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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날 주눅들게 한 고적대 모자 있네

2012-01-02 2012년 1월호

 

그곳에 날 주눅들게 한 고적대 모자 있네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김보섭 자유사진가

 


너무 한산하다. 아무리 상권이 죽었다지만 그래도 한때 인천 제일의 시장이 아니던가. 사람 발길 대신 시장통을 가로지는 찬바람만이 가게 문을 흔들며 지나간다. 동구 송현동 중앙시장. 한창 때는 이 시장 안에 노점 가게만 갖고 있어도 부자 소릴 들을 때가 있었다. 
“창피해. 뭐 자랑이라고 이런 걸 소개해요.”
시류에 빠른 사람들은 돈벌어서 다 빠져나갔는 데 당신들은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가게에 아직도 매달려 중앙시장에 있다는 게 그저 부끄럽단다. 세계사 모자점은 혼수가게 틈에 끼어 있다. 한복집, 이불집들은 울긋불긋 화려하기라도 하지, 이 가게의 쇼윈도에는 구닥다리 모자 몇 개가 진열돼 있어 행인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전화로 대강 위치를 묻고 갔는데 두 번 그냥 지나쳤다.
모자가게이니 당연히 각양각색의 수많은 모자가 진열돼 있다. 그러나 들어서자마자 모자 하나가 눈을 확 끌었다. 닭털 달린 고적대 모자였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학교에는 없는 다른 학교 고적대를 공설운동장에서 처음 보고 ‘우리학교는 정말 똥통학교’라고 단정지었다. 고적대원들은 다 바비인형 같았다. 나를 주눅 들게 했던 그 인형들이 썼던 그 모자가 그곳에 깃털을 휘날리며 있었다. 그야말로 ‘군계일학’이다.
“1978년에 인천에서 전국체전이 열렸을 때 만든 모자예요. 어휴, 그 때 생각만 해도 진땀이 흘러요.” 이기호(73) 정순연(68) 부부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어느날 공무원 한 명이 허겁지겁 들어와 고적대 모자 200개를 만들 수 있냐고 물었다. 기간은 일주일. 체전 개막식을 위해 인현동 축현초등학교에서 인천연합고적대가 함께 모여 연습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모자를 통일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그 다음날 새벽에 집을 나선 부부는 인천시내 양계장을 다니며 닭털을 모았다. 이 사장은 모자를 재단해 형태를 만들고 아내는 금술을 박고 노모는 닭털을 염색했다. 2,3일이 지나자 문을 열기도 전에 여자아이들이 가게 앞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사이즈 맞고 닭털 예쁜 것을 먼저 고르기 위해서다.  
이기호 사장이 모자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62년 경.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누님이 인천으로 시집오게 되어 송도고 야간부에 적을 두고 뒤늦은 공부를 했다. 졸업을 막 앞두고 길에서 우연히 성광실고(선인고 전신) 학생연대장을 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에게서 학생회 자치 매점에 학생모를 한번 납품해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모자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내게 모자라니…’ 아무튼 그는 모자공장에 가서 그 학교 모자를 만들어 하나에 30원씩 쳐서 납품했다. 대금을 동전으로 받아 자루에 넣고 짊어지고 오다가 터져버려 동전들이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동전을 쓸어 담으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이거 이문이 괜찮은 데’   

 

