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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인이 만난 사람 | 고상우 작가

2026-09-06 2026년 9월호

경계 없는 바다를 향해


푸른 서해바다 위로 점박이물범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에는 중국 어선이 떠 있고, 바다 끝으로는 북한 땅이 보인다. 사람이 만든 경계가 선명한 곳이지만, 물범들은 그 선이 의미가 없다는 듯 자유롭게 바다를 오간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고상우 작가는 그곳에서 물범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가 인천시에 기증한 작품 ‘Borderline(경계선)’은 이렇게 시작됐다. 작품 속 물범들의 눈빛은 직접 마주한 듯 생생하다. 그날 백령도에서 만난 물범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왜 오랫동안 동물을 그려왔는지, 그리고 한 생명을 바라보는 일이 작품이 되는 과정은 무엇인지. 그의 작품 속 눈빛을 따라가 봤다.


글. 윤은혜 본지 편집위원   사진. 이재형 포토디렉터 장소. 사바나 미술관


“잔잔한 바다에 점박이물범이 떠 있었어요.

 그 뒤로 중국 어선, 북한 땅도 보이고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그런 광경은 없을 거예요.”


고상우 작가


고상우 작가의 개인전을 찾은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백령도에서 만난 특별한 아이들

고상우 작가가 처음 백령도를 찾은 것은 4년 전. 점박이물범을 만나기 위해 떠난 걸음이었다. 고상우 작가는 이전부터 동물의 생명에 관심이 많았다. 저어새를 만나러 남동유수지를 찾기도 했고, 호랑이의 흔적을 찾으러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백령도까지 닿았다.

하지만 점박이물범을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서울에서 인천항까지 갔지만, 안개 때문에 되돌아온 적도 허다하다. 그래도 다시 배를 탔다. 해경의 모니터링을 받으며 접경지역까지 들어간 어느 날, 마침내 만난 물범들. 그는 물범들을 ‘아이들’이라 칭하며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잔잔한 바다에 점박이물범이 잔뜩 떠 있었어요. 그 뒤로 중국 어선, 북한 땅도 보이고요. 그 사이에 아이들이 떠서 평화롭게 다니는 모습이 너무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그런 광경은 없을 거거든요.”

그날의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았고, 그는 1년 뒤 다시 백령도로 향했다. 인공 바위에 앉아 아이들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글도 썼다. 사진을 찍는 것과는 조금 다른 시간이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기다리고, 가까워지는 시간. 그는 그렇게 물범을 바라보며, 서로의 마음이 조금씩 맞닿는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물범은 소리에 무척이나 예민했다. 아주 작은 셔터 소리에도 놀라 바다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엄마 물범은 저를 보고 도망갔는데 아기 물범 한 마리가 남아서 저를 끝까지 바라봐줬어요. 한 7초 정도 서로 바라봤던 것 같아요. 그때 그 눈 맞춤, 감정이 잊혀지지 않아요.” 

찰나의 순간, 그 7초가 작품이 됐다.



사람이 만든 경계


백령도 접경 지역에서 만난 점박이물범들.


‘Borderline(경계선)’.

작품 속 물범은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제목에 담긴 ‘경계’라는 단어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이 바다에 누가 선을 그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다는 원래 하나였잖아요.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선을 그은 거죠.”

점박이물범은 수온과 먹이를 따라 움직인다. 백령도에서 머물다가 중국 쪽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때가 되면 다시 백령도로 돌아오기도 한다. 사람이 만든 경계와는 상관없이 바다를 오가는 아이들.

“우리는 여권이 있어야 돌아다니잖아요. 아이들은 여권 없이도 경계를 오갈 수 있어요.”

작가는 이 아이들을 평화의 상징처럼 바라본다. 군사 지역이자 접경 지역인 백령도에서, 아이들은 아무것도 상관없는 듯 자유롭게 살아간다. 작품 속 눈빛에도 그 마음을 담았다.

“아이들의 눈빛 속에 ‘우리를 보호해 주세요. 우리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우리에게는 경계선이 없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역설적인 일이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환경이 물범들에게는 오히려 축복이 됐다. 그래서 작가는 더더욱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길 바란다. 작품은 백령도 생태관광체험센터에 걸릴 예정이다. 작업의 시작이자, 아이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만나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겼다.



고상우, <내가 여기에 있다>


 생명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고상우 작가의 작품


애정이 담긴 작품과 함께


여린 곳을 향하는 시선

고상우 작가가 그려온 동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저 아름다운 동물이 아닌, 도움이 필요한 생명이라는 것. 학대받은 동물, 실험에 희생된 토끼,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독수리, 멸종 위기에 놓인 호랑이. 작가의 시선은 늘 조금 더 연약한 곳을 향했다.

“저는 일반적인 동물보다는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에게 관심이 가요.”

그는 점박이물범도 같은 마음으로 바라봤다. 당장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개체 수가 줄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종이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큰 보호는 의외로 단순하다.

“내버려두는 거예요. 인간이 개입하지 않게 주변 환경을 만들어주고, 아이들이 더 좋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조사하고 그저 바라보는 거죠.”

화려한 꽃보다 잡초가 좋다는 그. 밟혀도 다시 일어나고,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라서다. 그는 이들이 어쩌면 가장 강한 존재라 믿는다.

“제 작품에 나오는 아이들도 그런 아이들이에요. 인간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이죠.”


화장품 임상시험에 이용된 토끼의 모습을 담은 작품 <사라진 감각>


작품 속 동물들의 눈빛에는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상처입은 동물들을 모티프로한 드로잉 작품



작품 하나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작가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기록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림을 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좋은 그림, 예술은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작품도 그러길 바라고요.”

여러 지자체와 진행했던 다양한 환경, 동물보호 프로그램도 같은 마음에서 시작했다. 그의 작품을 본 뒤 ‘저희가 너무 이기적으로 살았네요.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와 같은 말을 들을 때 가장 큰 의미를 느낀다.

앞으로도 점박이물범을 더 그리고 싶다는 그. 다양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담고, 캠페인으로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저어새 작업도 이미 2년 전부터 시작했다. 남동유수지를 오가는 아이들을 담은 작품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그가 작품을 통해 오래도록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결국 하나다. 공존.

“우리는 모두 같이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공존하지 않으면 생태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백령도의 바다에는 여전히 사람이 만든 경계가 놓여있다. 하지만 물범들 앞에서 그 선은 의미 없어진다. 고상우 작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다시 그림으로 옮긴다. 경계가 없는 아이들의 눈빛을 마주하다 보면 문득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경계가 아니라, 그 너머에 숨 쉬는 생명인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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