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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주제 "봉사"

2006-12-01 2006년 12월호

여름방학과 봉사활동
지난 여름방학 때 친구 신원이와 동막해수욕장으로 난생처음 봉사활동을 갔다. 무더운 태양이 내리쬐는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홀트 일산 복지타운 요양원에서 나온 20여명의 장애인들이 하나 둘 모습을 보였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체가 부자유한 장애인을 대하기는 사실 꺼림칙했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니 그러한 불안은 싹 가셨다. 우리는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 주고, 갯벌로 나가 함께 어울려 놀아주기도 했다. 장애가 있는 30대 정도의 아줌마 아저씨들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재미있어 하기에 정말 내가 여기 오기를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무렵 나와 신원이는 장애인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지난 여름방학 때 홀트 일산 복지타운 요양원 사람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생각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내 몸 하나 간수하지 못했던 내가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이 무척 대견스럽다. 이렇게 소중한 경험과 커다한 보람을 갖고 살기에 앞으로 시간이 나는대로 장애인들의 몸과 마음에 지팡이가 돼 줄 수 있는 중학생이 되겠다고 생각해본다.
신기철 (부평구 산곡3동)



요양원 할머니들께 재롱으로 봉사를 ~
지난 겨울방학 때 어머니, 동생과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이 계시는 요양원에 봉사활동하러 갔었습니다. 청소도 하고 식사하시는 것도 도와드렸는데, 무엇보다 그동안 연습해 두었던 노래와 춤으로 재롱을 보여드렸더니 어찌나 즐거워하시던지 매우 뿌듯한 하루였답니다.
박수연 (서구 심곡동)



봉사, 그 즐거움에 대하여
촉촉히 비가 내리더니 나뭇잎의 색깔이 울긋불긋 겨울의 문턱을 지나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때. 목요일 9시 30분 오늘도 어김없이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희준, 한수씨, 미진언니. 그들과의 인연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역 신문에 난 어르신 무료급식 자원봉사 모집 공고를 보고 각자 모여 4명이 한조가 되었다. 자기 일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강요한 것도 아니건만 시간을 지키려고 애쓰고 일이 있거나 늦으면 연락을 해 착오없이 배식을 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70명분의 준비를 위해 메뉴를 확인하고 모자라는 재료가 있으면 보충하고 다듬고 씻고 끓이고 볶고…. 어르신들 식성에 맞게 내 가족 먹인다는 생각으로 청결과 정성으로 최고로 맛있는 반찬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배식하는 사이 안 보이는 어르신들이 계시면 편찮으신 건 아닌지, 무슨 일이 있는지 안부를 여쭙고 챙기다 보면 우리들의 점심시간이 된다. 맛있게 먹고 설거지 하고 뒷정리 하다보면 땀이 흐르고 정신없이 보낸 시간이지만 얼굴에는 감사와 행복한 웃음이 가득하다. 이 만남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며 기쁨을 주는지 경험해 보지 못한 분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누굴 위해서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서도 아니라 바쁜 삶 속에서 누군가를 위해 나의 남은 부분을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기쁨과 보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유기연 (연수구 옥련동)



