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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과 맞바꾼 겨울 땔감

2013-10-30 2013년 11월호

목숨과 맞바꾼

겨울 땔감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인천시청 앨범 발췌

 

공중에서 촬영한 60년대 대성목재. 저목장에 원목들이 떠있다.

1936년 만석동에 설립된 조선목재공업은 일제강점기 항공자재(라왕 합판)를 제조했던 군수공장이었다. 해방 후 대성목재(大成木材)로 이름을 바꿔 건축 목재 등을 생산했다. 6,70년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인천에 올라온 사람들 사이에서 ‘대성목재 밖에 갈 곳이 없다’라는 이야기가 나돌 만큼 규모가 큰 회사였다. 만석동, 화수동, 송현동 일대 많은 사람들이 이 회사에 다녔다.
이 회사는 앞바다에 저목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 지름 1.5~2m, 길이 15~20m 가량의 거대한 수입 원목들을 수천 개 씩 띄워 놓았다(사진1). 이 저목장의 원목은 벌이가 없던 주민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주민들은 끝을 납작하게 만든 ‘빠루’를 이용해 원목의 껍질을 떼어내 햇빛에 말린 뒤 일반 가정집에 팔거나 자기 집 땔감으로 사용했다. 좁은 마당에는 물론 골목마다 원목 껍질을 쌓아 놓아 비좁은 골목이 더 비좁았다, 간혹 도난 사고도 발생해 이웃간에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이 나무껍질을 태우면 군불이 오래 가기 때문에 연료로는 최고였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어떤 이는 멀리 배를 타고 나가 원목을 실은 배에 올라가 나무껍질을 떼어내기도 했다. 회사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공정상 원목 껍질은 베껴내야 하기 때문에 굳이 이를 못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대성목재의 저목장은 이처럼 주민들이 입에 풀칠하는데 큰 보탬을 주는 장소였지만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공간이기도 했다. 여름철 아이들은 저목장에서 수영을 하거나 띄워 놓은 통나무 위에서 뛰어 놀았다. 순간, 미끄러져 통나무 사이로 빠지면  굉장히 위험하다. 원목 위에서 빠지면 수압 때문에 물 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고 나오려고 발버둥쳐도 통나무에 머리가 막혀 쉽게 나오질 못해 목숨을 잃는다. 해마다 인근 동네에서는 1, 2명의 아이들이 이런 사고를 당해 생명을 잃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선생님들은 반 학생들에게 저목장에서 놀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곤 했다.  

 

 6·25전쟁 발발 2주년 멸공통일 인천시민 궐기대회 대회장 입구(1952년)

 

  궐기대회를 참가하기 위해 군악대를 앞세운 행렬(1952년)

 

지금은 ‘멸공(滅共)’이란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제 박멸은 바퀴벌레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1952년 6월 25일 한반도에 포성이 울린 지 2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쟁은 일진일퇴의 교착 상태에 빠지고 간간이 휴전 협정의 소리도 들린다. 국민들은 전쟁의 도가니로 밀어 넣은 북괴와 소련에 대해 적개심이 높았다. 게다가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 많았던 인천은 그 감정이 더 했다. 그래서 휴전이 아니라 공산군을 박멸해 한반도가 통일되길 간절히 소망했다.
그들은 공설운동장에 모여 멸공통일 인천시민 궐기 규탄대회를 열었다. 대회장 정문에는 ‘6·25를 잊지 말자’,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자’, ‘강철같이 단결하자’ 등 결의를 다지는 구호들이 내걸렸다(사진3). 시가행진을 독려하기 위해 군악대도 동원되었다. 시청을 떠나 운동장으로 향하는 행렬 앞에 군악대가 맨 앞에 섰다(사진4). 지금은 인천아트플랫폼으로 바뀐 창고들 앞에서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동네 아이들이 행렬을 뒤쫓고 있다.  

 

19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백옥자 선수가 인천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1970년)

 

투포환 선수 백옥자는 1951년 3월 5일 부평구 십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늙고 병들어 눕고, 어머니는 시장에 나가 콩나물 장사로 끼니를 이어 가야하는 가난한 환경이었다. 그는 주안초교와 박문여중·고교를 나온 인천의 딸이다. 처음엔 농구와 배구를 했고 68년부터 포환을 던지기 시작해 그해 한국신기록(13m75)을 세웠다. 국내에서는 던질 적마다 기록을 경신해서 맞설 적수가 없었다. 1970년 제6회 방콕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1974년 제7회 테헤란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등 아시아에는 백옥자를 넘볼 선수가 없었다. 이때 언론은 그에게 ‘아시아의 마녀’라는 별명이 붙여줬다.
사진 2는 19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금의환향해 인천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이다. 이제는 올림픽 금 정도는 돼야 박수를 보낸다. 3,40년 전만해도 카퍼레이드가 종종 있었다. 그 행렬을 따라 가며 괜히 가슴 뿌듯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러고 보니 카퍼레이드 본 지 참 오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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