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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반항아의 얼굴,시립극단 차광영 씨
낯선 반항아의 얼굴,
시립극단 차광영 씨
글-김 류 (시인) | 사진-김보섭 (자유사진가)
언뜻 드라이저(T. Dreiser)의 작품 『아메리카의 비극』을 떠올린 것은 그에게서, 이를테면, 그 소설 속에 나오는 무슨 그런 ‘비극’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이미 나이 마흔을 넘겼고, 시립극단의 배우가 되어 있으니까 소설 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될 리는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기보다는 그것을 각색해 만든 영화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의 주인공 모습을 생각해 냈다는 것이 옳은 이야기이다.
굳이 더 부연해서 설명한다면 처음, 극단 연습실로 가기 위해 침침한 복도를 꼬부라져 내려갈 때, 그의 강한 눈빛과 진한 눈썹이 흡사 영화의 주인공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모습을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 미국 배우의 깊이를 모를 만큼 맑은 우울과 우수와 가지런한 고독과 섞여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냉소의 그늘…. 찰나였지만 그에게서 몬티의 그런 음영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음을 말한다. 잘생긴 얼굴이었고, 어두웠기 때문에 그의 반항아적인 인상이 더욱 강하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차광영(車光榮) 씨. 이 연극배우를 마주하고 앉아서 뜻밖에도 우기(雨期), 닥쳐올 비의 계절을 잠시 생각한 것도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포도(鋪道) 위로 쏟아지는 사선(斜線)의 빗줄기, 그 비트(Beat) 선율 속으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걷는 사내! 그리고 불그스름한 백열등 아래, 파마를 해서 곱슬거리는 머리 뒤쪽에 흐릿하게 매달려 있는 여름 꽃, 약한 시력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그 꽃을 제멋대로 ‘아프리카’라고 이름붙이고, 영화배우 최민수를 떠올리다가 미국 배우 워런 비티나 말론 브란도를 그려보게도 된 것도 필경 차광영이라는 사내가 풍기는 어떤 독특한 냄새 때문일 것이다.
오후 2시 25분. 불안하고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의 책임일까. 50평이라고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넓어 보이는 텅 빈 극단 연습실에 앉아 있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서먹해서 선웃음을 자주 입가에 무는 사내가 정말 더 막막하고 외로울 것이다. 그는 얼마 전, 몸의 어떤 곳에 생긴 종양을 수술해서 앉음새마저도 엉거주춤하다. 아, 연습장 저 안쪽 테이블에서 곱게 생긴 여배우 한 명이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그걸 우리는 알지 못했다. 대사를 외우고 있는 것일까. 극단 연습실의 한가로움을 한탄하듯, 인생의 적막을 독백하고 있는 것일까.
공연이 없을 때에는 단원들 각자가 개인 연습을 한다. 요즘에는 8, 9월이나 11월에 있을 공연을 대비해 화술 연습, 신체 훈련, 독서, 영화 감상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배우는 남의 인생, 남의 삶을 몸으로 표출해 내는 직업이니까 만능 탤런트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화술도 개성에 맞게 개발해야 하고, 감정도, 몸의 움직임도 늘 성격에 알맞게 연습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독서도 영화 감상도 그런 준비의 하나이다.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언제나 피나는 연습을 통해서 자신을 한 계단 한 계단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빈 극단 연습실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 마루바닥의 동선(動線)을 따라 수없이 반복해 걷는 발걸음 소리….
“극단에서는 1년에 4작품 정도 공연을 해요.”
연기 경력이 15년이라 해도 작품마다 캐스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립극단 단원이니까 출연을 하지 않아도 기본 급료가 있다. 부인, 사내아이 하나, 딸아이 하나 이렇게 네 식구가 살기에는 아주 빠듯한 수입이지만, 어떻게 하든지 생활은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입고 있는 남방셔츠가 좀 값이 헐해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그러나 셔츠에 찍힌 재미있는 문양들이 이내, ‘제 스스로가 택한 직업이니까, 전 절대 행복하답니다.’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것이 오히려 감정을 막막하게 한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어느 날, 이처럼 낯선, 반항아 같은 배우 사내와 막막한 얼굴로 마주 앉게 하는 것이다.
