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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복을 벗는 온화한 클라리넷 아저씨, 한학 악단장
연미복을 벗는 온화한 클라리넷 아저씨,
한학 악단장
글-김 류 (시인) | 사진-김보섭 (자유사진가)
비록 운동장 스탠드에서였지만 해양경찰관현악단의 그 멋진 연주 장면을 처음 본 것은 두어 달 전인, 지난 4월 29일이었다. 모 문화재단이 매년 그때쯤이면 개최하는 전국학생·어머니백일장 자리에 불려나가 그 연주를 듣게 된 것이다. 이 악단은 백일장 행사 시작 전에 몇 곡의 차분하고 분위기 있는 음악을 연주해 참가자들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면서, 또 개회 의식이 거행될 때 애국가와 묵념 반주곡을 연주하기 위해서 나와 준 것이었다. 거기서 악단장 한 학(韓鶴) 경위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참, 운동장 스탠드라고 한 것은 이 백일장이 워낙 참가 규모가 커서 매년 문학운동장 축구장을 빌려 쓰기 때문이다.
그날 어찌어찌 악단 옆쪽이면서 본부석으로는 뒤편에 앉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대각선 방향으로 지휘자를 바라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지휘를 하던 한 단장과는 적잖은 상거(相距)가 있어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자못 엄숙하게, 때로는 쾌활하고 가볍게, 또는 익살맞게, 흥겹게, 그리고 거세어졌다가는 다시 잔잔하게 팔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상체를 젖혔다 기울였다 하면서 60인조 관현악단 지휘에 빠져 있었다. 행사 개막을 기다리며 그의 손짓, 몸짓이 아주 우아하고 또 재치 있어 보여서 내심 감탄과 함께 선망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저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예술을 해도 저런 멋들어진, 독자든, 청중이든, 관객이든,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그런 예술을 해야 하는 건데….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때의 인상이라면 지휘하는 사람이 계급도 상당히 높은 데다가 나이 또한 지긋한 분이라는 느낌이었다. 멀찍이 흰색 예모(禮帽) 아래 누른 금테 안경을 낀 모습이 특히 그런 인상을 주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언제 저 분을 한번 만나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빠르게, 이내 이루어진 것이다. 아니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기회를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한 단장이 올해 말이면 정년 퇴직을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한 단장이 옷을 벗기 전에! 그래서 부랴부랴 서둘러 면담 신청을 했고, 그것이 성사되기에 이른 것이다.
송도 신도시. 해양경찰청은 아직은 허허벌판이라고 할 그곳에 언제 들어왔는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경위가 단장으로 있는 관현악단은 마치 무슨 비밀 부서나 되는 것처럼 그 하얀 건물 지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단장을 만나기 위해서는 건물 2층에 있는 정책홍보담당관실에 올라가, 늘씬한 키에 음대에서 타악을 전공했다는 음악 경찰 1호, 미녀 여경 이수윤(李受潤) 경장을 만나야 하고, 그녀의 안내로 홍보담당관을 만나야 했다. 악단은 홍보담당관실 소관이었다. 홍보를 담당하는 곳이니까 음악도 미술도 불가분 필요할 것이다. 차를 마시고 독도 수비 이야기를 하면서 사진작가와 이쪽은 한 학 단장을 만나러 지하로 내려간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흔히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신경이 예민해서 풋풋한 맛이 없다고들 말한다. 유명한 음악인들의 얼굴 모습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체로 그들은 턱 선이 아래로 빠른 인상들이 많다. 즐겁고 경쾌한 이미지라기보다는 다소 우울하고 사색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보인다. 한 단장도 신경질적인 사람일까.
