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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혹시 연탄
2013-12-30 2013년 12월호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혹시 연탄…”
글 유동현 본지편집장 사진 인천시청 앨범 발췌

송현동 황해연탄공장의 60년대 중반 모습. 자동화, 대형화되기 전의 영세 연탄공장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공장 앞 수도국산 오르는 길은 50년이 지났지만 솔빛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것 외에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월동(越冬) 준비’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때가 있었다. 날품을 팔아야 봉지쌀이라도 사먹을 수 있던 시절,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어머니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김장과 연탄이었다. 장독대 큰 독마다 김치가 꽉꽉 차있고 광에 시커먼 연탄이 몇백 장씩 쌓여 있어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던 그 시대의 어머니들. 세월이 흘렀지만 김장은 여전히 웬만한 가정의 일상사인 반면에, 연탄은 이제 월동준비 품목에서 거의 사라졌다.
연탄은 구멍의 개수에 따라 9공탄, 19공탄, 22공탄 등으로 불리었다. 1960년대 산림녹화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에 따른 농촌의 연탄보일러 보급 등으로 연탄은 가정용 연료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언덕을 오르는 연탄배달부의 시커먼 얼굴과 새끼줄에 달린 두 장의 연탄을 들고 가는 가장의 뒷모습 그리고 부숴진 연탄 조각들을 모아 물로 반죽해 틀에 넣고 나무망치로 쳐서 다시 연탄으로 만들어 벌이를 하던 아저씨의 모습은 그 시절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풍경이었다.
당시 인천 곳곳에는 다양한 규모의 연탄공장이 있었다. 송현동 황해연탄, 창영동 영화연탄, 숭의동 장흥연탄, 신생동 태성연탄, 주안동 대성연탄과 제일연탄, 신흥동 강원연탄, 부평동 한일연탄, 북성동 인천연탄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공장들은 인천지역의 하루 소비 물량 20만개 중 절반가량만 충당할 수 있었다. 60년대 중반 서울시가 타 지역으로 연탄 반출을 금지한 적이 있었다. 연탄기근으로 사재기가 극성을 떨쳤고 ‘암거래’까지 생겼다. 연탄을 사과궤짝에 담아 시외버스를 이용해 인천으로 내려오기도 했고 이삿짐으로 위장해 용달차에 실어 나르다 적발되기도 했다. 간첩을 잡기 위해 설치한 시계(市界) 검문소에서 ‘연탄검문’을 실시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연출되었다.
연탄 파동의 절정은 오일쇼크 때였다. 1974년 석유값이 치솟자 대체연료인 연탄의 수요가 급증했다. 정부에서는 ‘연탄구매카드제’를 실시했다. 각 가정은 이 카드를 동장으로부터 교부받았다. 가정용은 백색, 영업용은 황색이었다. 동네 연탄판매소에서는 이 카드를 가지고 온 가정에 50장 이하로 판매했다. 판매소는 매일 동장에게 판매 상황을 보고해야만 했다.
그즈음 ‘인조연탄’이 발명되었다. 76년 4월 정진석(당시 53세)씨는 10년 전 연탄가스로 아우가 사망하자 새로운 연탄개발에 몰두했다. 석탄 대신 왕겨를 주원료로 해서 점토와 밴나이트석회를 섞어 만든 유사연탄을 개발했다. 재래식 연탄보다 열량은 높은 반면 가벼웠고 값이 쌌으며 다 탄 것은 화초 거름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홍보했다. 무엇보다 연탄가스 중독의 주범인 일산화탄소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연탄은 전국발명고안콘테스트 최우수상, 한국특허협회 우수발명품으로 선정되었다. 하루 3천개 규모를 양산하기 위해 학익동에 공장을 세운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이후 이 연탄과 관련된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 걸 보면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지 못하고 그저 시제품으로 끝난 것으로 추측된다.
78년 3월 이후 연탄공장의 대단위화 사업 추진으로 주택가에 있던 영세 공장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았고 결국 자동화 시설을 갖춘 몇 개의 대형 공장만이 교외 지역에서 계속 연탄을 생산했다.
위 사진은 동구 송현동 피난민 수용소촌 옆에 있던 황해연탄의 1960년대 말 모습이다. 황해도 피난민 출신 유진성(劉鎭成) 사장은 연탄공장의 이름을 자신의 고향에서 따서 지었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용소촌에 거주하는 황해도 피난민들이었다. 일일이 삽을 이용해 석탄을 반죽해서 만든 연탄은 리어카와 소달구지를 이용해 보급소로 운송되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날, 동네 아낙들이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연탄공장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 틈에서 한 어린 소녀가 5장의 연탄을 올려놓은 빨래판을 머리에 이고 힘겹게 걸어 나오고 있다. 당시 월동준비는 애고 어른이고 구분 없이 모든 가족에게 처절하고 간절했던 겨우살이였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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