“인천 무의도 태생입니다. 무의초등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중학생 때일 겁니다. 숭의동으로 나와 살 무렵인데 하루는 할머니를 따라 용현시장 근처 가설극장 구경을 가게 되었지요. 거기서 쇼도 보고 연극도 보았는데, 그게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었어요. 아마, 그것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공부보다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일념이 마음속에 타올랐으니까요. 그리곤 오늘까지 미친 듯이 살아온 겁니다.”
동인천중학교, 운산공고를 마치자마자 그는 서울에 있는 ‘우리 극장’ ‘사조’ 같은 극단에 입단했다. 그는 이른바 연극학교에서 이론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배우는 아니다. 연극의 가장 낮은 곳, 밑바닥부터 그저 몸으로 직접 부딪쳐 배우가 된 사람이다. 그것은 말 대신에 파도를 감추고 있는 듯한 그의 진하고 번뜩이는 눈빛이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인생에서 그다지 크게 내세울 것은 못된다 해도, 그는 고단한 배우 수업 외에 틈틈이 공부하여 명지실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공부가 싫었는데도 그 나이가 되니까, 그나마 전문학교라도 나오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8월 초, 5∼6일 이틀간 무의도에서 제6회 무의도 춤 축제가 열립니다. 제가 축제조직위원장으로 이번 행사를 끌어가게 되었습니다만, 걱정이 많아요.”
한여름의 절정에서 그가 마음껏 정열을 불사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자신의 고향 섬을 위해서, 똑 닮은 늙은 어머니를 위해서, 노래하고 춤추고 활활 삶의 불을 지펴 올리는 일이 얼마나 행복하랴. 은근히 이쪽을 끌어 잡아당기는 소리를 하면서, 여차하면 차를 몰아 무의도로 내달릴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가 아주 자신만만하고 으쓱하기 때문이다. 신바람이 나겠지. 갑자기 섹스피어의 무슨 연극, 거기 나오는 한 명 ‘안토니오’의 이름을 들먹이며 성공을 빌어 주자는 말을 한 것은 사진 작가였다. 그가 의상실에서 입고 나온 양상치 잎사귀처럼 너울거리는 칼라가 달린 옷 때문에 얼른 떠오른 것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안토니오! 매혹의 도시, 물의 도시 베니스, 그리고 안토니오의 무의도 섬 축제라! 그런 엉뚱한 생각과 함께 그러자고 이쪽도 동의의 고개를 끄덕인다.
참, 말이 났으니 영화에서는 샤일록 역으로 그 유명한 배우 알 파치노가 나왔던가. 만약 이 사내가 베니스의 상인에 출연한다면 안토니오 역이 과연 맞을까. 친구를 위해 가슴의 살 1파운드를 기꺼이 떼어낼 운명의 증서를 작성하는 그 역할이 이 사내에게 맞을까. 오히려 샤일록 역할이라면 어떨까. 강렬한 눈빛과 숱이 많은 눈썹 때문에도 그 악역이 잘 어울릴 것 같다. 완강하고 몰인정하고 황금만 아는 늙은 유대인의 모습. 그리고 앞에서 말한 ‘젊은이의 양지’에서라면 또 어떨까. 자신의 출세욕과 야망 때문에 옛 애인에 대해 살의를 품는 그런 이기적 인간상을 그리는 데에 그가 정말 썩 잘 어울릴까.
밝은 곳에서 보니까 턱을 이루는 선이 한결 부드럽다. 믿음직스러운 느낌도 든다. 그러나 하관이 조금만 더 갸름하고 날카로웠다면 어땠을까. 반항적이면서도 우수적인 얼굴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무수한 표정이나 모습은 자신이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이를 먹고 내면에 인생의, 삶의 줄거리들이 쌓이노라면 저절로 생각하는 얼굴이 될 것이고, 또 그와 같은 깊은 인간의 얼굴을 진정으로 연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는 중간 중간 그는 가끔씩 발밑을 내려다본다. 젊은 배우의 얼굴. 낯선 옆모습. 바다를 보고 살아온 이 사내의 우수는 얼마나 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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