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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사진 뽑아 준 현상기에 뽀뽀하고 퇴근했죠”
“온종일 사진 뽑아 준 현상기에 뽀뽀하고 퇴근했죠”
카메라가 ‘재산’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귀하다 보니 사진 찍는 것은 호사 취미 중의 취미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진 찍히는 것조차 날을 잡아야 할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카메라는 공원이나 졸업식장에 나타나는 ‘사진’ 완장을 찬 사진사의 전유물일 뿐이었다. 그런 시절부터 시작해서 디카를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오늘날까지 동인천역 앞에는 여전히 성신카메라점이 자리 잡고 있다.
글. 유동현_본지편집장 사진. 김보섭_자유사진가

“대단했죠. 행락철 주말이면 필름을 사기 위해서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섰어요. 당시에는 우리 가게 앞에서 버스를 타야 월미도, 송도유원지, 용유도로 놀러갈 수 있었으니까 나들이 가기 전에 필름 한통씩 꼭 챙겼죠.”
성신카메라 사장 이준석(68)씨는 50년을 사진기와 함께 했다. 그가 사진과 인연을 맺은 것은 황해도에서 피난 나와 충남 광천에서 살던 때였다. 사진기를 한 대 갖고 있던 프랑스 신부 한 명이 마을 성당에 부임했다. 마을에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부는 집 벽돌을 뚫고 간유리를 설치해 암실을 만들었다. 우연히 그 암실에서 현상되는 사진을 보며 이 사장은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된다.
그는 18세되던 해에 인천에 올라온다. 극동사진관에서 사진사 보조로 일하며 2년 동안 사진기술을 익혔고 배다리 사진예술원에서 사진사로 일했다. 어느 날 중앙시장에 있는 일심상사에 들러 일제카메라 ‘페트리7s’를 1만3천원에 샀다. 짜장면이 15원하던 시절이었으니 입이 딱 벌어지는 가격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서울 청계천에 내다팔면 1만6천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단한 이문이었다. 그 길로 일심상사에 달려가 월급 주지 않아도 좋으니 일만 하게해 달라고 졸랐다.
그곳에서 1년 동안 일하면서 사진기 판매 루트 등 ‘영업 비밀’을 알게 되었고 독립해 잠시 ‘나까마’로 일하며 카메라 중개상을 했다. 60년대 인천에는 타 도시에 비해 외제 중고 카메라가 많이 유통되었다. 안경점에서도 중고 사진기를 팔았고 심지어 노점상에서도 취급할 정도였다. ‘미군극동교역처’라는 공급처가 인천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패전국 일본은 물건으로 보상했고 한국으로 들어오는 화물 속에 야시카, 코니카 등 카메라가 많이 들어 있었다. 이 물건들이 인천 시장으로 슬쩍 스며들었던 것이다.
중고 카메라 장사로 돈을 모은 그는 1970년 6월 15일 자신의 가게 ‘성신카메라’ 간판을 단다. 당시 인천에서 가장 비싼 금싸라기 동네에 문을 연 데다 마침 컬러필름이 선보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카메라가 일상화되던 시기와 맞아 떨어져 문턱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 하루에 필름 1천롤을 팔만큼 장사가 잘되었다. 단지 필름만 판 게 아니라 카메라와 각종 부품도 판매했으며 ‘카메라 대학병원’이란 간판을 달고 수리도 했다. 한켠에 사진관 공간을 만들어 마그네슘 가루 터트리며 짬짬이 사진도 찍었다.
그 시절 그가 겪었던 에피소드 한 토막. 어느 날 청년 한명이 명함판 사진을 찍겠다고 왔다. 언뜻 보니 신영균 같이 생긴 미남이었다. 그런데… 아, 자세히 보니 마마를 앓은 흔적이 있었다. 그는 사진을 찍고 돌아갔고 이 사장은 연필로 정성껏 얼굴 수정을 했다. 요즘말로 ‘뽀샵’을 한 것이다. 며칠 후 사진을 손에 쥔 그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사진관을 나섰다. 이 사장은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너 달이 지났을까. 중년 여성 한 명이 사진관에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이 사장의 뺨을 후려쳤다. 사연인즉, 그 청년은 중매쟁이를 통해 사진을 한 처녀에게 전달했고 사진 속 모습이 맘에 든 처녀는 그 청년을 만났는데 어찌어찌하다가 혼전 임신을 하게 되었단다. 모든 게 사진의 ‘조작’ 때문이라고 생각한 처녀의 엄마는 사진관으로 쳐들어 왔던 것이었다. 둘은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둘 낳고 잘살고 있으며 이 사장과 그 부부는 지금도 서로 연락하고 산다. 물론 중매값으로 5만원 짜리 양복 한 벌을 얻어 입기도 했다.
