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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으로 살러 간 사내 채성병 시인

2004-03-01 2004년 3월호

채 성병(蔡成秉) 시인이 수원으로 갔다. 시 쓰는 일 말고, 술 마시는 일 말고 더는 할 일이 없는 사내, 채 성병이 인천에 올 때처럼 그렇게 훌쩍 수원으로 살러 갔다. 거기서 살지 못하면 다시는 그를 못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아프다.
10년도 넘게, 웃음 하나는 절대 망가지지 않는, 채 성병 시인이 환하게, 구부정하게 들어서던 신포동 약주집 골목이 적막하게 버려져 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 늘 비어 있는 듯한 허술한 얼굴, 그 얼굴 한복판에 또 언제나 순하게 걸려 있는 검은 뿔테 안경, 그리고 그 속의 죄 없는 눈, 가느다랗게 웃고 있는 눈.
80년대 초쯤이었던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 사내가 느닷없이 서울을 버리고 내려와서 아내와 함께 신포동에 가게를 차렸다. 시랑(詩廊)이라는 커피 집이었다. 10평도 채 되지 않았던 작은 가게 한 편에 민음사나 문학과지성사, 창비 같은 곳에서 나온 시집들을 죽 꽂아 놓고, 매킨토시라는 스피커가 좋은 전축의 볼륨을 마음대로 올리거나 내리거나 하는 집이었다. 아내는 커피를 팔고 사내는 많은 날들을 마시기만 했다. 그리고 손님이 뜸한 시간이면 긴 널빤지 의자에 배를 깔고 엎드려 시를 쓰곤 했다.
“형, 밥 안 먹었죠? 나갑시다.”
횟배 앓듯 희고 창백한 안색에 궁기마저 더덕더덕 덧칠을 한, 한 되지 않은 시인이 있었다. 바로 이 말은 그 피곤한 인간이 아무 데도 오갈 데가 없어 거기 구석 자리에 와 주저앉으면, 벌떡 일어나 앉으며 그가 내던진 언어였다. 백항아리가 아니면 미미집으로 향하자는 순수, 사람의 언어. 아름다운 음성.
“형, 빨리 나갑시다.”
이렇게 해서 그가 마신, 아니 그 시절 그와 더불어 몸 안에 넣은 액체 빵의 부피가 과연 얼마나 될까. 누렇게 소금에 전 새우젓 안주에 약주를 한 양재기,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얹는 것이 500짜리 생맥주 한 잔. 이것이 그가 거의 매일 그의 근처에 속절없이 와 무너지는, 참으로 궁핍했던 인류에게 베푼 애정 어린 점심 식사요, 새참이면서 넉넉한 저녁이었다. 액체 빵은 그토록 달고 시원했던 황금빛 생맥주에 그가 붙인 이름.
최 병구(崔炳九) 시인이 가시고, 허무할 만큼 무더웠던 1980년대 초의 인천의 여름을, 생맥주에는 칼로리가 많아서 그렇게 부른다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액체 빵을 씹었다. 가게가 되건 말건, 개시를 했건 못했건, 그 액체 빵을 사기 위해 돈 통 바닥에 재수 돈으로 깔아 두는 몇 천 원을 톡톡 털어 내던 이 천진, 이 천둥벌거숭이! 더불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의 아내의 눈총이여!
“빨리 인천 가서 한 잔 해야 할 텐데…. 병원에 또 들어갈 것 같아요. 형, 시 정말 좋더라. 좋은 시 많이 써요. 아, 집사람이 나가야 된다고 전화기 달래요. 난 전화가 없어요. 아, 형, 형….”
유배지(流配地) 수원에서 그가 이렇게 가끔 전화를 한다. 시 이야기하고, 누구의 안부도 묻고, 다시 술 이야기도 하고, 문득 죽은 자의 이름도 회상하다 보면, 몇 마디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렇게 벌써 10분이 지나 있다.
자신의 마음에 들면 여자고 남자고 무작정 끌어안고 따갑게 뺨부터 비벼대는 시인. 그는 당뇨도 아니고 술 습관이 든 사람도 아니다. 그는 아프지 않다. 유배 간 것도 아니다. 잠시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그냥 외국으로 떠난 동생네 대신 수원에 몇 년쯤 살러 간 것뿐이다. 그래서 사내는 이렇게 아내의 전화기로 몇 사람, 인천 사람들을 물결처럼 불러 보기도 하고, 눈감은 채 홀로 인천 생각을 하면서 출렁거리기도 한다.
그가 여기 사는 동안에, 지금은 정치가가 된 소설가 김 홍신, 연극인 기 국서, 화가 이 청운 같은 사람들이 서울에서, 어디에서 그를 찾아왔었다. 윤 제림, 이 창기 같은 후배 시인들도 문단 등단 전에 자주 채 성병의 카운터에 와 마주앉곤 했다. 그림 하는 김 진안이가 기타를 치기도 했고, 이미 이십년 전에 떠난 화가 김 영일 선배가 백발을 날리며 입성하기도 했다. 그가 오는 날은 가게의 분위기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어도 이 호인은 조금도 마다하는 기색이 없었다.
작고하신 우 문국 선생의 그 고요하면서도 칼칼한 강론을 듣는 날도 있고, 김 인홍 선생의 잔잔한 웅변을 가슴에 담는 행복한 날들도 있었다. 정 순일 선생의 티 없는 취기를 만나던 날, 아동문학가 김 구연 선배가 내놓던 유쾌한 방담의 날들, 술 냄새, 담배 연기, 웃음소리, 노래 소리의 그 수많은 날들, 날들.
소설가 심 창화 선생, 랑 승만 시인, 김 학균, 조 우성, 정 승렬 시인들, 성악가 이 필우 선생, 거구의 시인, 코보 최 승렬 선생. 그리고 인종(人種)으로 치면 그와 가장 근사(近似)한 성정 인자(性情因子)를 가졌었을 시인 손 설향 선생! 짧게, 서둘러 살다 간 송 서해, 이 효윤 두 시인. 이런 향기로운 사람들과 그는 인천에 흠뻑 빠져 수평선처럼 살았다. 그러다 수원으로 갔다.
그를 일러 평생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 사내라고 해도 옳을 것이다. 그는 눈을 크게 뜨거나 목소리를 높여 남과 다툰 적이 결코 없다. 대신 이제는 크게 기뻐할 줄도 모른다. 화를 내지 않고 살다 보니 이제는 기쁨이나 언짢음 같은 감정도 다 안으로, 안으로 삭아서일까. 그는 이제 좀 못 생긴 돌부처의 속을 닮아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인천 그리움은 못내 씻어지지 않는 병. 천석고황(泉石膏).

