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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타임캡슐엔 벚꽃 잎도 들어 있으리

2013-04-01 2013년 4월호

그 타임캡슐엔

벚꽃 잎도 들어 있으리


자유공원은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였다. 70년대 말까지 만해도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인천에 놀러 왔다는 ‘인증샷’의 단골장소였다. 그 당시 시내에서 결혼식을 막 끝낸 신혼부부들은 대부분 자유공원에 올라와 포즈를 취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촌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고향을 떠났다가 오랜만에 모인 초등학교 동창들은 식사 후 맥아더장군 동상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즐거운 귀환 신고식 같은 것이었다. 서울사람에게 남산이 있었다면 우리 인천사람에겐 자유공원이 있었다.


그림·글·사진 차지원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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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웬만한 가정의 앨범에는 빛바랜 자유공원 사진 한두 장씩은 꼭 있다. 그만큼 인천인들은 자유공원을 좋아했다. 지금은 서울사람 중에 63빌딩에 올라가보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이 듯 이제는 인천사람들도 자유공원에 거의 가지 않는다. 기억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다. 이제는 점차 ‘기억’을 지나 ‘역사’로 가고 있는 그곳에서 오랜만에 인천고양이 도도(都島)가 마음껏 ‘자유’를 만끽했다. 하얀 꽃비 내리는 행복한 사월에. 

 


자유공원은 1888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서울 파고다공원보다 8년이나 앞섰다. 와우, 놀랍다. 이 공원의 나이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원래 이름은 각국(各國)공원으로 구한말 현재의 공원 부근에 살던 외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림이 그려진다. 머리색이 노란 외국인들이 바다를 보며 양산을 받혀들고 산책하거나 양지 바른  풀 위에 자리를 깔고 둘러 앉아 도시락을 먹는다. 혹은 벤치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 마치 외국의 어느 공원의 모습이다.   
이후 일본사람들의 의해 서(西)공원으로 불리다가 광복 이후 이 공원의 이름은 만국(萬國)공원으로 고쳐 불렸다. 1957년 맥아더장군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이름이 이렇게 여러 번 바뀐 만큼 여기저기에 다양한 근대문화의 잔상들이 스며있다. 당시를 경험치 못했던 우리에게 그 역사적 흔적을 찾아 서성이게 하는 타임캡슐이 묻혀 있는 곳이다. 자, 그럼 그 타임캡슐을 잠시 열어보자.

 


공원광장에서 남쪽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중간에 파란색 양철지붕을 얹은 서양식 건물이 있다.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의 설계로 1901년 세워진 제물포구락부이다. ‘구락부’라는 말은 영어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이다. 일본사람들 참 영어 발음이 희한하다. 
이곳은 1913년까지 독일. 영국. 러시아. 미국 등 서양인들의 사교장으로 사용되었다. 내부에는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등이 있고, 밖에는 테니스장이 있었다고 한다. 보름마다 파티를 열면서 식사도 하고 춤도 추었다고 한다. 100년 전의 ‘Saturday Night Fever’? 이 대목에서 왠지 심사가 뒤틀린다. 이제 이곳은 천장에 샹들리에를 달고 한쪽에는 당시 분위기대로 외국인들이 차와 술을 마시던 바를 되살려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새롭게 오픈했다. 이 건물이 유명세를 탄 것은 김하늘과 고수가 출연한 2001년 드라마 <피아노>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석정루(石汀樓)
공원 서쪽 끝에는 팔각형 2층 누각이 멋지게 서있다. 1966년 인천에서 목재업과 해운업으로 돈을 많이 번 한 독지가가 인천시민을 위해 지은 누각이다. 누각 자체도 멋지지만 ‘石汀樓’란 글씨를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인 박세림 선생이 쓴 것이 더 유명하다. ‘石汀’은 그 독지가의 호이다. 많은 돈을 기부했으니 누각에 그런 이름이 붙을 만 하다.
이곳에서는 인천 앞바다에 떠 있는 섬들이 보이는 데 특히 건너편 월미도의 모습이 가장 잘 보인다. 건너편 섬에도 하얀 꽃들이 활짝 피었다. 저녁 어스름, 100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공원의 야경은 벚꽃과도 어우러진다. 흩날리는 핑크빛 꽃잎과 까만 밤하늘, 깊고 푸른 바다가 어울려 멋진 인천 몽타주를 그려낸다.


