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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과 젊음, 그 자유를 허 하는 용현벌
늙음과 젊음
그 자유를 허許하는 용현벌
10년 전, 2001년에 환경부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서울, 인천, 수원 등 10개 지역 주민 1천2명을 대상으로 주거지역 생활 만족도를 조사했다. 결과는 1위 서울 압구정동, 2위는 수원 화서동이었다. 이어 인천 용현동이 3위를 차지했다. 응답자의 77.0% 가 ‘만족’을 표시했다. 60년 전 고향을 뒤로 한 피난민들은 ‘자유’를 찾아 둥지 튼 것에 만족하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대학생들은 캠퍼스의 ‘자유’를 만끽하며 그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용현동은 예전에 비랑이 혹은 비랭이라고 불렸다. ‘비랑’이란 ‘파도(浪)가 난다(飛)’는 뜻으로 쓰였다고 전해지긴 하나 ‘비탈진 곳’이라는 해석이 더 우세하다. 용현동의 대표적인 비탈길은 흔히 얘기하는 ‘독쟁이’ 고개다. 독쟁이는 발음 편의상 독정리에서 파생한 명칭이다. 독정(讀亭)은 책을 읽는 정자라는 뜻이다. 이곳은 배산임수의 땅 모양이다. 수봉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승기천 개천이 흐르며 멀리 인천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양지바른 기슭이었다. 책 읽기에 알맞은 정자가 들어서기에 딱 좋은 곳이다. 훗날 인하대학교가 이곳에 터를 잡게 된 운명은 이미 타고 난 듯 하다.

미나리밭의 상아탑
용현벌은 온통 미니리밭과 배추밭이었다. 6.25 동란 이후에는 잠시 피난민수용소로 사용되었다. 그 벌판에 상아탑이 세워졌다. 인하대학교는 1954년 4월 24일 仁川(인천)과 荷蛙伊(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이름으로 개교했다. 하와이 교포 2세 교육을 위하여 이승만 박사가 설립해서 운영했던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대금과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이 기초가 되었다. 인천시는 용현벌판을 대학 교지로 사용하도록 무상으로 기증했다.
대학 설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0년 하야할 때까지 매년 입학식과 졸업식에 참석할 정도로 인하대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1979년 2월 이 전 대통령 동상이 하와이 한인동지회에서 보낸 성금 5만 달러로 인경호 부근에 3.4m 높이로 세워졌다. 화강암 석대의 추념문에는 ‘하와이 이민의 한 많은 눈물을 받아 본교 창립에 크게 이바지한 초대 대통령’이라고 쓰였다. 그러나 동상은 학원 민주화 바람을 비켜가지 못했다. 1983년 10월 학생들에 의해 동상은 밧줄에 묶여 땅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동상은 현재 학교 측에서 원형대로 복원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동상 없는 석대만 30년 가까이 인경호를 쓸쓸히 바라보고 있다.
인하공전 7호관 뒤에는 중요한 국가시설이자 문화재가 자리 잡고 있다. 언뜻 보면 첨성대처럼 보이는 3m46㎝ 붉은 벽돌의 원통형 건축물은 ‘수준원점(水準原點)’이다. 이 수준원점은 대한민국 지형 높이의 기준점이 된다. 바다로부터의 높이를 말하는 해발의 기준점이 바로 이 수준원점이다. 원래는 당시 바닷가였던 중구 항동1가 2에 설치했다. 하지만 바다매립이 계속되자 이 수준원점을 더 이상 바다 옆에 두기 어렵게 되었고 육지 안으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됐다. 이때 이전 대상지로 떠오른 곳이 인하공전 캠퍼스였다. 지반이 평탄하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수준원점은 1963년 12월 항동 바닷가에서 인하공전으로 옮겨졌다.