 

“며칠째 꼼짝도 않는 방
내 방은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잠이 들어 깨어날 줄 모르고
며칠째 별이 뜨지 않는 방
나는 나흘 만에 외출을 한다.”

 

1989년에 나온 그의 첫 시집 『별을 찾아서』에 실려 있는 표제시의 한 구절. 이 시처럼 며칠씩 꼼짝 않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인천이 그리우면 대절 택시를 타고 내려앉는 황혼 속을 달려온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몸살 나도록 서둘러 인천으로 오게 하는 것일까. 스스로 “한 번 떠난 자는 돌아오지 않았다.”면서도 누구 출판기념회에도 와서 술 대신 밥을 먹고, 맥주집 ‘흐르는 물’에도 불쑥 불쑥 나타나 녹차를 청해 마신다. 또 두어 달 전 문 닫은 ‘솔로’에 와서는 그 옛날 누구, 누구를 끌어안고 오래도록 뺨을 비비기도 했다.
며칠 만에 잠깬 채 성병이가 이렇게 인천에 오면 정말 ‘무명(無名)’이었던 시 몇 구절이 살아난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 걸어오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저기 신포동도 월미도도 자유공원도 모두 다 지난날처럼 잠이 깬다.
이제 머지않아 그는 다시 인천에 올 것이다. 잠시 빌려 산 수원은 거기다 그냥 두어 두고 시 몇 편 손에 든 채, 아내와 함께 인천으로 돌아오겠지. 쑥대밭 같기도 하고 물 빠진 뻘밭 같기도 한 사내, 채 성병 시인, 시인이여. 그래서 거기 부는 바람소리처럼 착한 사내여. 그가 정말 병원에 오래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경 속에서 그 가늘게 찢어지고 있는 웃음을 옛날처럼 다시 만나고 싶다.
글 _ 김윤식 (시인) · 사진 _ 김보섭(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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