타인을 돕는 일이 바로 나를 돕는 일
40여년을 살던 부산을 떠나 인천으로 이사가 확정되었을 때 친구가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니 인천가면 우찌 살래? 붙임성이 좋아 이웃을 잘 사귀기를 하나, 그렇다고 나돌아다니는 성격이길 하나.”
그러면서 걱정스런 얼굴로 인천으로 이사 가거든 지역 자원봉사센터에 등록해서 활동을 한번 해보라고 제안했죠. 그렇게 해서 시작하게 된 나의 자원봉사활동.
수백 명의 어른들께 식사를 대접하는 급식봉사는 반찬거리 씻어 준비하고 배식하고 설거지하는 집안일의 연장이라고 생각했고, 지체장애인들과 노인들을 씻기는 목욕봉사는 일곱 명의 아이들을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한나절을 때 밀어 주시던 친정어머니 생각을 하니 힘든 줄 몰랐습니다. 또한 외출봉사는 인천의 볼거리에 목이 말랐던 제겐 더 없는 행운이었습니다. 같이 다니면서 제가 더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으니까요.
항상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시작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에 흐믓해졌습니다. 건강한 몸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게 되고, 끼니 걱정 안하게 해준 남편한테 감사하게 되고, 공부는 못해도 속 안 썩이며 건강하게 자라주는 아이들도 사랑스러웠습니다. 매월 첫 주 목요일 봉사단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날짜별로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조그만 글씨로 적어 놓습니다. 목욕봉사, 외출봉사, 급식봉사…. 하루는 퇴근한 남편이 달력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더군요. “달력에 웬 동그라미가 이리 많노? 어머님 생신은 아이고, 애들 생일이가? 아니면 백화점 세일기간이가?”
호호호. 달력의 동그라미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제 마음은 더 뿌듯해진답니다. 봉사활동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임순정 (서구 검암동)



남의 일은 남의 일로만 보라고?
아마 작년 여름인 듯싶다. 그러니까 우리아들이 5살이었던 해. 아들이랑 볼일이 있어 급하게 가고 있는데 한 네 살쯤 돼 보이는 꼬맹이가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우리 뒤를 쭐레쭐레 따라오고 있지않은가! 꼬맹이한테 엄마 어디갔느냐고 물어보니 뒤쪽으로 손가락질을 한다.
발길이 급해 “그럼 엄마한테 가렴”하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아무래도 그 꼬맹이가 신경 쓰인다. 뒤돌아보았더니 아뿔싸~!! 차가 많이 다니는 큰길을 건너려고 하는 준비 자세. 너무 놀라 한걸음에 뛰어갔다. 한손은 꼬맹이의 손을 잡고 또 다른 한손엔 아들의 손을 잡고 꼬맹이가 손가락질하는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엔 꼬맹이의 엄마는커녕 그 누구도 없었다. 난감하고 걱정도 되고 아이는 울고….
일단 ‘아이를 안심시켜야겠구나’라는 생각에 약속은 뒤로 한 채 놀아주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어느 아주머니 한분이 급하게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꼬맹이의 보호자였다. 속으로 다행이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아주머니께 상황설명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말 한마디 없이 내 손을 잡고 있던 꼬맹이 손을 낚아채듯이 하며 나란 존재는 보이지도 않는 듯이 아니 오히려 경계하는 눈빛을 하며 쌀쌀한 바람을 일으키며 가버리는 것이다. 진짜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약속까지 제쳐두고 자기 아이를 짧은 시간이지만 보호해주었는데….
굳이 고맙다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일을 다른 엄마에게 얘기해 주었더니 남의 일은 남의 일로만 보라고 한다. 참…. 도시사람들은 그런가보다. 남의 일은 남의 일뿐이라고.
신용자 (남구 주안4동)



눈이 많이 내린 어느날
2월 말 쯤일거다. 겨우내 눈이 내리지 않아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눈이 내리길 아이들과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 기다리고 기다리던 눈이 밤새 소복이 쌓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경비 아저씨는 마이크에 대고 같이 나와서 눈 좀 치우자고 방송을 하셨다. 그때 잠깐 내가 아니더라도 치울 사람이 많은데 뭘 하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 나간다고 잠바에 모자에 장갑까지 끼고 신이 났다. 그러는 사이 나는 눈 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카메라를 챙기고 잠바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동네 아이들이 콩나물시루의 콩나물처럼 다들 나와 눈을 굴리고 눈싸움도 하고 얼음 미끄럼틀도 어느새 만들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나도 어렸을 때 그랬었는데 하는 추억을 되새기며 아이들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런데 한곳에선 통장, 반장님들이 경비 아저씨와 눈을 쓸고 계셨다. 주차장 아니더라도 사람들 다니는 데는 쓸어야 한다며…. 얼마나 미안하고 쑥스럽던지. 다들 봉사하는 마음보다 내가 편하기 위해 아파트 주민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추운데도 나와서 눈을 치우셨을 것이다. 조금만 공동생활을 하는 우리 마을, 우리 아파트, 내 가족들이다 생각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올 겨울 눈이 많이 내리면 방송이 나오기 전에 나가서 꼭 눈을 치워야지.
이연재 (연수구 선학동)



