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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시계바늘이 돈다

2012-12-03 2012년 12월호


문화의
시계바늘이 돈다


“너, 어디 살아?” “숭의동 109번지.”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주먹 석 대부터 날아왔던 시절이 있었다.
거친 동네를 풍자하던 이 우스갯 소리도 벌써 30여 년이 넘은 ‘전설’이 되었다. 성채처럼 생긴 전도관을 중심으로 골목 골목이 이어지고 처마가 맞닿아 내려앉은 산동네. 거친 숨 몰아쉬며 언덕을 오르내리던 숭의동 109번지 쇠뿔고개(우각로) 시계가 언제부턴가 재개발 소문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흑백 사진첩이 되어 추억을 담고 있던 이곳이 요즘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쇠잔해버린 쇠뿔고개가 문화의 시계바늘을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글. 사진 김민영_자유기고가

 

 

멈춰버린 숭의동 109번지의 시계

얼마 전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골목으로, 뭉클한 시선을 끌면서 재조명된 숭의동 109번지. 긴 골목 끝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등에 업고 잔잔히 걸어 내려오던 그 장면이 떠오른다. 노부부의 쓸쓸함을 잘 담아낸 그 골목은 사람소리보다 바람소리가 더 많았다. 노년의 쓸쓸한 뒷모습으로 표현되었지만 이 골목의 ‘왕년’은 사뭇 달랐다.
전도관 아랫동네로 유명했던 숭의동 109번지는 조용한 동네가 아니었다. 기왓장을 올리듯 빼곡히 채운 집들이 산비탈에 줄지어 있었고 골목마다 사람들도 가득했다. 어렵던 시절, 인천에서 제일가는 ‘거친 동네’라 불릴 만큼 사람냄새 흥건했던 곳이다. 이웃끼리 대문을 열고 일상을 나누던 이곳이 어느 순간부터 풍선의 바람 빠지듯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곳에 재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바람은 언덕 높은 숭의동 109번지를 휑하게 만들었다.
원주민들은 하나 둘 비좁은 집을 비웠다. 골목길과 비탈길을 따라 빈집이 늘어났다. 사람의 발걸음을 쉬이 만날 수 없는 쓸쓸한 동네가 되었다. 어느날 재개발의 시계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재개발이 늦어지면서 마을은 급속히 침체되어 갔다. 골목은 지저분해졌고 우범지역으로 변해갔다. 우각로에 남은 원주민의 평균 연령이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그러나 숭의동 109번지 우각로를 지키고 있던 햇볕은 변함없이 그 골목에 있었다. 그 볕을 따라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언덕을 오른 이들은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다. 이들은 페인트와 망치를 들고 흑백의 골목길을 알록달록 화사한 색으로 바꿨다. 햇살은 골목을 더욱 화사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골목에 망치소리, 사람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곳에 ‘우각로 문화마을’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소문을 듣고 문화 마을을 찾은 젊은이들과 동네 아저씨의 기념사진 한 컷.   


 ‘우각로 문화마을’ 문패 달다

“처음에 쉽지 않았어요. 문패를 달기까지 원주민들과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빈집이지만 분명이 주인이 있는 집이죠. 집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처음엔 반대가 심했죠. 가뜩이나 재개발이 늦어져 예민해 있는데 우리가 들어와 빈집을 고치고 ‘공동체 작업장과 개인 작업장으로 사용하겠다’ 하니 누가 좋아했겠어요.”
1년 전의 이야기다. ‘우각로 문화마을’의 씨앗을 처음으로 뿌리기 시작한 조영숙 시인이 조심스럽게 사연을 전한다. ‘우각로 문화마을’은 남구청과 남구의제21문화분과가 협조체계를 이루며 이후의 진행을 순조롭게 했다. 결국 원주민과 집주인의 허락으로 ‘우각로 문화마을’은 이렇게 숭의동 109번지의 일원이 되었다.
“재개발이 시작되면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바로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재개발로 잠시 멈춘 시간. 문화·예술 창작과 함께 지역문화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이들은 문화의 시간을 돌리기로 했다.

 

담쟁이를 배려한 벽화 모습. 새로운 예술의 장르다.


