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지난호 보기

맑고 뽀얀 국물 속 흰밥 건강이 담뿍

2013-10-10 2013년 10월호


맑고 뽀얀 국물 속 흰밥

건강이 담뿍


글 김윤식 시인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사람 입맛이 참 간사하다. 여름 내 냉면이나 막국수 같은 찬 음식을 대 먹다시피 했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국밥집을 찾게 된다. 구미(口味)도 이렇게 염량(炎凉)이 분명한 것인지…. 아마 이제 곧 찬바람이 불면 더욱 따끈한 국밥에 소주 생각이 간절해질지 모른다.
국밥은 본래 장국밥을 이르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보면 대략적인 조리법이 나와 있다. ‘국밥에 관한 조리법은 조선 말엽의  ‘규곤요람(閨?要覽)’에 처음 보인다. 기름진 고기를 장에 조린 뒤 그것을 밥 위에 부어 만든다고 했다. 국밥에는 주로 맑은 장국을 이용한다. 맑은 장국은 기름기가 없도록 끓여서 간장으로 간을 맞춘 국이다. 주로 쇠고기의 양지머리를 이용하고 우둔살을 이용하기도 한다. 우둔살은 소의 볼기짝에 붙은 고기로 힘줄도 없고 기름도 섞이지 않아 삶으면 잘 풀어지고 고기 맛이 잘 우러난다.’

 

 

1970년대 이후 소머리국밥 정식 메뉴로 등극
여기서 보듯 국밥의 특징은 그것이 밥과 국이 따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가정의 밥상에는 밥과 국이 항상 따로 오르는데 먹는 사람이 따로따로 먹든지, 먹다가 국에 밥을 말아 먹든지 한다. 또 다른 어느 인터넷 사전은 “국밥을 처음부터 말아서 내오지 않는 이유는 밥의 전분이 국물에 퍼지면 국물의 깔끔함이 사라지며 밥 또한 퍼질 수 있고 위생적인 측면에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는데 맞지 않는 말이다. “밥의 전분이 국물에 퍼지면…” 운운하는 것은 도무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즉석에서 말아 주는 밥이 어째서 그리 쉽게 퍼질 수 있나?
아무튼 요즘에는 국밥을 거의 볼 수가 없다. 어쩌다 시골 장에 따라가 보아도 옛날 장국밥은 구경하기가 어렵다. 약식(略式)이기는 했어도 1960년대 대학에 다닐 때 구내식당에서 제법 그럴 듯한 장국밥을 먹었던 것이 끝 기억인 것 같다. 수백 명이 먹는 학교 식당이어서 깨지기 쉬운 뚝배기는 쓸 수 없어 요즘 냉면 그릇 같은 큰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냈지만, 정가 40원짜리(그때 돈 가치를 환산해 보기 바란다.) 국밥치고는 질이나 양에 있어 아주 훌륭했다. 밥 위에 넙적한 쇠고기 살을 몇 점 덮고 거기에 맑은 국물을 부은 뒤 양념장을 한 숟가락 끼얹어 주는 것이다.
그 후로는 설렁탕, 곰탕밖에는 더 이상 장국밥을 볼 수 없었다. 그나마 양이나 곱창, 곤자소니 따위를 많이 넣는 곰탕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내장탕이라는 메뉴가 개발되었는데, 육개장처럼 국물을 빨갛게 끓여 내는 것이 전의 곰탕과 다르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는지 아예 ‘소머리국밥 집’이라는 독립된 탕반집이 전국의 거리 거리에 즐비해진 상태다. 
기실 소머리국밥은 명칭부터가 다소 엽기적이다. 근자에 어느 연세 높은 어른이 ‘머리’라는 말은 사람에게나 쓰는 것이지 짐승에게는 당치 않다며 소머리국밥이 아니라 소대가리국밥이라야 맞는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는데, 그 이론이 옳다 해도 음식 이름으로는 몹시 상스러운 느낌이다. 
어쨌거나 소머리국밥은 그 옛날에는 메뉴에 없었던 음식이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이런 이름을 가진 음식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소는 하품밖에 버릴 것이 없다.”는 속담도 있지만, 한국인에게 소는 뿔과 가죽과 네 발굽을 빼놓고는 다 먹을 수 있는 대상이다. 그렇더라도 앞서 말한 대로 과거에는 ‘소의 머리’를 그대로 조리(調理) 이름으로 해서 음식을 해 먹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짐작컨대 소머리국밥이 음식점 정식 메뉴로 등장한 것은 아마 1970년대를 지나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크게 도약, 발전하기 시작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조리, 요리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한번 이의 상관관계를 파헤쳐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경제가 윤택해지고 육류 소비가 늘어 쇠고기가 부족해지자 전에는 조리용으로 크게 각광받지 못하던 우두(牛頭)까지 국밥의 재료로 등장한 것이 아닌지….


