾸며’


친구와 다투듯 소주잔을 기울이던 밤이었다.

허름한 횟집, 주방 앞 선반 위로 그릇들이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질 것 같았다.

술잔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냈다.

“그 위태로움이, 꼭 그날의 우리 사이 같았습니다.”


사진은 그렇게 시작되곤 했다.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것 앞에서, 그의 시선은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낡은 벽 앞에서도 그랬다.

칠이 벗겨지고 금이 간 자리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의 시간이 새겨져 있었다.

“벽은 단절이고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그 너머의 실존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1992년 「벽의 표정Ⅰ」, 이듬해 「벽의 표정Ⅱ」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2024년, 「벽의 표정Ⅲ-사람도 풍경이다」까지.

삼십여 년이 흘렀다.


고향 법성포를 향한 시선은 그보다 오래됐다.

1978년, 동짓재에 올랐다.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 후로 고향에 갈 때마다 같은 자리에 섰다.

“아들 녀석과 손주가 대를 이어 기록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키지 못한 순간도 있었다.

국민학교 5학년, 짝꿍이 물었다. “바다는 얼마나 깊을까.”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칠십을 훌쩍 넘긴 지금도, 그날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2011년 새벽, 그는 또 다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바닷가 공판장이었다. 좌판 위 물고기들의 감기지 않은 눈동자가 마음에 밟혔다.

“바다로 돌아가기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바다는 멀리 있지 않았다. 칠산바다, 고향 앞바다였다.

일곱 개의 섬이 떠 있는, 어린 날 뛰어놀던, 

철수가 돌아오지 않은 그 바다. 


“오늘도 나는 바다를 꿈꾸며 삽니다. 

살아야 할 날들이 살아온 날들만큼 소중하기에.”

그 눈 속에서, 파도가 밀려온다.



유병용 사진가

1971년 한국외환은행에 입행해 2010년까지 40년간 은행원으로 일했다. 부평 근무 시절 사진동아리 ‘부영회’에서 이명동 전 동아일보 사진국장을 만났고, 신포동지점 근무 당시에는 김용수 작가와 교류하며 인천에서 사진 활동의 폭을 넓혔다. 재직 중이던 1988년 「장미」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그 후 「들꽃」, 「體 ·BODY」, 「벽의 표정」 연작, 「사진, 말 없는 시」 등 서른두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1978년부터는 고향 법성포 포구를 반세기 가까이 기록하고 있다. 인천시사진대전·전국제물포사진대전 초대작가이며, 2025년 「바다를 꿈꾸며」를 발표했다. 같은 해 ‘2025 인천국제현대사진기획전’ 「레전드 인천」 부문 제1회 헌정 작가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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