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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의 꿈 집어삼킨 인천미두장-미두하자! 돈벼락 맞는다

2003-11-01 2003년 11월호

신문으로 보는 그 시절 인천⑧ | 대박의 꿈 집어삼킨 인천미두장

 


IMF 사태 이후 신용카드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신용불량자로 분류되면서 국가경제에 주름살을 남겼다. 최근에는 로또복권 열풍과 강남 아파트의 이상 폭등 등 이 나라 경제의 거품은 도대체 꺼질 줄 모른다. 하기사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니, 돈 놓고 돈 먹기, 그 또한 자본주의 경제의 원리인 것을… 일찍이 인천 땅에는 미두장이라는 것이 있어 대박의 꿈을 쫓아 인천으로, 미두장으로 향했던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패가망신시켰던 슬픈 역사가 있었다.

 

 

 

미두시장에서 꾸는 일확천금의 꿈과 인천조선인 경제
- 인천 미두시장과 조선인 1
일년에 4천만원이란 거액의 생산품을 산출하며 100만 7천 76석의 현미와 정미를 인천에서 대판, 동경, 신호 등지를 필두로 기타 각처에 수출하는 터임으로 명실공히 인천은 전조선 곡물계에 패권을 잡은 곳이요, 곡물시세의 변동도 이곳의 여하에 달렸다 할 만하다. 이만한 경제의 힘을 가진 곳이므로 5만 3천 7백여 부민에게 미치는 경제의 힘은 매년 비교되는 숫자의 통계로는 향상되어 가는 터이나 (......) 그들의 생계는 그날그날을 시내에 산재한 33개소의 정미소와 28개소의 용정(찧는) 공장에서 노동하여 수입되는 임금으로 그때그때의 생계를 연장하는 사람이 3,033명이며 해안의 세관 구내와 기타 공장에서 노력을 파는 인원이 4천을 불하(不下)한다는 바 그들은 최고가 80전으로 최하가 35전이란 임금으로 열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는 터이다. (......) 워낙 돈의 핍박과 곤란을 여지없이 받아서 누구나 일확천금을 꿈꾸고 미두를 착수하는 사람은 거의 자신이 있는 듯하나 70파센트는 실패로 돌아가는데...... 『조선일보』 1928. 10. 30

 

 

 

1928년 무렵 당시에는 민족주의 좌파의 입장을 대변했던 『조선일보』에 실린 연재 기획기사 [인천 미두시장과 조선인]을 보면, 당시 인천에 있어 미두시장이 차지하는 위치를 잘 보여준다. 1920년대만 하더라도 농업이 국가의 기간 산업이었고, 쌀은 그 어떤 상품보다도 값진, 오늘날의 석유와도 같은 현물이었다. 그 쌀이 항구도시 인천의 칠통마당 부두를 통해 국내외로 거래되면서 인천의 경제는 조선 경제를 쥐락펴락했다. 그러나 5만3천 인천부민에게는 칠통마당에 바위 같이 쌓여있는 쌀이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정미소와 용정공장에서 먹기 좋게 쌀을 가동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그 쌀을 제대로 사먹을 수 없었으니, 미두취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6년 5월 5일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 영업을 개시한 인천미두취인소는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의 반출하기 위해 미곡을 집산시키고 거래의 표준을 제도화한다는 취지에서 설립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인 객주를 대신하여 일본상인들이 곡물거래의 주도권을 쥐고 곡물의 가격을 이용하여 이득을 얻으려는 투기적 의도가 노골적으로 관철되었다.
그런 미두장에 조선인들은 무엇을 바라고 가산을 싸들고 몰려들었을까? 1920년대에 들어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에 의해 미곡시장이 활성화되자 미두장은 아연 투기장으로 변모하였다. “촌구석에서 땅마지기나 부쳐 가지고 지지리 궁상으로 사느니보다 있는 전답 팔아 가지고 인천으로 가서 미두하자! 돈벼락 맞는다”는 과장된 풍설이 떠돌았고,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조선의 서민들을 비롯하여 조선의 중소지주들을 유혹하였다. 채만식의 희곡 [당랑의 전설]은 소지주 박진사 일가의 몰락과정에 결정타를 가하는 인천미두장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졸부의 길몽 반백년, 인천미두장 운명
- 작일 오후에 폐쇄식을 거행
흥망의 환무(幻舞) 반세기, 그 유서 깊은 역사의 최종 페이지를 닫치는 인천미두취인소의 폐쇄식은 예정과 같이 28일 오후 2시반 금후 영원히 항도 인천에서 사라질 미두장의 애끓는 최후총성을 신호로 시장관계인 참집리에 동 시장에서 거행되었다.
이날의 날씨조차 음산하야 사해(死骸)마저 감출 취인소의 기구했든 최후운명을 조상이나 하려듯! 12만 인천부민의 흉금을 보담 고동시킨 바 있었다.
이미 품안을 떠난 애인이라 하나 그래도 미련을 가진 기미사(期米師)들이라 장례식이나마 몰리어드는 조위객으로 정각 전 벌써 식장엔 초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장내는 폭풍 일파 후 적막 그대로의 쓸쓸하였다.
몇 해 동안을 “가우” “야로”를 고함지른 ‘바다지’들은 손버릇을 잊지 못하야 마지막으로 해보랴듯, 서로를 매매하는 듯한 광경이 눈에 띠운다. 개중에는 애석의 눈물조차 매친 인사도 있었다. 『동아일보』 1939. 11. 29

 


인천 식민지경제의 거점이었던 인천미두장도 그러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1939년 11월 28일, 그동안 미두장을 통해 호의호식했던 일본 투기꾼들의 애끓는 눈물 속에 폐쇄식을 갖고 문을 닫았던 것이다.
이를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의 흥분된 어조는 아쉬움인가 후련함인가? 이렇게 미두장의 문은 닫혔지만, 그러나 조선인들의 삶은 더욱 척박해졌다. 군국주의 전쟁으로 치닫던 일제는 그나마 미곡시장마저 폐쇄시켜버리고 전면적인 미곡 통제와 배급제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글 이희환(인하대 국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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