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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속도’체송인 오류동서 우편물 교환
‘빛의 속도’체송인
오류동서 우편물 교환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우편제도의 탄생 시점은 고종 21년(1884) 4월 22일(이하 전 양력임) 병조참판 홍영식을 우정총판(郵政總辦)에 임명하면서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승정원일기에는 홍영식을 우정국 총판에 임명하면서 ‘1883년 개항을 전후해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래 국제 관계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우정총국(郵政總局)을 설립하여 각국과의 우편 관리는 물론 국내 우편 사업도 점차 확장토록 하기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글 김윤식 시인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약 90년 전에 실제 사용한 우체통
인천우체사 관할구역 ‘제물포항과 인천읍내’
우정총국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분국이 인천에 세워졌다. 초대 인천분국장이 바로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이다. 그는 1867년 과거에 낙방하고 박정양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박정양이 일본 시찰을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었는데 그때 박정양과 동행한 홍영식, 김옥균 등을 알게 되었고, 결국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가 되어 인천에 근무하기에 이른 것이다. 월남은 갑신정변 후 낙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정총국은 장정(章程)도 정하고 임원도 선정하여 1884년 11월 18일 업무를 개시했다. 그러나 당시 개화파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자리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키면서 크게 놀란 고종은 전교를 내려 업무 시작 불과 20일밖에 되지 않은 우정국을 아예 폐지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나마 싹이 트던 근대식 우편 사업은 중단되고 마는 것이다.
그 후 1895년에 이르러서야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우편 업무가 재개된다. 그해 7월 22일 한성과 인천에 다시 우체사(郵遞司)가 설치되는데, 농상공부에 통신, 선박을 관장하는 통신국을 설치하고 전국 주요 도시에 우체사 개설을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 인천우체사는 외리(경동)에 있는 해운회사 이운사(利運社) 건물 안에 두었다가 1898년경 내리(내동)로 옮겼다. 직원은 사장 김장한 외에 주사 2인과 몇 명의 집배원이 있었다고 한다.
인천우체사의 업무 관할 구역은 애초 ‘제물포항내와 인천읍내’로 한정되었다. 후에 우체 구역을 구내와 구외로 나누었는데, 구내는 우체사로부터 10리 이내, 구외는 20리 이내였다. 인천우체사는 다시 10년 뒤인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강제로 한일통신합동운영협정을 체결하고 자기네가 운영하던 인천우편국에 흡수하면서 사라지고 만다.
우체사가 설치될 때 우편배달에 관한 규정이 명문화되어 있었다. 체송인(우체부)은 매일 1회 각각의 우체사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하여 매시 10리(약 4㎞)의 속도로 중간 지점인 오류동에 도착해서 30분 사이에 서로 우편물을 교환하여 다시 출발지로 돌아가고 다시 각각의 우체사에 오후 5시 30분까지 도착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구한말 우체부
최초 발행은 5종의 무늬우표
우체사의 개국과 함께 우표도 함께 발매되기 시작했는데, 그 판매고가 우편물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이 우표 수집을 위해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09년 4월 12일자 통감부 문서에도 ‘미국인 여성 메이어의 한국 우표 3만여 매 불법 소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 종류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선황제(先皇帝, 고종) 시절 발행된 것과 지난해 일본 황태자의 도한(渡韓) 기념우표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원래 서양 부인들은 이런 종류의 우표를 환영하기 때문에 이를 본국에 가지고 돌아가서 매각하여 상당한 이익을 얻을 야심이 분명한 것 같다.’는 내용이 보인다.
국내에서도 고우표(古郵票)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1900년 11월 1일자 황성신문에 고우표 매입 광고가 보인다. 당시 어투 그대로 옮겨 본다.
“폐점에서 좌개한 대한제국우표 이왕 우표 휴지된 것을 비싸게 살 터이니 가지고 계신 제군은 속히 폐점으로 가져 오시오. 혹 봉투에 붙인 것이라도 있거든 떼서 가져 오시오. 오 분, 십 분, 이십오 분, 오십 분. 또 좌개 ‘문’자 있는 것은 갑신년에 발간한 것인데 혹 있는 것은 중가로 살 터이니 불론 다소하고 방매하오. 오 문, 십 문, 이십오 문, 오십 문, 백문. 한성 니현 구옥상전.”
최초의 우표는 1884년 우편 사업을 시작할 때 발행되었는 데 5종의 무늬우표였다. 그러나 이 우표는 갑신정변으로 수명이 끝나버렸고, 1895년 우체사가 설치되며 발행된 우표는 중앙에 태극무늬가 있는 ‘태극우표’였다. 이 우표는 일제 통감부에 의해 1905년 6월 30일에 발매 정지되었다.
국제 우편 사무는 1900년 1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서울, 인천, 목포, 부산, 원산, 진남포에 외국 우편교환국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우편에 관해서도 인천이 역시 선구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지면 관계상 부득이 여기서 줄이거니와 근대 우편 제도 시행 당시 있었던 이야기들은 다른 지면을 기약한다.

구한말 관공서나 번화가에
설치된 우편함(목재)
별난 역사, 별난 물건 시리즈에 게재된 다양한 우표 관련 물건의 실제 모습은 중구 차이나타운에 있는 <인천근대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엔 희귀한 근대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관람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료는 성인 2천원, 학생 1천원. 문의 76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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