컴퓨터가 한 대, 책상 하나, 응접 소파 한 세트. 그리고 벽에 붙여 놓은 월간 음악 연주 스케줄 표뿐인 한 단장의 집무실은 서너 평 남짓했고 아주 단출했다. 더구나 평상 근무복 차림의 한 단장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백일장 당시 먼발치에서 본 바로는 그의 나이와 계급은 얼추 맞았다고 하겠으나 이쪽이 가지고 있는 음악인들의 용모, 품성, 어디에서도 그런 선입견과는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솔직히 그의 모습 어디에도 악단 지휘자의 엄숙함이라든가 비상한 카리스마가 느껴지지 않았다. 수수하고 평범했다. 더구나 사람의 심성을 얼마든지 헤집어놓을 수 있는 매력의 악기, 클라리넷을 부는 세련된 연주자라는 느낌도 없었다. 그저 마음 너그러운 이웃집 아저씨, 혹은 세상 물정에 그다지 밝지 못한 눅눅한 외삼촌 같은 인상, 어쩌면 또 수박밭 원두막에 앉아서 기웃,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농부 아저씨. 손수 내놓는 무슨 비타 음료를 마시며, 더욱 그렇게 풍기는 사람 냄새를 맡는다.
“맞아요. 금년이 정년입니다. 세월이 그렇게 빠르게, 빠르게 갔군요.”
어느새 58세. 계급 경위. 근무 기간 31년, 해양경찰 경력만은 20년째.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직책으로 해양경찰청 악단장. 그리고 또 끝내 닥쳐온 정년 퇴직. 이런 순간에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바로 감회(感懷)라는 말일 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해 가지는 인간의 감정이고,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한 단장의 순박한 표정 속에 언뜻 그런 느낌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그는 이제 눈부시게 흰 제복 소매와 견장, 모자 차양에 놓인 금색 수(繡)실의 화사함도, 흰 구두의 유쾌한 멋도 모두 뒤로 해야 할 순간에 대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한 단장의 감회를 그의 이마에 가늘게 패이기 시작하는 주름살 속에서 다시 읽는다.
그의 경찰 인생이라면 전적으로 음악과 관계가 있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평택에서 중학 1학년 때, 학교 밴드부인 취주악부에 입회하면서 그 인연이 비롯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클라리넷이 마음에 들어 그걸 열정적으로 불면서 그는 단국대 부속고등학교에 스카우트되었다. 단대부고를 졸업하고는 곧장 해군 군악대에 입대했다. 제대 후에는 공무원 신분으로서 음악만 할 수 있는 그런 곳을 찍었다. 호구지책과 기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직장. 한 단장의 머리 속에 떠오른 적합한 직장이 곧 서울시경찰국이었다. 그곳에는 악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단원 모집에 무난히 합격했다.
음악을 하고 싶어서 경찰, 즉 육경(陸警)에 투신했지만 업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간 남대문서에서 근무했다. 그렇게 순수 경찰 이력도 쌓다가 1987년 해경으로 옮긴 것이다. 지휘 공부는 전문대 통신 강의를 들으며 했다.
"경찰 관현악단으로는 용인경찰대학 다음으로 우리 해양경찰관현악단이 생겼습니다. 이런 악단이 생김으로써 음악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지요."
관현악단은 젊은이들이 국가 방위의 의무를 다하면서 그들의 전공인 음악을 손에서 놓지 않게, 그래서 2년여 간 손이 굳어 버리는 손실을 막아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음악을 통해 각가지 의식에 참여하고, 사회 봉사에도 적극 동참하는 그런 자세를 배운다. 그는 그런 관현악단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한다. 그러면서 해경관현악단의 연주실 규모나 시설이 결코 흔하지 않다는 말도 덧붙인다. 특히 연주실을 처음 만들 때 한 단장은 자신은 1년밖에 이곳에 있지 못하지만, 앞으로 들어올 후배들을 위해 최고의 시설로 지어야 한다고 조금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정년 퇴임 준비라고 뭐 있나요? 공로 연수라는 게 있는데 그걸 해 보고…. 아니면 뭐, 음악학원 같은 거? 동료들도 여럿 악기를 가르쳐 주었는데 다들 좋아했거든요. 음, 퇴임 기념 연주회도 한번 하고 싶고, 백령도 같은 도서지방 방문해서 음악회 여는 것도 좋을 것 같고…. 할 일이 많아요.”
턱시도를 벗고 인생은 이렇게 가는 것이다. 멋진 지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어도, 그러나 그는 마음씨 좋은 음악 아저씨로 우리 곁에, 우리 기억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쪽 노을은 그것이 한없이 부러워서 언제 그와 소주라도 나누며, 이렇게 황혼이 와도 악기를 만질 수는 있는 것인지, 슬며시 물어 보고 싶다는 핑계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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