“교모 만들어 팔 때가 전성기였지. 그땐 교련 모자까지 있었어요.” 한창 때는 기술자와 보조 합쳐 7명이 있었는데 신학기를 앞두고는 1천개 이상 납품해야 하기 때문에 밤새기 일쑤였다. 대략 대·중·소 사이즈로 납품했지만 가끔 머리가 유난히 크거나 작은 학생들은 직접 가게에 와서 맞춤으로 주문하기도 했다.
부부가 털어놓은 재밌는 이야기 하나. 이른바 ‘범생이’ 학교에 납품하면 그걸로 끝인데 ‘좀 노는 학교’에 납품하고 나면 며칠 후에 어김없이 학생들이 찾아온단다. 일종의 애프터서비스가 뒤따른다.
“아이들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면 딱 느낌이 와요. ‘아, 저 녀석은 평챙을 해달고 하겠고 저 놈은 니스 칠을 해달라고 하겠구나….’ 나름 멋을 낸다고 한거죠.”
윗층 작업장을 보여줄 수없냐고 했더니 지저분하다며 안주인이 펄쩍 뛴다. 계속 사정을 했더니 사진은 찍지 말고 그냥 보기만하라며 마지못해 안내한다. 2층 살림집을 거쳐 3층 작업장으로 올라갔다. 한해 1천개 이상의 모자를 만들어낸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모자공장’이 그곳에 있었다. 수북이 쌓인 원단 조각들, 그리고 밤새워 돌렸을 재봉틀 한대.
창 너머로 경인선 열차가 한대 지나간다. 아마 이 사장은 매일 새벽 기차 지나 갈 때 깨서 막차 지날 때 까지 재봉틀을 돌렸으리라. 그렇게 평생을 모자 만들며 2남1녀를 잘 키웠다.
“화재를 세 번이나 당했어요. 예전에는 중앙시장 건물이 죄다 목조였는데 옆집에서 불이나 우리 가게에 옮겨 붙었어요. 대목 보려고 원단을 잔뜩 사다놨는 데 그때 다 타버렸어.” 
교복 자율화 후 교모는 사라졌지만 일반모자는 다양해졌다. 이 사장은 눈썰미가 좋아 한번 쓱 보면 ‘카피’가 가능했다. 사각모 주문이 들어왔을 땐 베니어판 사다가 규격대로 잘라 까만 천 씌우고 꽃술을 달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면 서너 개씩 만들어 냈다. 복제뿐만 아니라 그 만의 창작품도 여럿 만들었다. 독특한 원단을 사서 새롭게 디자인해서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알고 지나가다 들어와선 그걸 콕 찝어 사가곤 했다.

 


“사모님 위해서 모자 하나 만들어 주신 적 있으세요.”
“그게, 뭐….” 쉬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원래 난 모자 쓰는 것 좋아하지 않아서.” 대신 부인의 답변이 온다. 
“그럼 자녀들을 위한 모자는요.” “전혀. 아이들이 모자라면 질려서 그런지 몰라도 쓰질 않았어요.” 그런 그가 얼마 전에 손녀를 위해 색동모자를 만들어줬다고 자랑한다.
새마을모자, 경매사모자, 경비모자, ROTC모자, 요리사모자, 야구모자… 10평 남짓한 가게 안에는 다양한 직업군의 모자들이 걸려 있다. 사람의 신분을 드러내는 데 모자만한 게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진열장 안에 망사로 된 마도로스 풍의 모자 하나가 놓여있다. 메모지가 꽂혀 있다. ‘선금 1만원 잔금 2만원 ???’ 재작년 여름에 뱃일하는 사람이 맞춘 모자다. 시간이 지났지만 그 모자는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뱃사람은 모자 맞춘 것을 까맣게 잊었는지 아니면 아직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는지. 그 모자만이 그 사연을 알 듯했다.       
가게를 나서려는데 다시 고적대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도 고적대 모자 만드세요?”
“아니, 고적대 있는 학교가 이젠 거의 없어요.”
“그럼 기념으로 갖고 계신 거예요.”
“기념은 무슨? 주문이 가끔 있어요.”
“예? 어디서요?”
“호텔에서요. 깃털 뺀 모자를 벨보이들이 사용해요.”
꽁지 빠진 고적대 모자라… 불현듯 공설운동장에서 행진하던 이웃학교 고적대 아이들의 모습이 다시 눈 앞에 펼쳐졌다.

 

취재하는 두 시간 동안 손님이라곤 세 명의 아주머니들이 전부였다. 그들은 10여 분간 이 모자 저 모자 써보곤 1만5천원 짜리 털모자 하나 사갔다. 기성품 모자는 팔아도 별 재미가 없다. 단체 모자 주문이 들어와야 3층 모자 공장에 불이 켜지고 재봉틀이 힘차게 돈다. 옥상에서 중앙시장통을 내려다보니 이곳이 시장인지 의심할 만큼 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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