비록 국립지리원의 관리 대상물이지만 학생들은 국내 유일의 수준원점이 학교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인하공전은 학교에서 송도유원지까지 왕복하는 원점마라톤대회는 물론 원점체육대회, 원점축제 등 ‘원점’ 돌림자의 행사를 매년 치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원
먹자골목에서 남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용현4동 성당이 나온다. 그 성당 지하에 흔히 ‘시연센’이라고 부른 시민교육연극센터가 있다. 2004년 성당과 남구청 그리고 전 시립극단 예술감독 박은희씨가 힘을 합쳐 지하 74평 공간에 150석 규모의 관람석을 갖춘 연극공간으로 문을 열었다. 그동안 문화체육관광부 복권기금 등을 활용해 근근이 꾸려왔는데 시연센은 결국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운영비 부족으로 두 달 전에 문을 닫았다.
인하대와 같은 울타리에 있는 정석항공고 뒷문 건너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원인 해성보육원이 있다. 이 보육원은 우리나라 개화기 역사의 한 페이지를 품고 있다. 프랑스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는 1894년 가을 길거리에 버려진 4살과 12살 된 여자아이와 이듬해 4월 2살 된 남자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답동성당 내에 해성보육원을 설립했다. 광복 이후 고아의 수가 급격히 늘자 보육원은 1948년 현재의 자리에 용현동 분원을 설치했다. 6·25전쟁 때 신부와 수녀들은 200여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송도와 덕적도 등으로 피란을 다녀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보육원을 재정비하고 1975년에 아예 보육원 자체를 용현동 분원으로 이전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당구 필수학점 300
인하대생들은 주로 뒷문으로 다닌다. 정문 쪽은 공장지대이기 때문에 상권이 발달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뒷문 건너편이 대학가가 되었다. 먹자골목은 남북축과 동서축이 교차하며 활기를 띠고 있다. 얼마 전 이 골목은 ‘걷고 싶은 거리’로 조성되었다. 동서축은 100년 전 경인철로를 형상화해 옛 역사의 연혁 등을 주물동판으로 표현했고 남북축은 우리나라 해발고도의 기준이 되는 수준원점을 이미지화해 국내외 대표적인 해발고도를 주물동판으로 설치했다.
7,80년대 인하대 후문의 명소는 당구장이었다. ‘당구학점 300은 돼야 졸업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하대생의 평균 당구실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만큼 당구장도 많았다. 그 덕분에 이 동네에서 유명한 여자 당구선수가 배출되었다. 2004년과 200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김가영 선수다. 김가영은 아버지 김용기씨가 이곳에서 당구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연스럽게 큐대를 잡았다. 어린 딸을 위해 아버지는 큐대를 키에 맞춰 잘라 주었고, 김가영은 대학생 오빠들 틈에서 당구공과 씨름했다. 15년 후 그녀는 포켓볼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의병과 열녀
용현동 골목에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기념물이 있다.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는 유리(유류)부대 뒤편에 시·도기념물 제4호인 이윤생·강씨정려(李允生姜氏旌閭)가 있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동네에 세운 건축물이다. 1604년 용현동에서 태어난 이윤생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인근의 낙섬으로 들어가 강화도에서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면서 청나라 군사를 무찔렀다. 다시 청나라 대군이 침입하자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의 전사 소식을 들은 부인 강씨도 곧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후에 철종은 정려를 내리고 그를 좌승지에 강씨를 숙부인으로 봉했다.
얼마 전 용현동 일대에서 영화 한 편을 촬영했다. 인생 끝에 찾아온 아름다운 사랑을 깊은 시선으로 담아 낸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는 용현동의 풍광이 고스란히 담겼다. 영화담당자는 용현동 일대를 둘러보고 로케이션 장소로 바로 오케이했다. 김만석(이순재)의 손녀인 연아(송지효)의 직장인 용현3동 주민센터를 비롯해 비룡쉼터, 용현시장 등이 필름 속으로 들어갔다.
6·25 전쟁 후 독쟁이 골목과 수봉산 기슭에는 이북에서 내려 온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영화 속의 노인들처럼 지나온 시간에 순응하며 동네와 함께 그렇게 늙어 갔다. 비탈진 골목은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들의 주름처럼 깊게 패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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