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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벗은 슬픈 축복과 삐쩍 마른 자화상

2004-04-01 2004년 4월호

벽에는 화가 사내 자신의 자화상이 걸려 있다. 눌러 쓴 모자, 꽁지머리, 콧수염, 턱 밑의 염소수염, 그리고 맑은 안경알 속에 문득 비어 있는 듯하기도 하고 물기가 어려 있는 것 같기도 한 눈빛. 그 그림 옆에는 벌거벗고 서 있는 여인을 그린 크로키 작품이 하나 걸려 있다. 또 그 옆에는 벗고 누운 여인, 허리를 구부려 더 육감적인 나부상(裸婦像)들도 걸려 있다. 실내에는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머리와 몸을 가진 ‘사람’을 그리고 있는 몇몇 여자 교습생들의 고요한 숨소리. 창 밖에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때 이르게 후텁지근한 봄.
점심은 끝이 났는데, 송지유(松脂油) 냄새가 진하게 떠돌고 있는 앉은뱅이 테이블 위에 아직 소주 한 병이 남아 있다. 이렇게 들이닥칠 것을 예상한 것인지 김치 그릇과 양념 김 봉지, 그리고 고추 절임 같은 점심 반찬을 조금 남겨 놓았다. 거기에 육포 몇 가닥과 깎은 사과 쪽 따위도 그대로 걷지 않았다.
“식사는요?”
괜찮다고 해도 열 번을 더 묻는다. 곰살궂게 소주를 따르는 식물성 같은 평화주의자. 소주 기운 때문일까. 화가 사내의 화실은 더운 인도(印度) 같다. 아니, 그가 인도 사람 냄새를 묻혀 와서 그럴 것이다. 먼지와 땀과 욕망과 상처와…, 목욕을 하지 않는 수행자 같으면서 지평선 위에 한없이 길게 펼쳐놓은 힘들면서도 영혼의 편안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의 화실은 분명 인도에 가까이 가 있다. 정말 인도 같은 것. 북쪽의 만년설 같은 것. 그가 인도를 몸에 묻혀 온 것은 벌써 오래 전 이야기이다.
어쩌면 또 이런 생각도 든다. 화가 사내는 혹 추운 곳 사람. 겨우내 얼어붙었던 전나무 숲에서 낡은 외투를 벗어들고 방금 봄으로 가는 마차를 타기 위해 걸어 나온 한 나그네일지 모른다는 생각. 좀 어눌하고 추워 보이고 하얗게 웃음을 웃는 얇은 종잇장 같기도 하고 나뭇잎 같기도 하고 가끔 벽 너머 환영(幻影)이나 바라보는 사시(斜視) 같기도 한 사내. 그래서 옷가지도 챙기지 않은 채 언제든지 입은 그대로 아무데나 훌쩍 눈 내리는 곳으로 다시 가 버릴지도 모를 삐쩍 마르고 퀭한 화가 사내. 쉰이 다 된 인디언.
그가 그린 아크릴화, 수채화들이 표정을 짓는다. 이 인디언 같은 화가 사내 박치성의 그림에는 관능이 있고 유미주의(唯美主義)가 있다. 몸의 외로움이 있고 벽(壁)이 있고 슬픔이 있다. 빈틈없는 정확한 데생이 그의 그런 내면 표정을 그려낸다.
인도에서 끝내 공중 부양을 하지 못한 때문일까. 목탄 아크릴 자화상 속에 화가 사내는 ‘바보’라는 제목을 단 채 슬프고 긴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다. 인도에서 그는 그림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사람 공부, 인간 본질 공부를 했던 것인지 모른다. 아니, 그림 대신에 자기 얼굴, 자기 내면만을 들여다보다가 왔는지….
‘벽 없는 벽’에 그려진 힘이 하나도 없는, 좌절한 듯한 막막한 듯한 우수에 찬 표정의 사내는 정말 그의 자화상보다도 더 인상적이다. 그래서 그가 늙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에게 가까이 가고 있다고 해도 전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암흑의 벽은 그를 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활짝 편 새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간절한 소망일 것이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작품이 ‘새가 된 벽’일 것이다.
화가 사내는 또 마음속 여인과 다투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 다음날 여자의 초상에 ‘싸움’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남동구 구월동 종합문화예술회관 앞, 무슨 교회 위 4층 작업실에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씩씩거리며 그가 자기 영혼의 무게 위에 ‘싸움’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슬픈 축복’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득 이 화가 사내가 좀 동떨어진 자신의 지난 시절을 말한다.
“1981~2년일 겁니다. 밤이면 신포동 신한은행 현관 모서리에 자리를 잡던 포장마차 ‘쁘띠뜨 파블레’ 말입니다. 그 시절 거기서 그 유식하고 노래 좋아하는 주인 때문에 샹송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짧은 우화’를 그냥 웃어 줄 수밖에는 없겠다. 이 맹탕스러움. 이 허허로움. 결혼은 했는지, 어제 정말 누구를 좋아하기는 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내.
“결혼요? 했죠.”
“그 얘기는 왜 하는 거요?”
“예? 해야죠….”
‘슬픈 축복’은 벌거벗은 여자를 그린 여러 편의 아주 멋있는 누드화들이다. 하나같이 얼굴이 제대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관능의 육신을 가진 여자들이다. 에덴동산에서 금방 추방된 이브들. 축복처럼 육신의 풍만은 가졌으되 씻을 길 없는 원죄 때문에 얼굴을 감춘 이 이브들이 그래서 슬프다는 것일까. 화실 벽에 걸려 있는 그의 사육제(謝肉祭)는 이렇게 무겁고 우울하다.
이번 4월 초, 그가 오랜만에 개인전을 갖는다. 그래서 술도 조금 절제를 하고 생각도 많이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영혼이 반쯤은 빠져나가는 듯한 고된 작업 과정과 피로와 보람이 이번 전시회의 주제다.
보통 때는 저녁이면 화실을 걸어 잠그고 나서 술을 마시는 일이 대부분이다. 화실 건너에 있는 전통찻집에 틀어박혀 시간을 죽이기도 하고, 아니면 뜻 맞는 몇몇을 불러 모아 몇 시간씩 밑도 끝도 없는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혹 그마저도 시원치 않으면 일찍 귀가해 이불 속에서 인도에 대한 꿈이나 꾼다. 그의 인도 꿈속에 이런 시가 어울릴지 모른다.

