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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풀장에서 민물로 수영했다
나, 풀장에서
민물로 수영했다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인천시청 앨범 발췌
율목풀장 개장식 모습 (1972년). 높은 지대에 만들어져 멀리 전도관이 보이는 등 전망이 좋았다.
몇 발자국만 떼면 바닷가였던 인천에서 풀장은 그리 흔한 시설이 아니었다. 1972년 6월 22일 ‘율목풀장’의 개장은 시민들에게 대단한 뉴스거리였다(사진1). 염전이나 송도유원지에서 짠물로 멱을 감던 아이들은 여름방학 중에 율목풀장 한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렵사리 풀장에 가면 입장료 생각에 온몸이 퉁퉁 불 정도로 물 속에서 놀았다. 이곳에서는 주로 남자들이 수영을 즐겼는 데 당시 만해도 도심 한가운데 노천풀장에서 여성들이 노출이 심한 수영복 입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율목풀장은 옛 시립도서관(현 율목도서관) 뒤편 현재의 어린이공원 자리에 있었다. 1900년대 초반까지 인가가 거의 없던 이 언덕배기에 일본인들이 9천 여㎡의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일설에 의하면 묘지 상당수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본군이었다고 한다. 1944년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사자(死者)의 땅’으로 인식돼 한동안 인적이 드문 야산으로 남아있었다.
뼈가 나뒹굴던 산꼭대기 땅이 ‘풀장’으로, 그야말로 환골탈태하면서 인천의 명소가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지하수를 퍼 올려 쓰던 이 풀장에 시체 썩은 물이 흘러든다는 괴담이 돌곤 했다. 아마 풀장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퍼뜨린 소문일 테지만 아무튼 입술이 파래지도록 물이 차가웠던 것은 사실이다.
이 풀장은 1996년 폐쇄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공사를 하던 중 땅 속에서 귀와 목이 잘린 문인석 6점이 거꾸로 매장된 것을 발굴했다. 일제가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저지른 행위였던 것으로 추측되었는 데 그중 3개의 문인석이 현재 율목공원 맨 위쪽에 전시돼 있다.
인천의 주요 기업들이 차량을 다양하게 치장해서 행진했다(1970년).
1965년 윤갑로 인천시장은 ‘인천개항일’ 1883년 1월 1일을 시민의 날로 제정했다. 문제는 인천이 개항한 공식적인 날은 시민들이 다같이 하루를 즐기기에는 날씨가 너무 추운 데다 연초이기 때문에 모두들 바쁜 날이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참고 한 것이 일본인에 의해 편찬된 ‘조선사대계(朝鮮史大系)’ 였다. 그 책에 의하면 인천항의 실질적인 개항은 1883년 6월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를 적용해 ‘6월 1일’을 시민의 날로 정하게 된다.
인천시민의 날은 지역 상공계의 제안에 따라 1968년 제4회 때부터 항도제(港都祭)를 겸해서 치르다가 이듬해부터 두 행사를 통합해 ‘제물포제’라 개칭했다. 사진 2는 1970년 6월1일 제 6회 제물포제 행사 중 시내 퍼레이드 장면이다. 볼거리, 즐길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이런 행사는 시민들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퍼레이드 행렬이 답동성당 앞길을 지날 때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가톨릭회관이 들어서기 전의 언덕 공터에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있다.
사진 2는 퍼레이드 행렬이 공설운동장 트랙을 행진하는 모습이다. 지역의 한 업체가 기중기차, 일명 코끼리차를 이용해 퍼레이드차로 변신했다. 그 코끼리의 코에는 ‘김일성’이 처량하게 매달려있다.
지금은 사라진 청라도를 인천 관료들이 낙도위문 방문했다(1974년).
청라도는 사라진 섬이다. 인천항에서 10㎞ 채 못되는 거리에 해안선 길이는 통틀어 5㎞ 밖에 되지 않는 손바닥만한 섬이었다. 이 섬은 70년대 연탄재 쓰레기 처리장으로 매립될 예정이었는데 결국 1986년 동아매립지 조성사업에 포함돼 깡그리 뭉개져 없어졌다. 이때 청라도와 생사를 함께 한 섬들이 장도, 일도, 무점도, 창금도 등이다.
사진 4는 1974년 4월 3일 인천시 관계자들이 주민들을 위문하기 위해 청라도를 방문한 모습이다. 당시 그 섬에는 50여 세대 260명 가량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교통편이라곤 해진호(18톤급)가 부정기적으로 운행되었고 전기는 80년 초에나 들어갈 정도로 낙도였다. 해발 47m의 작은 산에 둘러앉은 초가집들의 모습이 당시 섬 생활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진 5는 위문품을 전달받기 위해 섬 주민들이 당시 창영초등학교의 분교인 청라분교 운동장에 모인 모습이다. 아이들은 수업 중이었는지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어른들만 모였다. 앞에 놓인 위문품이래야 밀가루 몇 포대와 농기구, 그리고 축구공 등뿐이다.
이제 그 섬은 백골이 진토 되듯 깡그리 뭉개져 청라국제도시의 넋이 되었다. 청라도는 지도에서 사라졌지만 청라국제도시로 영원히 그 이름을 남겼다.
청라도 주민들이 모인 창영초교 청라분교 교정의 모습(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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