큰 가마솥에 밤새 고아 낸 뜨끈한 국물 맛 
각설하고, 이제 엊그제 맛을 본 소머리국밥과 내장선지국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워낙 탕반류를 호식하는 편인데 마침 사진을 찍는 홍 작가가 부평구 산곡동에 아주 참한 소머리국밥 집이 있다는 귀띔을 해 준 것이다. 얼마 전, 친지를 따라 우연히 들러 맛을 본즉 썩 훌륭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소리에 군침이 돌아 이내 홍 작가와 함께 날짜를 잡고 달려간 것이 바로 엊그제였다. 
옥호를 그저 ‘맛좋은집’이라고 붙인 이 국밥집은 서구 가좌동쪽에서 출발해 원적산 관통로(전에는 철마산 관통로라 했었다.)를 넘어 오른쪽의 명신여고를 지나치자마자 나타나는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해, 다시 한 2~3백 미터쯤 들어간 길가에 있다. 이 길이 원적산 공원길이다. 부평구 산곡동 179-80번지, 이렇게 주소를 말하면 더 편할지 모르겠다. 거기에 담벼락은 푸른색이고, 문 앞에는 세로로 ‘소머리국밥’이라는 큰 입간판을 붙여 놓았다.
문을 들어서면 바로 옆에 큰 가마솥이 걸려 있다. 여기서 밤새 고기를 고아 낸다. 이어 상을 죽 늘어놓은 대청처럼 생긴 마루방으로 올라서게 되어 있다. 이 마루방을 가로지르면 잇대어 장판방이다. 거기에도 같은 모양의 상들이 놓여 있다. 두 군데를 합치면 4, 50명 단체 손님도 거뜬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는 작은 가게였지만 고만고만한 이웃집들을 몇 채 사서 이어 붙인 것이다. 가게가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천정은 납작하고 실내는 세련되지 못한 대로 국밥을 파는 수더분한 주막 느낌을 준다.
“무얼로 하실까요?”
60대 중반, 인심 좋은 인상의 주인 진순자(秦順子)씨가 웃음 띤 얼굴로 먹을 음식을 묻기 전까지는 당연히 이 집 대표 메뉴인 소머리국밥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만 “내장선지국이요.” 하고 말았다. 먼저 와 앉은 옆 상의 객들이 후후 입으로 김을 불며 먹는 내장선지국이 하도 먹음직스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홍 작가가 소머리국밥을 주문했기 때문에 각자의 음식을 반반씩 나누면 두 가지 맛을 다 보게 된다.
내장선지국을 받고는 옆 상에 앉은 사람들처럼 젓가락 가득 콩나물과 선지덩이를 들어 올려 후후 입김을 불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뚝배기가 원체 뜨거워 조금이나마 식히려는 행동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음식을 제대로 먹는 식사법인 양 따라해 본 것이다.
푸짐한 선지덩이와 흠씬 익은 소의 내포 그리고 시원한 콩나물이 씹는 대로 만족스러웠다. 국물도 진해 풍염한 느낌이다. 그득한 선지는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잘 삭은 새우젓 양념장에 찍어 먹는다. 아주 독특한 맛을 낸다. 이 젓갈장이 이 집 선지를 특미로 만드는 매력점이라 할 수 있겠다. ‘야, 이거!’ 하는 느낌과 밖에서 가늘게 뿌리고 있는 초가을 비까지 자꾸 부추겨 하마터면 낮술의 유혹에 빠질 뻔도 했다. 언제 한가한 저녁 시간에 다시 올 수 있으리라.

 

소머리국밥 31년 노하우, 정성으로 음식 만들어
간판으로 내건 소머리국밥의 그 담백하면서도 넉넉한 맛 또한 상찬하지 않을 수 없다. 따끈한, 그리고 맑고 뽀얀 국물 속 흰밥과 소머리고기가 더없이 정갈하고 잡냄새가 전혀 없다. 진순자씨의 소머리국밥 집 경영 31년의 노하우와 정성이 배어 나온 결과다. 듬성듬성 여성끼리도 와 앉는데 깨끗한 맛 때문일 것이다. 과연 이제 소머리국밥이 설렁탕, 해장국과 함께 한국인의 음식으로 널리 보급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다른 식사 메뉴로는 우거지선지국과 묵밥이 있다. 수육과 모두부, 묵무침은 술손님을 위한 안주 종류다. 모두부는 손 두부 한 모를 뜻한다고 한다. 소머리고기가 탐탁지 않은 사람에게는 삼겹살이 추천할 만한 메뉴다. 두툼하고 넓적한 돼지 삼겹살을 상마다 장치한 무쇠솥뚜껑 같은 번철에 올려 굽는데 익어 풍기는 냄새에서 아주 좋은 향취가 난다. 치아 사이에서 탄력 있게 씹히는 맛도 일품이다. 평소 삼겹살에는 구미가 썩 동하지 않는 편인데도 그날은 서너 점이나 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맛좋은 집! 홍 작가의 추천이 전혀 헛되지 않았다.
진순자씨는 강원도 주문진이 고향이다. 남편의 원 고향은 황해도 개풍군, 전쟁 때 강화로 피난 나온 집안이었다. 친오빠와는 우리나라 굴지의 한 시멘트 회사 동료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빠의 중신으로 결혼에 이른 것이다. 남편과는 8살 차이가 있지만 나이 많은 남편 얻으면 잘해 준다는 말에 그냥 결혼했다며 얼굴을 붉힌다. 그러나 남편은 14년 투병 끝에 7년 전 세상을 떠났다.
국밥집을 시작한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생활도 생활이었지만, 무엇보다 남편 건강을 위해 국밥집을 시작한 것이다. 남편을 잘 먹게 하기 위해서. 처음 시작은 인근 금호아파트 앞에서였다. 그 후 공기 좋은 이곳으로 이사해 12년째다. 그 31년 동안 1남 2녀를 다 공부시키고 출가시켰다. 진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렇게 잘 되는 밥집들이 가진 공통점을 생각해 본다. 첫째는 좋은 재료로 내는 정갈하면서도 뛰어난 맛, 그 다음은 주인의 후덕하고 풍족한 성품일 것이다. 진씨가 홍 작가의 앵글 앞에 서기 전, 얼른 내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화장도 조금 고치고 나온다. 영락없이 ‘이쁘게’를 걱정하는 소녀 모습이다.                             문의 : 507-4458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8-28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계정선택
인천시 로그인
0/250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