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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뭍, 그곳에서 만나 같은 숨을 쉰다
물과 뭍, 그곳에서 만나
같은 숨을 쉰다
갯벌은 바닷가의 벌판이다. 반도를 내쳐 달려온 산맥은 서해 바다에 다다르면서 그 발걸음을 멈춘다. 산은 수만 년 동안 자신의 몸을 짠물에 담고 곰삭혀서 또 다른 생명의 땅 갯벌을 만들었다. 인천은 오랜 세월 그 너른 품, 갯벌에 안겼던 도시다. 교과서에서 배운 적 있는 들고남이 뚜렷했던 리아스식 해안에 오랫동안 기대어 살았다. 인천의 바다와 땅이 갯벌에서 만나 들숨과 날숨을 서로 나누며 공존해 왔다.
글·사진 유동현 본지편집장
동막, 능허리, 척천, 박짓뿔, 고잔 …. 송도국제도시가 건설된 너른 갯벌을 논밭 삼아 먹고 살았던 마을들이다. 이제는 지도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 되었다. 그들은 동막·척천·고잔어촌계 등을 조직해 마을별로 어로생활을 했다. 동죽, 가무락, 맛, 바지락 등을 채취하고 건강망 그물을 설치해 낙지, 숭어, 꽃게, 장대, 망둥어 등을 잡았다.
이제 1% 밖에 남지 않았다. 인천에서 섬을 제외한 해안선 123.9㎞ 중 99%인 122.8㎞가 매립되었다. 구불구불했던 해안선은 직선으로 쫙 펴졌다. 남은 그 1%의 인천 갯벌이 바로 고잔 갯벌이다.
“오늘 일 나가시나요?”, “시방 안개가 너무 꼈어. 위험해.”
“날씨 좋은데, 오늘은 나가시겠죠?”, “날 좋으면 뭐해. 오늘은 물때가 아녀. 못 가.”
바다는 쉽사리 그 품을 열어주지 않았다. 춘삼월이 지나 뭍에는 개나리 진달래가 피었는데도 바다는 여전히 영하의 날씨 속에 꽁꽁 얼어 있었다. 비, 안개, 바람, 추위, 물때 게다가 어촌계 봄 관광까지 갯벌 취재를 막아섰다.
처음 연락이 닿은 지 40일 만에 그 갯벌을 따라 나섰다. 오늘은 12물, 내일모레는 조금이다. 오늘과 내일 아니면 바다일은 또 며칠 꽝이다. 아침 10시까지 장화와 물을 준비해서 ‘모’처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 모처를 찾아 나섰다. 남동공단 건너편, 한창 매립 공사 중인 도로변의 작은 컨테이너 박스를 어렵게 발견했다. 이곳이 그들의 베이스캠프다.
오늘 갯벌에 나가는 사람은 일곱 명. 모두 여자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할머니들이다. 이미 함께 모여 캠프에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복장을 다 갖춘 상태다. 공사 관계자의 허락을 얻은 후 그들을 따라 나섰다. 갯벌은 멀지 않다. 석축길을 몇 걸음 떼면 바로 회색빛 갯벌이다.
일곱 명은 갯벌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흩어졌다. 자기 구역이 있는 걸까? 아니다. 발 길 닿은 대로 향하지만 무엇보다 그날 자신들의 ‘감’에 따라 흩어진다. 체력이 되는 사람은 물길 끝을 따라 1㎞ 밖으로도 나간다.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그들 10보에 기자는 고작 3, 4보만 전진할 수 있을 뿐이다. ‘끔찍하게’ 찰진 그 끈적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온 신경과 뼈를 힘껏 늘어 잡아당긴다.
멀리 못간 할머니 주위를 맴돌았다. 79세 오월남 할머니다. 바다라곤 구경도 못했을 법한 경북 김천 출신의 이 할머니는 어찌하다 바다와 한 몸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상주 영감 만나서 농사짓다가 먹을 게 없어 45년 전에 저기 호구포로 이사 왔어. 몇 년 농사짓다가 500원 내고 어촌계원 됐지. 당시 방 월세가 400원이었던 시절이야.”
아파트 두 채 사서 자식들에게 나눠준 거, 철 따라 제주도며 설악산이며 좋다는 데는 안가 본 곳이 없다는 등 쉴 새 없이 꼬챙이질을 하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신다. 갯벌에 들어가려면 흔히 22가지 장비를 갖춰야 한다. 장화, 머리 수건, 모자, 물, 간식, 꼬챙이, 웃께, 함지박, 구럭, 고무줄, 밧줄, 함지박…. 여기에 오 할머니는 남들보다 장비가 하나 더 있다. 반쯤 굽은 등에 쇠파이프를 하나 끼어놓았다. 몸의 균형을 잡는 지팡이다.
“힘들지 않으세요.”, “동네 경로당에 가 있으면 아파. 여기 나오면 괜찮아.”