공원의 지존, 자유공원이 과거가 아닌 현재의 시점에서 유명한 것 중의 하나가 벚꽃이다. 그 역사에 걸맞게 벚나무 나이테도 촘촘하다. 50년 가까이 된 벚나무 500여 그루가 제물포고 뒷담길과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주변에 촘촘하게 심어져 있다. 특히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순환산책길의 벚꽃터널은 자유공원의 백미. 북성동 차이나타운 입구에 세워진 하얀 패루와 백색 벚꽃의 조화는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자유공원엔 ‘돌머리’가 많다. 머리가 나쁜 사람이 사느냐고? NO! 돌패루 ‘선린문’ 입구 돌계단과 이어진 돌기둥에 얼굴들이 그려져 있다. 빨간 얼굴, 파란 얼굴, ‘앵그리버드’ 같이 생긴 화난 얼굴, 웃는 얼굴들이 자유공원을 점령했다.
돌머리를 지나 분홍색 잎을 따라간다. 벚꽃 길을 따라 9경이 나있다. ‘청풍-휘림-수담-소천-채영-다음-채색-운채-첨광’
누가 이렇게 멋지게 벚꽃길을 표현했을까.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흩날리는 벚꽃과 나들이 온 연인들, 가족 모두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몸을 휘감는 꽃잎과 풀내음이 나들이객을 환영한다.
간간히 보이는 낯선 길고양이 조차
경계를 풀었다.

 

인천기상대
북위 37.28˚ 동경 126.38˚. 이 좌표에 둥지를 튼 인천기상대는 문을 연 지 100년이 넘었다. 일제가 1905년 1월 1일 응봉산 정상에 관측장비를 갖춘 인천측우소 청사를 세웠다. 이곳에서 핼리혜성도 관측했고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 기상정보를 주고받을 만큼 보유기술도 뛰어났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인천기상대는 해양기상 분석과 예보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그 앞에는 기상대와 함께 늙어 간 듯한 동네가 있다. 가게 이름도 ‘기상대 슈퍼’다.  

 

홍예문
반세기 동안 자유공원 주변은 많이 변했지만 이 동네의 풍치를 그런대로 간직하게 하는 것은 100년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돌문 때문이다. 이 문은 윗머리가 무지개 형상을 했다고 해서 홍예문(虹霓門)이란 예쁜 이름을 얻었다. 이름에 걸맞게 담쟁이 넝쿨이 계절에 따라 고즈넉한 풍광을 연출하고 있지만 이 문은 슬픈 역사를 품고 있다.
1883년 개항 후 중앙동, 신포동 일대에 터를 잡은 일본 거류민들은 전동과 만석동 방면으로 그 영역을 넓히기 위해 일본 공병대의 힘으로 산허리를 잘라 문을 낸 것이다. 10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6.7m의 폭은 그대로다.

 

 

꺄르르르. 여고생들의 웃음소리가 자유공원 광장을 울린다. 인근 여고에서 봄나들이를 나온 여고생들이다. 광장무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하나, 둘, 셋!’ 하는 소리와 함께, 10대 학생들은 100년 역사에 담겼다.
사공이 많았나. 배 한척이 산으로 올라와 있다. 닻을 내린 커다란 배 모양의 나무 전망 데크에 올라 탄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바다로 시선을 모은다. 예전에 이곳에는 큰 비둘기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광장에는 수많은 비둘기들이 사람들이 던져 주는 먹이를 주어먹는데 여념이 없다. 집이 철거되었는데도 저 비둘기들은 공원을 떠나질 못하고 있다. 어디서 살고 있을까. 어느 공원이든 광장에 비둘기 있어야 멋진 그림이 완성되는 것은 왜일까.
광장의 모퉁이에는 돌로 만들어진 의자가 있다. 자세히 보니 타임캡슐을 의자로 활용해 놓은 것이었다. ‘2007~2017’ 둥근 돌 속엔 2007년의 이야기가 담겼다. 10년 뒤 누구를 위한 메시지일까. 혹은 물건일까.
2017년까지 겨우 4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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