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지난호 보기

인천부민 웃고 울리던 애관

2003-10-01 2003년 10월호

문화예술 향연이 풍요롭게 피어나는 계절이다. 추석을 전후로 여러 극장들에는 국내외의 온갖 영화들이 관객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대학로의 연극 무대를 비롯하여 전국의 대·소극장에도 다양한 장르의 예술무대가 펼쳐진다. 한편으로 불황이다 실업이다 하여 경제적으로 고통스럽고, 태풍 ‘매미’가 휩쓸고 간 심신의 상처는 오래도록 치유되기 어렵다.
저 간난했던 식민지시대의 백성들도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고자, 때론 위안 받고자 그리고 이겨낼 힘을 얻고자 예술을 찾지 않았을까. 여기 인천에도 그렇게 인천부민들의 심금을 웃고 울리던 한 극장이 있었다.

 


인천 애관 낙성식
인천 조선인측 극장으로는 용리(龍里)이 있었던 바 건축한 지 오랠 뿐 아니라 그 경영자 정치국(鄭致國)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 특히 수리도 아니 하야 그나마 창파벽퇴(窓破壁頹)하야 간혹 연극단(演劇團)이 인천에 들어올지라도 일본인 경영인 극장을 빌어 쓰는 상황이었는데 인천 유지(有志) 김윤복(金允福)씨는 조선인측으로 상당(相當)한 극장 하나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기어 수만의 금전을 비(費)하야 그간 신축에 착수하였든 바 금번 그 신축이 낙성(落成)하였음으로 지난 10일에 신축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는데 금후 조선인측 공공적 모임에는 언제던지 공개한다더라. 『동아일보』 1927. 10. 13

 


근대문물의 관문이었던 인천에는 일찍부터 근대적인 극장이 설립되어 연극활동이 이뤄졌고 또 많은 전문극단이 인천을 찾아 수준 높은 공연을 상연한 근대연극의 산실이었다. 위의 기사에 보이는 애관이라는 극장이 처음 세워진 것은 1895년이라고 한다. 갑부였던 정치국에 의해 세워졌던 ‘협률사(協律舍)’라고 하는 실내무대가 그 전신이다. 보다 자세한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학계에서 최초의 근대식 극장이라고 통용되는 서울의 협률사(協律社, 후의 원각사)보다 7년 빨리 개설된 셈이다.
1910년대 들어서 ‘축항사(築港舍)’로 이름을 바꾸면서 연극 무대를 제공하였던 애관 이외에도 인천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인천좌(仁川座)’(1897)와 ‘가부키좌(歌舞伎座)’(1905) 등이 있었고, 1909년에는 신생동에 ‘표관(飄館)’도 개설되었다. 이 중 ‘가부키좌’는 ‘축항사’와 함께 1910-20년대에 <혁신단> <취성좌> <신극좌> <민중극단> <토월회> <신무대> 등의 수많은 연극단체들의 신파극, 신극, 소인극 등과 같은 근대 연극의 무대를 제공하여 인천부민의 사랑을 받았다.
‘축항사’가 1915년 무렵 ‘애관’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내려오다가 1920년대에 들어서서 연극과 함께 간간이 활동사진을 틀기 시작하였다.

 


인천 독자우대 활동사진
- 23일 애관에서, 용동(龍洞) 예기(藝妓)도 출연
때마침 국추가절(菊秋佳節)이오 본년 중 마지막으로 맑은 밤 가을빛을 자랑하는 달 맑은 밤을 이용하야 본사 인천지국은 두어 밤 인천 독자들 위안하기 위하야 23일과 24일 양일 밤을 두고 외리(外里) 애관에서 독자우대 활동사진대회(活動寫眞大會)를 개최하기로 되었다. 당일 밤 영사할 사진은 조선예술계의 걸작품인 청춘의 애화(哀話)를 자아내는 <락화류수(落花流水)>라는 전11권과 서양사진으로 대환영을 받어오든 정희극(正喜劇) <미로(迷路)의 을녀(乙女)>라는 전8권을 상연하기로 되었으며, <락화유수>를 영사할 때에는 용동권번(券番)의 아리따운 두 예기의 창가가 있을 터인바 실로 조선사람으로서 제작한 <락화유수>는 도처마다 대환영을 받는 영화이며 따라서 요금도 사오십전씩이나 받든 것이나 그러나 이번 대회에는 독자 제위의 편의를 돕기 위하야 특별히 무료공개하기로 되었는데 다만 장내를 정돈하기 위하야 계하(階下) 십전 계상(階上) 이십전의 입장료를 받기로 되었더라. 『조선일보』 1928. 10. 23

 


1928년 가을을 맞아 조선일보사는 신문독자를 위한 활동사진대회를 개최한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영화 <낙화유수>(금강키네마사 제작)는 이구영 감독이 각본, 편집, 감독을 맡아 1927년 10월 6일에 처음 상연된 신파물이다. 복혜숙이라는 일급의 여배우가 아리따운 기생으로 등장하여 화가와의 슬픈 로맨스를 연기해 관객의 눈물을 자아낸 영화로, 용동권번의 두 예기가 창가형식으로 부른 영화의 주제가는 당대에 크게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후 애관은 1930년대 들어 활동사진관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고, 국내외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고단했던 시절, 극장 애관이 있었기에 인천에서 진우촌(秦雨村, 극작가), 정암(鄭岩, 배우), 원우전(元雨田, 무대장치가)등과 극작가 함세덕(咸世德)과 명배우 서일성(徐一星)을 배출할 수 있었고, 애관에서 활동사진을 보고 자란 김동석(金東錫)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자라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시절의 그 오래고 허름한 극장들인 현대, 동방, 도원, 인천, 문화극장 들도 하나씩 허물어지고, 그 대신 초대형 동시상영관-멀티플렉스가 첨단의 산업기제가 되어 점점 그 공백을 채우고 있다.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8-28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계정선택
인천시 로그인
0/250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