반찬대신 밥이라니
봉사중 한바탕 웃었던 에피소드를 적어봅니다. 너무 덥고 힘든 하루를 보냈던 여름. 그 날은 독거노인을 위한 반찬 나눔의 하루였다. 어르신들이 문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기다리시는 모습에 ‘반찬만들기’는 멈출 수 없는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찬을 맛깔스럽게 만들어 담은 후 뒷정리를 했다. 점심을 먹으려고 지은 밥이 많이 남아 한 언니가 집에 가져 가려고 밥을 봉투에 챙겨 놓았다. 그게 화근이었던 것.
검정봉투에 있는 반찬을 배달하려고 20여 개를 들고 내려왔다. 언니는 봉사자님과 차로 이곳저곳을 다녔는데 1봉지가 남는다고 나에게 전화가 왔다. 차근차근 따져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보니 한가득 담긴 밥 봉지를 드렸던 것이었다. 몇 년 동안 반찬 서너가지를 받으시다 갑자기 밥 한가득 받으신 분이 도대체 누구신지 아직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 밥 봉지를 받으신 어르신은 얼마나 황당했을런지. 웃기긴 했지만 정말 실수 없이 잘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오늘하루도 열심히 반찬 만들기에 정성을 드리게 된다.
송영해 (부평구 일신동)



수능시험날 알뜰 바자회
매년 수능 시험일이 내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자유총연맹 여성회를 이끌며 13년을 봉사하고 지금은 뒤로 물러앉은 지 6년째이다. 매년 불우 이웃돕기, 일일찻집이며, 알뜰 바자회를 열어 독거노인, 저소득층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렸다.
1998년 11월 18일. 알뜰 바자회를 복개천에서 열었다. 무의식중에 잡은 날이 바로 수능시험날이었다. 날씨가 몹시 춥고 바람이 많이 불어 난로 기름 값에 바람막이 비닐 등 경비가 많이 들었다. 회원들과 열심히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맞이 준비를 했는데 지나가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지나가는 손님을 맞이해야만 불우 이웃돕기를 많이 할 텐데 초대장 받은 손님 외엔 없었다. 저녁이 되자 속으론 애가 탔다. 불우이웃돕기 보다는 준비한 비용 팔십만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다음날 모금함을 열어보니 백이십만이천오백이 들어 있었다. 다행한 일이다. 팔십만원 빼고 사십만이천오백원이 남아 그 돈을 갖고 쌀 20KG짜리 열 포를 사려고 보니 돈이 모자랐다. 마침 회원분의 통장님 덕택으로 사십만원에 쌀을 열 포 사서 불우 이웃돕기를 하고 기금에 이천오백원을 입금시킨 것이 생각난다.
쌀을 한포씩 안고 가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활짝 핀 미소가 아름답게만 보였다.
노정임 (서구 가좌1동)