장사가 잘되자 카메라점 이층을 사진관으로 꾸미고 큰돈 들여 자동 현상기 한 대를 사들였다. 한창 때는 하루에 돌사진, 가족사진, 증명사진 등 500번 이상을 촬영했고 자동 현상기는 하루에 200롤 이상의 사진을 뽑아냈다. 이 정도를 해내려면 기계는 잠시도 쉴 수가 없다. 고장이라도 나면 제 때에 납품을 할 수가 없어 타격이 컸다. “사람도 사람이었지만 기계가 정말 고마웠어요. 그래서 ‘오늘 아프지 않아 고맙다’하면서 꼭 뽀뽀를 해주고 퇴근 했어요”
내친김에 그는 1981년 길 건너편에 ‘후사코상사’라는 인천 유일의 필름 도매상을 차렸다. ‘후사코’라는 이름은 후지. 사쿠라, 코닥의 앞 글자다. 당시 자신의 가게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필름의 순서로 만든 이름이다, 필름회사 납품차량들이 문도 열기 전에 서로 물건을 대려고 진을 칠 만큼 후사코상사는 인천업계에서는 큰 손이었다. 필름과 카메라의 하루 매상이 당시 웬만한 집 한 채 값이었던 1천만원을 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후사코가 들어서있던 목조건물에 불이 났다. 화마는 그의 재산을 몽땅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고 결국 그는 다시 원래의 자리 성신카메라로 돌아왔다. 다행히 이쪽 사업은 관공서와 학교는 물론 일반인들의 수요가 계속 늘어나며 여전히 호황기를 이어갔다. 특히 학교마다 사진반이 생기면서 가게 안에는 카메라를 멘 학생들로 늘 북적거렸다. 당시 동인천역 부근에는 성신카메라 외에도 제일카메라, 현대카메라, 김씨카메라 등이 있을 만큼 카메라 관련 장사는 재미보는 사업이었다. 개그맨 이혁재씨의 부친도 ‘축현사’ 라는 간판을 걸고 인근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며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며 활약할 때였다.
그러나 천년만년 갈 것만 같았던 필카(필름카메라) 업계에 서서히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듣도 보도 못한 ‘디카’가 등장한 것이었다.
“처음 디카를 보곤 그냥 웃어넘겼어요. 사진 맛이 안 나기 때문에 몇 대 팔리다가 없어질 거라고 다들 그랬죠. 허허, 완전 오산이었죠. 이제 필카는 골동품 취급도 못 받아요. 오죽하면 코닥이 망했겠어요.”
70년대 초반 사진 한 장 현상하는데 100원이었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에 80원이었다. 그래서 한롤 현상하면 짜장면 10그릇 팔았다고 좋아했단다. 요즘엔 한 장에 300원이다. 별 재미가 없다. 게다가 일거리가 없어 하루 종일 5롤도 현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상소는 거의 문을 닫았다. 남은 곳도 현상기를 없애고 성신카메라에 일감을 몰아준다.
그는 현상되는 사진을 보면서 세태가 많이 변한 것을 느낀다.
“예전에는 가족사진을 찍으러 오면 10명 이상이 보통인데 요즘은 달랑 셋이에요. 2, 30년 전만해도 부부가 찍은 사진은 별로 없고요, 있더라도 서로 닭 보듯 떨어져 찍었죠.”
갑자기 이 사장의 목소리가 나지막해진다. “요즘은 어떤 줄 아세요. 부부 누드 사진은 물론 성행위 장면까지 찍어가지고 와요. 허, 참 요지경이예요.”
5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갓 결혼한 여성이 신혼여행 가서 찍은 거라며 필름 20통을 맡기고 갔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도 찾아가질 않아 규정상 모두 폐기시켰다. 3년 가량 지났을 때 그 여자가 다시 필름을 맡기고 갔다. 현상해 보니 태국 파타야에서 찍은 사진인데 남편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달포 전에 성신카메라는 40년 동안 굳건히 자리 잡았던 곳에서 바로 뒷골목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동안 남편을 도와 수없이 사진기 셔터를 눌렀던 이 사장의 부인이 원래 자리에 튀김 닭집을 냈다. 뒤로 물러난 성신카메라는 이제 대학에서 광고사진을 전공한 아들 이승현(38)씨가 요즘 트렌드에 맞게 스튜디오를 꾸며 운영할 계획이다.
부인의 닭집에는 아직 성신카메라점 간판이 걸려 있다. 노란 코닥 마크와 ‘사진의 모든 것’이라는 문구가 써있다. 그 간판은 오래지 않아 내려질 것이다.
사진과 관련된 추억을 품은 오래된 공간 하나가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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