“오물을 밟고 가는 발길, 덥고 느릿느릿한 삶, 졸고 있는 육신과 영혼의 나라…. 고통이 오히려 접힌 다리처럼 더 편안하고, 아무런 능력도 없이 모든 것을 바라며 일상처럼 살아 남는 나라. 범람하는 붉은 흙탕물로 영혼의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적시고 있는, 봄밤도 없고 물가에 붉고 흰 꽃도 피지 않는 무심한 곳. 불길 속에서도 육신의 먼지가 뽀얗게 일어 성애(性愛)의 쾌락처럼 신음하는 곳.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며 명상에 잠긴 듯 그늘마다 희미하게 일어나 앉는 다신(多神)의 목소리. 그렇게 메마른 해골 위에 영광처럼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끝끝내 낮잠처럼 행복한 체념의 나라. 영원히 봄이 오지 않는 곳, 인디아.<印度에는 봄이 오지 않는다 / 김윤식>”

 

왈칵 문 밖의 봄을 밀고 거리로 내려서자 이 화가 사내가 온몸의 감각 기관을 모조리 열어놓은 좋은 봄기운 속에서 희죽 한번 웃으며 잘 가라라는 듯 고개를 꾸벅해 보인다.

 


글 _ 김윤식 (시인) · 사진 _ 김보섭(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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