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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정각, 용현벌에 포탄 떨어지다
12시 정각, 용현벌에 포탄 떨어지다
글-사진제공 | 조우성 (시인·인천시 시사편찬위원)
9월 15일 오전 11시경. 팔미도 앞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연합군의 ‘그라만’ 전투기 편대가 인천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북한군 포대가 있는 월미도와 도원산(지금의 광성고등학교 자리)에 집중적으로 기관포를 퍼부었다. 북한군도 이에 응사해 무수한 총탄이 인천의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상륙작전을 피해 교외로 피란 나온 시민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 인천 앞바다에 새까맣게 진을 치고 있는 연합군의 군함들을 바라보면서 감격스러워했다.
12시 정각. 귀를 찢는 듯한 함포의 굉음과 함께 용현동 유류창(油類廠 속칭 히타치) 근처 해변가에 커다란 포탄이 떨어지고, 모래 먼지와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투는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율목동과 도원동 일대의 초가집들과 시가지 건물들의 타오르는 불길에 하늘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 불길은 ‘두 달만의 인천 탈환’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내 집, 우리 동네, 우리 고장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돼가고 있는 모습이어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고, 조명탄이 수없이 터져 올라 어둠을 대낮처럼 밝히는 가운데 송학동 인천경찰서에서는 또 다른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후 7시경. 박기분을 비롯한 인천경찰서 경비원 3명과 사회안전부 요원들은 유치장 2층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 102명에게 마루바닥에 2열로 앉을 것을 명령했다. 수감자의 신분은 군인, 경찰, 시의원, 목사, 기자, 교사, 지역 유지 등이었는데, 이들은 한 방에 약 15명씩 갇혀 있었다. 30분 후, 다시 2층으로 올라온 박기분 등은 20여 분간 무차별로 이들에게 총을 쏘아대고는 황급히 달아났다. 연합군이 경찰서 부근까지 진격한 때문이었다. 일순간에 53명이 학살당했던 것이다. 중경상자는 21명, 생존자는 불과 26명이었다.
그 시각, 월미도에서는 북한군의 저항이 계속됐다. 2천여 명에 달하는 북한군은 소월미도에 설치돼 있던 기관포 25좌, 120미리 포 5문, 월미도의 해안 중포 20문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북한군은 무슨 영문에서인지 상륙 작전을 앞두고 오히려 제18사단을 천안으로, 제9사단 제87연대와 제849전차포연대 병력을 김천 지역으로 빼내가는 오판을 했고, 서해안방어사령부 예하 제226독립해병연대 제3대대 1개 중대와 제918포병연대 1개 중대 등만 남아 있었다.
8시경, 대부분 훈련도 채 받지 못한 소년병들로 구성된 북한군은 마침내 참호나 섬 안을 가로지르고 있는 터널 등에서 사살되거나 포로로 붙들려 나왔고, 이를 신호로 한국 해병대와 연합군은 인천역과 그 왼쪽의 외국인 묘지를 지나 만국공원(지금의 지유공원)을 잇는 주요 거점 등을 점령해 나갔다. 시가전이 시작된 것이다. 피아간에 전사자가 속출하는 격렬한 저항이 계속됐으나 16일 새벽 북한군은 인천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사정을 북한의 ‘조선 인민의 정의의 조국 해방 전사’는 ‘적은 1천 대의 비행기 엄호와 3백여 척의 함선과 미 10군단 관하의 미 해병 제1사단 미 보병7사단 및 특수공병여단 외에 국방군까지 포함하여 5만여 대병력을 동원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했다.(중략) 아군의 기관총수는 방파제에 기어오르는 적군 부대에 기습 사격을 가하여 이를 격퇴했다. 인천시가에서는 9월 15일 밤 맹렬한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인천방어부대는 16일 새벽 인천 시가로부터 철수했다.’고 밝히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아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 20명, 부상 174명, 해방불명 1명이었다. 이는 노르망디상륙작전에 버금가는 작전 규모로 보았을 때 극히 미미한 희생이었으나, 승전의 의미는 실로 중차대한 것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인천상륙작전을 실패했다면 백척간두에 서 있던 낙동강 전선은 무너지고, 그것은 곧 한반도의 공산화를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계속 됐다. 승산이 없는‘도박’이라던 인천상륙작전은 불과 하루 만에 종지부를 찍었으나, 국군과 연합군이 주안, 부평, 김포, 소사, 영등포를 거쳐 서울을 수복한 것은 그로부터 13일이 지난 9월 28일이었다. 문자 그대로 혈투가 전개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두만강까지 진격한 아군은 끝내 중국의 명분 없는 전쟁 개입으로 후퇴를 거듭했고, 국민들은 3년여 간의 길고 긴 악몽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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