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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 납신다, 돛을 올려라’
<굿모닝인천>으로 장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을 골수 독자라고 밝힌 윤지영 씨가 그간 <굿모닝인천>을 읽으며 느낀 점을 적은 후 본인은 회사에 다니느라 곤란하지만 아들 윤덕진 군(축현초교 5)과 아내가 문화재탐방에 참가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게다가 집에서 가까운 곳에 능허대터가 있는데 <굿모닝인천>과 함께 가보았으면 좋겠다며 구체적인 장소까지 제시해 이번 탐방의 주인공이 됐다.
황사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한 날, 약속 장소인 능허대터에 가보니 엄마와 아이가 나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빠 윤지영 씨가 함께 취재팀을 기다리고 있다. 아내 민경미 씨, 아들 덕진이와 함께 소중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 회사를 조퇴하고 이 자리에 함께 한 거란다. 그러고 보니 딸을 제외한 가족 나들이가 된 셈이다. 정말 대단한 아빠라는데 모두들 의견을 같이 했다. 윤지영 씨 가족과 함께 한 문화유산 해설사 박명숙 씨가 화사한 웃음을 머금으며 탐방을 도왔다.
백제시대부터 이용하던 중국가는 뱃길
먼저 능허대터에 대한 설명이 있는 곳에서 능허대가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문화유산해설사 박명숙 씨가 설명을 시작했다. 능허대는 중국과 교류를 위해 사신들이 배를 타기위해 물 때를 기다릴 때 묵었던 객관(客館)이 있던 자리로 전해지는 곳으로 1990년 우리시 지정 기념물 8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백제가 중국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백제가 전성기에 달한 근초고왕(近肖古王)때의 일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27년(372)에 중국의 진(晋)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대중(對中)관계를 맺었다. 이때 능허대터 근처에 있는 한나루(大津)에서 배를 띄웠는데 능허대터에는 사신들이 묶기 위한 객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는 설명이었다.
박 씨는 덕진이에게 “그러면 왜 백제는 육지를 이용해서 중국을 가지 않고 위험한 바닷길로 중국엘 갔을까?”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당시 백제는 북으로는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백제는 근초고왕 24년(369)과 26년(371)에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특히 두 번째 전투에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고국원왕의 전사로 백제와 고구려는 적대관계에 놓이게 돼 백제는 육로를 통해 중국과 교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다를 이용해 교류해야만 했다.
인천이 백제 사신의 출항지가 된 것은 백제의 한산에서 서해로 빠지는 한강 하류역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과 함께 인천이 해상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른다는 뜻의 능허대
오늘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준비한 아빠 윤지영 씨가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능허대라는 이름은 백제시대 때부터 썼나요?”박명숙 씨는 빙그레 웃으며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능허대라는 이름은 소동파의 「적벽부」에서 글자를 따다가 합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적벽부에‘하도 넓고 넓어서 허공을 타고 바람을 탄 것만 같아 그치는 데를 알지 못하겠네(凌萬頃之茫然 浩浩乎如 憑虛御風…)’라 한데서 ‘만경을 건넌다’는 능만경의 ‘凌’자와 ‘바람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는 빙허어풍의 ‘虛’자를 따서 ‘만경창파를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르듯 건넌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동파는 중국 송나라 때 사람이기 때문에 능허대라는 이름은 백제시대가 아닌 그 후에 붙여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일행은 능허대터 주변의 연못을 끼고 돌아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 박명숙 씨는 능허대와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을 들려주었다. 능허대 밑에는 기암이 있다고 전해진다. 백제사신이 기녀를 데리고 와서 배가 떠날 무렵에 순풍을 기다리다가 막상 배에 오르던 날 서로 멀리 헤어짐의 정을 이기지 못한 기녀가 바위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후인들이 그 바위를 기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멀리 바다가 바라보이는 전망대
능허대와 관련된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부천 쪽에서 구산동을 거쳐 만수동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별리현(別離峴-별고개)이라고 하고, 관교동에서 능허대 쪽으로 이르는 문학산 서편고개를 삼호현(三呼峴-사모지고개)이라고 부른다. 중국으로 가는 백제사신들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향할 때 한산에서 부평의 별고개를 넘고 이 고개를 넘어 능허대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그때 사신을 배웅하러 따라 나왔던 가족과 친지들은 별고개에서 전송하며 이별을 나누었다 하여 별리현이라고 불렀고, 사신들도 사모지고개에 오르면 멀리 보이는 별고개에 아직도 서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세 번 부르며 아쉬움을 달랬다 하여 삼호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박명숙 씨는 덕진이에게 “뭐라고 세 번 불렀을까?”하고 물었다. 다소 내성적인 덕진이는 그저 묵묵부답. 박명숙 씨는“모두들 잘 있거라, 돌아올 때까지 잘있거라 하며 소리치지 않았을까?”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전망대 옆에는 비석이 하나 서있다. 거기에는 ‘단기 4288년 5월 인천시 건립. 백제 때부터 이조 광해군 때까지’등의 글이 적혀있다. 능허대터는 지난 88년 인공연못과 언덕에 정자가 세워진 작은 공원으로 꾸며지면서 시민의 휴식처로 다시 태어났는데 이를 설명한 일종의 팻말인 셈이다.
전망대를 내려와 능허대터의 연못을 한바퀴 빙 둘러보았다. 아직은 겨울의 기운이 많이 남아 있어서 나무도 풀도 누런 색을 띄고 있었지만 연못 속에서는 빨강, 노랑의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며 봄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이제 능허대가 어떤 곳인지 알겠지?”탐방을 마치고 박명숙 씨가 덕진이에게 물었다. 덕진이는 작은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하며 “친구들에게 설명도 할 수 있어야 해”라는 주문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봄이 되면 친구들과 같이 와 봐야겠다는 말과 함께….
글 _ 정경애 · 사진 _ 김성환
능허대지(凌虛臺址)
능허대는 백제가 동진(東晋)과 교류를 시작한 근초고왕 27년(372)부터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는 개로왕 21년(475)까지 중국으로 내왕하는 백제 사신들이 출발하던 나루터의 객관(客館)이 있던 곳이다. 삼국이 서로 대립하고 있던 당시 정세 속에서 주로 남조와 교류하고 있던 백제 사신들은 중국을 왕래할 때 이곳 능허대 근처의 나루를 출발하여 산동반도의 등주·내주에 이르는 해로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 지면은 초등학교 학생과 학부모의 참여로 구성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면 찾아가 보고 싶은 문화재와 가고싶은 날을 적어 편집실(우편번호 405-750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1138 인천광역시청 공보관실 <굿모닝인천> 편집팀 앞, 전화 440-2072)로 보내주십시오. 특히 강화군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참가한 학생에게는 문화상품권(1만원권 2매)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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