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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걸작품 무참히 부수다
무지,
걸작품 무참히 부수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인천시청 앨범 발췌
건축 대가 김중업이 설계한 인천 해무청. 지금은 사라졌다.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은 평양 출신으로 일본과 프랑스에서 유학한 후 돌아와 서울대 등에서 후진을 양성한 건축가다. 이후 유럽으로 진출해 프랑스 문화부의 고문건축가를 지냈고 미국 로드아일랜드와 하버드대학 교수로 재직할 만큼 건축계의 대가(大家)였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 명보극장(1956), 드라마센터(1959) 3·1빌딩(1969) 올림픽공원 상징조형물(1988)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이 인천에도 있었다.
오림포스호텔(현 파라다이스호텔) 밑에 있던 인천지방 해무청(海務廳·사진1)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해양항만청인 이 건물은 1957년에 세워졌다. 해무청은 1903년 경에 설립된 러시아영사관 건물과 나란히 바다를 보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현대적인 건물이 부둣가의 번잡한 풍경과 함께 어우러진 모습은 그림 그 자체였다.
러시아영사관은 1974년에 철거되었고 해무청사는 1992년 경에 사라졌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도저의 삽날이 지나간 그 자리에는 특색 없는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무지한 반달리즘의 참혹한 결과다. 이제라도 ‘건축학 개론’을 수능과목에 넣어야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하와이 원로교포방문단을 환영하는 인천시민들(1955년)
인천시청을 방문한 하와이 할머니교포들(1955년)
1902년 12월 우리나라 첫 이민선이 하와이로 향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55년 10월 18일 하와이 원로교포 방문단 42명이 여의도공항을 통해 고국을 방문했다. 각부 장관들이 영접할 정도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복장은 양복도 아닌 한복도 아닌 반양반한(半洋半韓)이었고 한국어에 영어 사투리 억양을 섞어 사용했다. 그들은 첫날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 대통령 자신도 한동안 하와이에 거주했기 때문에 구면인 사람도 있었다. 16일 동안 그들은 삼부 요인 예방 등 전국 곳곳을 방문했다. 국회를 방문해 한 노인이 방문단을 대표해 인사를 했다.
“서양에서는 우리를 보고 흑인이라고 합니다. 햇볕 아래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그을려서 모두 이렇게 검씁니다. 여기 와보니 모두가 얼굴이 희어서 외국에 가서 백인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조국을 떠나 낯선 땅 하와이 설탕수수 농장에서 흑인의 얼굴이 될 정도 죽도록 고생한 것이었다.
방문 6일째 되는 날 그들은 50년 전 이민선 탔던 바로 그곳, 인천을 방문했다. 공설운동장에서 수만의 인천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대대적인 시민환영회가 열렸다(사진2). 이어 시청과 인천항만 그리고 자신들의 모금으로 세운 인하공대를 감격스럽게 시찰했다. 그날 그들은 환영 만찬이 열린 공화춘(현 짜장면박물관)에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사진 3는 인천시청(현 중구청)을 방문한 모습이다.
이 전구가 로데오 불빛의 시작이다(1971년).
로데오의 불야성, 이 전구에서 시작되었다. 인천에서 가장 휘황찬란한 구월동 로데오거리. 365일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다. 이 구월동 지역에 전기가 들어 온 것은 불과 40여 년 전. 사진 4는 첫 전기불이 들어온 날, 1971년 1월 19일의 모습이다. 인천시 관료인 듯한 젊은 사람이 전등을 켜는 순간 마을 노인은 고마움에 몸둘 바를 몰라 연신 허리를 굽혀 감사 표시를 한다.
비록 전기는 들어왔지만 꺼떡하면 정전이 되었을 것이다. 기존에 사용하던 등잔 심지에 불붙이는 날도 적지 않았다. 비록 전기가 들어 왔지만 전기료를 아끼느라 어스름 빛만 있어도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촌부는 심지어 자식이 불을 켜고 늦게까지 공부하는 조차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형광등 살 돈도 아까워 두 방의 천정을 뚫어 절반씩 형광등 불빛을 나눠 쓰던 ‘신화’ 같은 이야기를 요즘 젊은이들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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