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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맹자 왈’ 들리는 듯 해요

2004-02-01 2004년 2월호

문학산 자락에 자리잡은 인주초등학교에 다니는 윤재희 어린이는 올해 졸업반이다.
엄마 최미숙 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재희에게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엄마와 함께 하는 문화재 탐방을 신청했다.
이번 문화재 탐방에는 재희와 3학년 때부터 단짝인 박지은 어린이가 함께 했다.

 

 

 


재희와 지은이가 둘러볼 곳은 계양산 남쪽에 자리잡은 부평향교다. 두 친구의 문화재탐방을 도와주기 위해 문화유산해설사 이성호 씨가 동행해 주었다. 부평향교로 가는 차안에서 그녀는 두 아이에게 부평향교를 아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고개를 저을 뿐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지 수다 꽃만 피웠다. 간신히 “인천향교는 배웠어요”라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이어 아이들에게 인천에 몇 개의 향교가 있는지 아느냐고도 물었다. 인천향교밖에 모른다던 아이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1개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향교는 지금의 중·고등학교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인천에는 인천, 부평, 강화, 교동향교 등 4개의 향교가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허리 잘린 향교, 가슴아파라
‘향교길’이라고 적혀있는 이정표를 따라 골목길로 접어들었지만 주택가가 이어져 있을 뿐 향교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그러다 갑자기 차가 멈춰 섰다. 어느새 부평향교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향교가 있는 건물과 향교의 대문이랄 수 있는 홍살문 사이에 도로가 뻥 뚫려있다는 점이다. 도시계획에 의해 외삼문 앞에 도로가 뚫리고 빌라 등 주택이 들어서면서 고즈넉한 향교의 옛 멋이 줄어든 것이다. 이를 본 재희는 “향교야, 옛날 모습으로 돌아와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부평향교 순례를 시작했다. 도로를 건너가니 홍살문이 서있다. 홍살문은 궁궐이나 제사 공간 앞에 세우는 것으로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았다. 홍살문 앞에는 세운지 얼마되지 않은 듯한 비석이 하나 서 있다. 한자공부를 했다는 재희에게 읽어보라고 했더니 “대(大)·소(小)·인(人)·음~몰라·개(皆)·하(下)·마(馬)”라고 제법 그럴 듯 하게 읽어 내려간다. ‘大小人員皆下馬 - 누구나 이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으로 세워 놓은 하마비(下馬碑)다. 향교는 과거 시험을 보기 전에 지방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유교 이념을 배우는 배움터였다. 또한 공자와 중국성현,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 때문에 신성한 지역으로 여겨져 설령 임금님이라고 할지라도 이 앞에서는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나도 여기서 공자 왈 맹자 왈?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 앞에 섰다. 외삼문은 문이 세 개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가운데 문으로는 임금님이나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고 일반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다가 왼쪽 문으로 나와야 한다. 빠꼼이 열려있는 문을 밀고 향교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명륜당이 친구들을 맞는다. 향교에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던 교실인 명륜당과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이 있다. 평지에 향교를 세우는 경우에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을 뒤에 두는 전묘후학(前墓後學)의 형태로, 향교가 구릉지에 있을 때는 명륜당을 앞에 두고 대성전을 뒤에 배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墓)의 형태로 지었다고 한다. 제사 지내는 공간을 신성하게 여기는 선조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부평향교는 계양산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대성전을 더 높은 곳에 배치하고 명륜당을 앞에다 둔 전학후묘의 형태를 띠고 있다.
명륜당을 지나 대성전으로 가는 길에는 동·서재(東·西齋)가 있다. 이곳은 공부하는 학생들이 기거하던, 지금의 기숙사 같은 곳이다. 옛날에는 신분의 차이가 심해서 양반의 자제는 동재에서, 중인들의 자제는 서재에서 생활했다. 아이들은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디서 묵었을까” 하는 얘기를 나누며 진지한 표정이 된다.

 

 

 

대성전 앞에도 서보고
이어서 대성전에 도착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한 달에 두 차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대성전 앞에는 관세위라는 돌이 있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정결한 마음으로 손을 씻는 곳이다. 대성전으로 오르는 계단도 역시 세 개로 구분돼 있다. 가운데 계단은 제사를 집행하는 사람만 다닐 수 있다고 하자 아이들은 가운데 계단은 밟으면 안된다며 뛰어넘느라 야단이다.
대성전의 양쪽으로는 동·서무(東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이황, 이이, 조광조 같은 우리나라 18성현의 위패를 모시던 곳인데 한국전쟁 때 불에 탄 향교를 복원하면서 우리나라 성현들도 중국 성현들과 같이 모시자는 의견에 따라 지금은 대성전에 위패를 같이 모셨다. 그리고 동·서무는 제사에 필요한 제기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쓴다.
향교를 모두 둘러보고 시청으로 돌아가는 길. 두 아이에게 소감을 물었다. “책으로만 보았던 향교를 직접 보고 설명을 들으니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다”는 충실한(?) 소감과 함께 “향교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라며 어른들의 잘못을 꼬집는 답변도 되돌아왔다. 아이들의 바램처럼 우리의 문화재가 소중하게 지켜지고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을 함께 가져본다.
글 _ 정경애 · 사진 _ 김성환

 

 

 


인재 길러내던 배움의 산실

 

부평향교는 1127년(고려 인종 5) 계양산 남쪽 기슭인 계양구 오류동 산 4번지에 세워졌다. 기록에 따르면 부평향교에는 일반적인 향교건물 배치인 대성전, 동·서무, 명륜당, 동·서재 이외에 전사청, 공수고 등이 있었다. 건축양식은 대성전, 동·서무, 동·서재는 맞배지붕 형식으로 되어 있고 명륜당은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 있다. 병자호란(1636)의 난리통에 불탄 문묘건물을 1688년(숙종 14)에 현재의 위치에 새로 짓고 호란 당시 공촌동에 피신시켰던 열성위판(烈聖位版)을 옮겨와 개교했다.
1943년 일제강점기 때 문학향교가 부평향교로 강제로 합쳐져 인천향교로 불리다가 해방 후 다시 문학향교(현재 인천향교)와 부평향교로 각각 분리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교시기로 볼 때는 부평향교가 인천향교 보다 한 발 앞선 것이다. 매년 이곳에서는 봄, 가을에 문묘 석전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관람은 평일 오전 10시~오후 5시, 토·일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단 1일과 15일은 관람할 수 없고 단체관람의 경우 전화로 미리 예약해야 한다. (541-2924)
찾아가는 길 _ 인천지하철 경인교대역에서 6번 출구로 나와 교대 정문에서 앞쪽으로 난 ‘향교길’로 200m가량 들어가면 바로 나온다. 시내버스 1번, 32번을 타면 경인교대 입구에서 내릴 수 있다.

 

 

 


이 지면은 초등학교 학생과 학부모의 참여로 구성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면 찾아가 보고 싶은 문화재와 가고싶은 날을 적어 편집실(우편번호 405-750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1138 인천광역시청 공보관실 <굿모닝인천> 편집팀 앞, 전화 440-2072)로 보내주십시오. 특히 강화군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참가한 학생에게는 문화상품권(1만원권 2매)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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