우각로는 화장(化粧) 중

쾅쾅쾅~~ 뚝딱뚝딱~~~ 그들이 집을 고친다. ‘우각로 문화마을’에서 현재 작업 중인 가옥은 13채다. 입주자인 문화·예술인과 단체가 자비를 들여 고치는 대신 월세는 따로 지불하지 않는다. 3채는 봉로방과 도서관, 공방 등 공동체 공간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10채는 문화·예술인들 각자의 주거와 창작실로 사용된다.
요즘 그들은 ‘공간’이라는 ‘작품’ 만들기에 분주하다. 허락된 공간인 빈집을 고치기 위해 틈틈이 짬을 내 분주히 숭의동 109번지의 언덕을 오르내린다. 현재 연극 연출가와 연극인, 시인, 영화인 등이 둥지를 만들고 있다.
기왓장이 깨지고 날아간 곳은 비닐 덮개가 씌워졌다. 답답한 다락의 벽은 뚫어 시야를 넓히고 벽지를 바르기 전 신문지로 초벌 작업을 한다. 창문의 흔적만 남아 있는 사각의 창을 넘어 지나가는 이웃들과 미소 인사를 건넨다. 연극 연출가 진정하씨의 작업실이 하루 하루 달라지고 있다.
또 다른 집의 굳게 닫힌 문이 열린다. 방과 방 사이의 벽을 시원하게 뚫었다. 벽난로가 만들어지고 있다. 붉은 벽은 잔금으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하다. 황토를 구해 벽에 발라 놓은 황토벽은 아직 미완성이다.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지만 조금씩 완성해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연극인 손민목씨의 집은 멋스럽게 변화 중이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끊었던 영화 ‘도둑들’에서 홍콩 보스의 보디가드로 출연했던 낯익은 얼굴이다. 그의 집 난로 위에선 곧 물이 보글보글 끊어 오르고 연극인들이 난로 주변에 둘러 앉아 밤새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것이다.
골목을 나선 그에게 원주민 할머니가 인사를 건네며 다가온다. 할머니가 가리킨 곳은 할머니집의 처마다. “우리집 처마 밑이 망가졌어. 시간나면 우리집 좀 고쳐줘요.” 그가 목장갑을 벗으며 “그러지요” 하며 시원스럽게 답한다.
그들의 입주는 원주민에게도 훈훈한 바람을 전한다. 숭의동 109번지 언덕이 분명 달라지고 있다. 이미 정리 · 정돈이 끝난 곳도 있다. ‘봉로방’이란 문패를 단 게스트하우스. 이곳 창문에서 바라 본 전경은 그 어디에도 비할 곳이 없다. 빛도 바람도 거칠 것이 없다. 지하 공간은 책으로 가득 채운 도서관이다. 페인트로 알록달록해진 집들의 벽에는 지역의 스토리가 담긴 벽화가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그들의 공사는 느리지만 오늘도 계속 진행 중이다.

 


집 보러 왔소

‘우각로 문화마을’ 사무실의 문이 열린다. 인천을 대표하는 김영승 시인이다. 오랜만에 그것도 이곳에서 보게되니 더욱 반갑다. 시인은 시집 발간 틈틈이 부평과 연수동을 오가며 지역민들에게 시 쓰기를 지도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어~ 이게 누구야~?”,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곳에 어떻게 오셨어요?”, “집 보러 왔어요~”
시인 특유의 잔잔하고 위트 섞인 목소리가 전해진다. ‘우각로 문화마을’이 벌써 문화·예술인들 사이에 입소문을 탔다. 김영승 시인은 책방과 작업실로 사용할 공간을 찾아 발걸음을 한 것이다. ‘우각로 문화마을’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조영숙 시인이 쓸만한 집으로 안내한다.
빈집으로 나온 곳은 비탈진 언덕길에 놓인 2층집이다. 윗층은 영화인들이 공동작업장으로 이미 사용 중이다. 아래층의 문이 열리고 방치돼 버려진 두 칸의 방이 공개된다.
“뭐 이 정도면 됐지요. 벽지만 새로 하면 되겠어요.” 김영승 시인은 무덤덤한 듯하지만 꼼꼼히 두 칸을 오가며 공간 활용의 계획을 세운다. ‘우각로 문화마을’ 사무실은 숭의동 109번지의 복비 없는 복덕방이다.
사람이 도니 이야기가 돌고 문화가 돌기 시작했다. 남구학산문화원은 이곳을 무대로 원주민 어르신들과 단편영화를 만들고 있다.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은 전도관과 지역의 센터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영화배우가 된 우각로의 어르신들과 감독, 스태프들이 다음 촬영 전 도서관에 모여 앉았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을 시작으로 영화 이야기가 진행된다.
숭의동 109번지의 중앙로가 된 ‘우각로 문화마을’ 사무실 앞 골목에 빛이 들고 있다. 햇볕과 함께 찾아온 사람의 빛. 그 볕과 빛이 아까워 슬며시 대문 앞에 나와 앉은 할머니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평온하다. 공을 튕기며 한 학생이 골목길을 걷는다. 골목통으로 한 줄기 바람이 분다. 우각로 골목에 문화의 바람이 불면서 마을은 지금 회춘(回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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