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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것일까
누구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것일까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인천시청 앨범 발췌

월남 파병 전사자 초상집을 찾은 인천시 관료(1966년)
멀리, 월남(베트남)이란 나라에서 전쟁이 났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월남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파병을 결정했다. 1964년 9월 11일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이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발했다.
이듬해 월남 정부의 추가 파병 요청에 따라 공병대대, 경비대대, 수송중대 등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가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떠났다. 이후 실질적인 전투 병력인 맹호부대가 미국함대 ‘베이 휠드’호 등에 분승해 인천항 출발하는 것을 시작해 십자성부대, 백마부대, 백구부대, 청룡부대 등이 속속 월남전에 뛰어들었다.
1964년 부터 73년까지 약 9년간 31만3천명이 파병되었다. 동네 마다 한두 명의 젊은이가 월남에 피병돼 베트공과 싸웠다. 몇 달 후 파병된 삼촌과 아들은 고향집에 미제 라디오나 소형 TV를 소포로 보냈다. 이것을 받은 집은 동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곳곳에서 곡(哭)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편지, 소포 대신 전사통지서가 도착한 것이다. 월남전쟁에서 전사한 우리나라 군인은 5천명에 이른다. 그들의 핏값은 값졌다. 전사자들의 피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불씨가 되었다.
사진1은 1966년 인천시청 관료가 조의품으로 쌀 한 가마니를 갖고 월남 참전 전사자의 초상집을 찾은 모습이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으로 보아 전사자는 분명 식구들을 위해 자원해서 전장(戰場)에 뛰어들었으리라. 상주인 듯한 형과 누이들은 슬픔에 겨워 차마 카메라와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고 있다.
월남전이 서서히 종전으로 접어들자 ‘따이한’ 부대들은 하나둘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정부에서는 ‘월남에서 돌아 온 새까만 김 상사’들을 개선장군처럼 대우하며 열렬히 환영했다. 사진2는 1970년 동인천에서 답동사거리까지 인천 출신 파병 군인들의 귀국 환영 카퍼레이드 장면이다.

경인선 복선 개통 축하 시승을 하고 인천역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1965년)
1899년 경인철도가 놓인 이래 66년 동안 철마는 외길로 다녔다. 단선(單線)이었기 때문에 기차가 마주치면 한쪽에서 기다려 줘야 했다. 복선 공사는 일제강점기에 꾸준히 시도되었지만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고 1965년 9월 18일 동인천역에서 영등포역 까지 26.7㎞ 구간이 복선(複線)으로 개통되었다. 6·25 동란 전에 이미 복선 노반이 돼있어 1년이면 완성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결국 시간이 많이 흘러서야 복선이 되었다.
복선 개통일인 1965년 9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이다. ‘인천은 우리 이수(里數)로 불과 80리길. 요즘으로 말하면 38.9㎞으로 분명 대(大) 서울의 ‘작은 집’ 위치에 있다. 언젠가 멀지 않은 장래에 경인선은 전철화 되고야 말 것을 예상한다면 지금의 복선 개통은 그 전주곡에 지나지 못한다. 근대 공업화 계획에 따라 경인간 주민들은 불가불 ‘한솥의 밥’을 안 먹을 수 없게 된 것도 필지의 사실이다.‘
현재의 경인선은 전철화는 물론 ‘따따블’ 복복선이다. 당시의 기사처럼 경인선 덕분에 인천과 서울 시민들은 ‘한솥밭’을 매일 먹고 있다.
사진3은 복선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열차를 타고 인천역에 도착한 장면이다. 당시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유승원씨가 플랫폼에서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4는 플랫폼 부근에 세운 인천시민의 염원 현수막이다. ‘박대통령 각하, 경인선 개통 다음 과제는 인천항 제2 독크의 축조공사입니다’ ‘부평수출산업공단 조성은 전 인천시민의 숙원입니다.’ 간절함이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이후 두 사업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일명 ‘똥차’가 송림위생처리장에 인분을 쏟아내고 있다(1972년)
요즘 골목에서 사라진 소리 한마디. “똥 퍼!” 그 외침은 꼭 밥 먹을 때 들렸다. 엄마는 숟가락을 급히 내려놓고 뛰쳐나가 아저씨를 불러 세우신다. 식구들은 밥 다 먹은 순서대로 변소 앞에 나가 코를 쥐고 쭈그리고 앉아 땅에 금을 긋는다. 지게 하나에 한 줄. 이번 달은 왜 이렇게 금이 많이 그어지지. 엄마와 아저씨는 똥통의 숫자로 또 실랑이를 벌인다.
사진5는 1972년 서구 연희동 분뇨처리장의 모습이다. 당시 이곳에서 처리되는 분뇨는 극히 일부분. 나머지는 그냥 바다나 인근 밭에 뿌려졌다. 그래서인가 인천에는 똥바다, 똥고개로 불리는 동네가 많았다. 1977년 인천시 최초로 현대식으로 인분을 처리하는 송림위생처리장이 세워졌고 약 30년 동안 인천의 ‘항문(肛門)’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몇 년 전에 처리장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를 위한 국제배구장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분뇨를 처리하던 그곳에서 이제 세계적인 선수들이 강스파이크를 날릴 날이 머지 않았다.
인천(仁川)이란 이름을 얻은 지 올해로 꼭 600년이 된다. 빛바랜 과거 사진을 통해 인천의 현재를 가늠해보며 미래를 그려 본다. 이 지면에는 1960년대와 70년대 이른바 인천의 ‘산업화’ 시절 사진을 시리즈로 게재한다. 그 속에 땀 흘리고 있는 우리의 부모님 그리고 코 흘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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