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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은 엄마의 명상 시간

2013-02-01 2013년 2월호

 


뜨개질은

엄마의 명상 시간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인천시청 앨범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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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년대 뜨개질은 의(衣)식주 해결의 하나였다. 의류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그 당시 겨울옷은 대부분 엄마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아이들이 크면 다시 풀어서 몸에 맞춰 뜨개질을 해야 했다. 형이 입던 옷을 막내 여동생용으로 다시 고쳐 뜨기도 했다. 어디 옷뿐인가. 장갑, 모자, 심지어 가방까지 ‘엄마표’ 털실 제품이 만들어졌다. 화평철교 쪽 중앙시장 어귀에는 ‘○○모사’라는 간판이 붙은 털실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인천시 차원에서 ‘동네 대표’ 주부들을 모아 뜨개질 강습을 열기도 했다.
“마지막에서 두번째 코는 안뜨기 방식으로 바늘만 빼고, 마지막 코는 원래 하던 겉뜨기로 마무리하세요” 마치 ‘암호’ 같은 설명이 계속되었지만 모두들 귀를 쫑긋 세워 집중했다. ‘신기술’을 익힌 아줌마들은 마을로 돌아와서 자랑스럽게 이웃들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에는 뜨개질 강습 기사가 연재돼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엄마가 그렇게 뜨개질에 열중한 것은 꼭 자식 옷 때문만은 아니었을 게다. 요즘으로 말하면 그 자체가 ‘명상’이었다. “눈 찔린다. 좀 떨어져 있거라.” 그 시간만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으셨기에 자식조차 옆에 두기를 꺼려했는지도 모른다. 마음 속 깊게 자리 잡은 화(火)를 손끝 놀림으로 삭혔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온 식구들이 잠든 늦은 밤에 혼자 뜨개질을 하신 것이다. 멍한 눈빛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쉴새 없이 움직였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요즘 엄마들도 여전히 뜨개질을 한다. 입힐 대상이 예전과 달라졌을 뿐이다. 자식이 아니라 북한이나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털실을 짠다.        

 

 

우량아 선발대회는 생후 6개월부터 24개월 미만의 아기들이 참가하는 대회다. 당시 우량아의 기준은 질병이 없어야 하고, 각종 예방접종을 빠뜨리지 않고 맞아야 하며 무엇보다 체중과 가슴둘레 등 신체발달과 영양상태가 좋아야 했다. 대부분 키 크고 살집 좋은 아이들이 우량아로 뽑혔다.   
사진은 1965년 인천의 우량아들이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약간 걱정되는 비만아들이다.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는 1971년 문화방송과 남양유업 주최로 처음 열렸다. TV중계까지 했기 때문에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83년까지 계속된 이 대회는 해마다 시도별 예선을 거쳐 최종 결선을 치렀다. 분유회사가 공동 주최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모유보다 ‘분유’를 먹이면 누구나 우량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피력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우리도 아이들 잘 먹이고 잘살게 되었다’는 정책 홍보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 놈 참 장군감이네”라는 말은 이웃집 아이에게 건네는 최상의 덕담이었다. 작곡가 겸 가수 주영훈, 바둑기사 이창호 9단, SBS 윤현진 아나운서 등이 우량아 선발대회 출신들로 알려졌다.

자전거가 행정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공무수행을 위해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녀야 했던 시절에 자전거는 유용한 ‘조달품’이었다. 사진은 1967년 인천시가 각 동에 배부한 업무용 자전거들이다. 자전거를 수령한 저들 중에는 자신의 동사무소로 돌아가기 위해 족히 반나절은 페달을 밟아야만했던 직원들도 있으리라. 우체부의 자전거, 쌀집의 자전거, 양조장의 자전거… 한때 자전거는 한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재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과연 저들은 요즘처럼 24단 기어가 달린 고급 자전거들이 아파트 구석에서 녹슨 채 나뒹굴 줄 상상이나 했을까.

 

 

살아생전 김일성은 수도 없이 화형(火刑)을 당했다. 사진은 1968년 1·21사태에 대한 인천시민 규탄 대회 장면. 1·21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기’ 위해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간첩을 보내 청와대 침투를 시도한 사건이다. 어김없이 학생들이 화형식 현장에 동원되었다. 그날 동인천역 광장을 메운 학생들은 김일성이 오래오래 불타서 한 교시가 아니라 두세 교시 수업을 빼먹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으리라.


인천(仁川)이란 이름을 얻은 지 올해로 꼭 600년이 된다. 빛바랜 과거 사진을 통해 인천의 현재를 가늠해보며 미래를 그려 본다. 이 지면에는 1960년대와 70년대 이른바 인천의 ‘산업화’ 시절 사진을 시리즈로 게재한다. 그 속에 땀 흘리고 있는 우리의 부모님 그리고 코 흘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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