봉사는 내 인생의 꽃
결혼 후 남편이 춘천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춘천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한 후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고 천천히 교회의 일원으로 익숙해 질 때 한가지 제안을 받게 되었다. 여전도회에서 매주 목요일에 독거노인들을 위해서 목욕봉사를 하고 있으니 함께 동참해 달라는 것이다. 다른 봉사라면 몸으로 떼우면 되니 발 벗고 나서겠지만 벌거벗은 몸으로 봉사를 한다(?)는 생소한 환경이라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아직 아기가 어려서라는 핑계를 대고서 빠져 나오고 싶었지만 결국 나는 승낙을 하였다.
목욕 봉사 첫날 그 많은 할머니들은 어디서 모여오신 것일까? 목욕탕을 무료로 제공하는 곳에 가보니 30여명의 할머니들이 오셔서 목욕을 하고 계셨다. 한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밀어드려야 하는데 아직 젊은 할머니는 등만 밀어드려도 되지만 연세가 있거나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전신을 밀어야 해서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목욕탕이라는 갑갑한 공기 속에서 열심히 밀어 드리자니 힘도 들고 땀도 나고 사우나가 달리 없었다. 고맙다며 때를 미는 내내 감사인사를 하는 할머니들에게는 내심 미안하기도 하다. 처음 분이야 즐거운 마음으로 밀지만 한 분, 두 분 지나면서 힘에 부쳐서 웃음도 나오지를 않았다. 힐끔힐끔 함께 봉사하시는 집사님들을 쳐다보며 여전히 열심히 하는 모습에 부끄러울 뿐이었다.
육신은 힘이 들고 피곤했지만 집에 돌아와 잠시 누웠을 때 마음으로부터 밀려오는 평안과 보람은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기분 좋은 행복이었다. 봉사는 봉사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해야 한다. 그 후 나는 매주 목요일을 누구보다 기다리게 되었다. 딸 같이 대해 주시는 그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닌가.
봉사는 인생의 꽃이다. 봉사를 통해 나의 인생에 향기를 더해준다. 또한 인생의 참 맛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젊었을 때, 일할 수 있을 때 봉사하며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야겠다.
박정은 (서구 금곡동)



나보다 나이 많은 16명의 아이들?!
2주전의 일이었다. 딸아이가 청소년 단체 걸스카우트에서 봉사활동을 간다면서 엄마, 아빠도 함께 가길 원했다. 그날따라 비도 부슬부슬 내려 귀찮은 생각이 들었지만 딸아이의 생각이 기특해 함께 길을 나섰다. 몇몇 엄마들과 상의해 내복, 음료, 과일 등을 준비하고 우리가 찾아간 곳은 학교근처에 있는 인정재활원이었다. 그곳 선생님에게 방을 배정받아 큰 아이와 걸스카우트 친구 4명, 그리고 작은 아이와 함께 방문을 연 순간!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16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면서 “엄마, 왔어?”하는게 아닌가. 순간 아이들도 나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방에 들어갔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얼마나 정에 굶주렸는지 안아달라고 하는 이, 아픈 부분을 보여주며 호 해달라는 이, 사탕을 달라고 하는 이 등 요구사항이 많았다. 우선 한번씩 안아주고 나서 아이들은 게임도 하고 노래를 불러주며 시간을 보내고 선생님과 나는 화장실 청소며, 설거지 등을 했다. 그 후에 가진 다과시간에 서로 많이 먹겠다고 하는 이들을 보면서 꼭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이 흐른 후 강당에 모여 레크리에이션 시간도 가졌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신나는 작은 음악회였다.
이제 돌아갈 시간! 어느덧 정이 들어 유난히 떨어지기 싫어하는 예솔이... 지금도 예솔이는 눈에 밟힌다. 내 손을 꼭 잡고 “엄마, 언제 또와 ~”하며 눈시울을 적시며 주머니에 고이 간직했던 사탕하나를 건네주던 예솔이가 보고 싶다.
다음을 기약하며 그렇게 몇 시간의 봉사활동은 막을 내렸다. 따뜻한 사랑은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이렇게 소중한 경험을 함께한 우리 두 아이와 걸스카우트 대원들 모두 행복한 하루였다. 가석초등학교 걸스카우트 대원 모두들 파이팅 !!!!!!!!
황금숙 (서구 가정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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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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