고잔어촌계는 현재 37명의 회원이 있다. 그건 명부상일 뿐 실제로 갯일을 하는 사람은 10여 명 정도다. 다른 일을 하거나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뻘에 들어 갈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최고령 회원은 84세. 가끔 장비를 갖추고 나타나는, 아직 엄연한 현역이다.
‘고잔’은 곶(串)의 안쪽 마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땅이 바다로 비쭉 튀어나온 땅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갈매, 고얏말, 당구지, 듬배이, 돌우물 등 토박한 이름들이 있었던 고잔 마을은 너른 갯벌을 품고 있었다. 고잔 사람들은 땅에서 얻는 것보다 바다에서 얻는 것이 훨씬 많았다.
갯일은 주로 여자들이 했다. 엄마 바지 끈을 잡고나와 장난삼아 조개를 캐던 작은 손은 이제 주름 손이 되었고, 시집와서 시어머니의 꼬챙이를 이어 받은 며느리는 아직도 그 꼬챙이로 갯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고잔의 여인들은 대를 이어 숙명처럼 바다로 나갔다. 남자들은 거의 모두 화약공장에 다녔다. 바로 산 너머 한국화약에 다니며 봉급생활을 했다. 벌이는 여자들이 훨씬 많았다. 한창 때는 한번 나가면 가무락(모시조개)을 80㎏씩 캐서 돌아왔다. 쌀 한가마니씩 이고 나온 꼴이었다.
1985년 남동공단이 조성될 때 갯벌이 매립되었다. 삶의 터전 절반 이상을 잃었다.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1994년 송도신도시 개발을 위해 다시 남은 뻘이 또 메워졌다. 고잔 갯벌은 마치 동맥경화 걸린 혈관처럼 그렇게 좁아졌다. 마을사람들은 이른바 ‘조개딱지’ 하나씩 받아들고 바다를 떠났다. 몇 년 후 그들이 내준 갯벌 위에 송도국제도시 ‘갯벌센터’라는 고층건물이 세워졌다. 송도앞바다에서 ‘진주를 얻겠다’는 꿈으로 영문이름을 ‘Get pearl Center’로 지었다.
육지와 멀어진 갯벌은 고요하다. ‘딸그락…’ 함지에 조개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린다. 이 소리를 백번은 들어야 오늘 하루 벌이를 할 수 있다. 조개 쌓인 함지 무게가 제법 나간다. 10㎏는 족히 된다. 이제는 뻘을 파헤치는 힘에다 함지를 끄는 힘까지 써야한다.
갯골 너머 박씨 할머니 함지에도 조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저 할멈은 얼마나 캤누?’. 잠시 허리 펴고 주위를 돌아본다. 마치 드라이아이스를 피운 것처럼 물안개가 밀려온다. 멀리 함지를 끄는 할머니의 실루엣이 마치 탁발하는 노승처럼 보인다. 그렇게 그들은 갯벌 위에 수많은 발자국을 남기며 고행하듯 걷는다. 그러나 그 발자국은 오늘의 것 일뿐. 갯벌에서는 어제가 없다. 밀려오는 물은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린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무섭게 치고 들어온다. 뒤에 있던 물이 순식간에 앞으로 와 길을 끊기도 한다. 갯벌은 언뜻 보기에 평평한 것 같지만 굴곡이 아주 심하다. 한 길 넘는 갯골도 곳곳에 숨어있다.
오후 3시. 아침에 낀 안개는 끝내 걷히지 않았다. 해무 속으로 사라졌던 할머니들이 누가 소리쳐 독려하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되자 하나 둘씩 모습을 보였다. 멀리 갯벌타워는 마지막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과연 진주와 조개, 어느 것이 진정 값진 것일까. 역사는 분명 평가할 것이다.
하루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던 한 쌍의 새가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러 갯벌로 나왔다. 저어새다. 길 건너 남동유수지 인공섬에 둥지를 튼 새들이다. 매립된 갯벌을 오랫동안 떠나 있다가 2007년경에 다시 돌아온 철새다. 아마 자신의 할아버지 새들에게 진수성찬이 차려지는 ‘밥상’을 전해 듣고 다시 찾아온 후손 새들 일 것이다.
베이스캠프 앞에는 수산차량이 대기하고 있다. 할머니들이 캐 온 조개를 저울에 재고 바로 현금을 지불한다. 1㎏에 4천원. 할머니들 손에 대략 3, 4만원씩 쥐어진다. 하루의 삶 무게가 그렇게 또 저울에 달린다. 할머니들은 얼마나 더 많은 날을 갯벌에 발자국을 남기며 인생의 눈금을 바라볼까. 해가 뉘엿 지자 저어새도, 할머니도 갯벌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고잔갯벌자매. 좌로부터 이정숙(63), 박창순(66), 김명자(68), 이춘자(74), 김임순(74), 김매자(72), 오월남(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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