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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기도…애닯기도 한 고려 흔적

2004-05-01 2004년 5월호

엄마와 함께 문화재 탐방 ⑤ | 강화 고려궁지 (高麗宮址·사적 제133호)

 

 

 

12년 동안 같은 아파트, 그것도 문을 서로 마주 보고 살면서 친자매보다 더 가까이 지내고 있는 이가희(승학초교 5학년)와 박세은(같은 학교·학년) 어린이가 손잡고 강화 문화재 탐방 길에 나섰다. 가희 엄마 이인용 씨도 함께 동행했다.

 


“에이, 이게 궁궐이야?” 고려궁지에 들어 선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속내를 숨기지 못한다. 가희와 세은이도 휑하니 비어있는 궁터를 보고 적지 아니 실망하는 눈치이다. <태조 왕건> 드라마 덕분에 고려궁지라고 하면 경복궁처럼 여러 채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 있는 궁궐을 머리 속에 넣고 왔으니 무리도 아니다.
이러한 마음을 재빨리 헤아린 박정자 문화해설사는 서둘러 고려궁지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는 궁궐이 있던 터이지 ‘궁궐’은 아녜요. 그러니까 옛날에 고려의 임금님이 살던 궁궐 자리인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는 곳이죠.”
물밀 듯 몰려오는 침략군 몽골의 말발굽을 피해 고려 왕 고종은 1232년에 바다를 건너 이곳 강화로 피난 나왔다. 고려 조정은 급히 궁궐을 지었고 39년간 몽골과 대항하면서 강화는 고려의 임시 수도 역할을 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지금의 궁궐터는 원래 규모보다는 많이 축소되었다. 고려궁지로 올라오는 큰길 부근 김상용 선생 순의비가 있는 곳쯤에 궁궐 남문이 있었으니 거기까지를 궁궐의 크기로 보면 된다. 현재의 고려궁지 출입문인 ‘승평문’은 옛 궁궐 남문의 이름이다.
‘사적 제 133호 고려궁지’라고 새겨진 비석만이 그 옛날 이곳이 고려의 궁궐터라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항몽(抗蒙)의 기개를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실체물이 없다는 게 못내 서운하다. 오히려 그곳에서는 조선시대의 숨결을 더 느낄 수 있다. 고려가 떠난 그 자리에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얄미운 프랑스군들
시계바늘은 순식간에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갔다. <외규장각>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로 다가섰다. “외규장각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박정자 씨의 질문에 탐방 전날 미리 인터넷을 검색해 예습을 해온 세은이와 가희는 수첩을 뒤적이며 동시에 대답한다. “임금님 도서관이요.” “그래, 맞아요. 조선 정조 때 세워진 왕실도서관으로 요즘으로 말하면 국립도서관쯤의 역할을 하는 곳이예요.”
외규장각은 서울에 있는 규장각의 서고가 넘칠 정도로 책이 많아지자 1782년에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 그 당시는 외부의 침입이 주로 북방이나 일본 쪽에서 있을 것으로 예측하여 강화도가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곳에 세웠다. 그러나 구한말에는 강화도가 외세 침입의 주요 통로가 되었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화로 들어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들을 훔쳐 갔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의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그 중에는 현존하는 최대의 금속활자인 직지심경도 포함되었다. 직지심경은 직지심체요절이라고도 하는데 총 두 권으로 되어있고 한권은 우리나라에, 한권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다.

 

 

 

여봐라, 이방~
외규장각 아래쪽 담장 옆에는 종각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장희빈의 짝꿍이 누구죠?” “장희빈?” 장희빈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숙종’이란 답이 나오기에는 다소 어려운 질문인 듯싶다. 높이 198㎝, 밑지름 138㎝, 두께 15㎝의 보물 제11호인 강화동종은 숙종 때 만들어져 강화성 남문에 걸어놓고 성문을 여닫는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이 종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다 30톤이나 되는 무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갑곶(강화대교 부근)에 버리고 도망갔다. 자칫하면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나 볼 뻔했던, 구 한말의 슬픈 역사를 담고 있는 종이다. 1995년까지 강화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타종을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금이 갈 우려가 있어 진짜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겼다. 말하자면 고려궁지에 있는 것은 복사품, ‘짝퉁’이다.
발걸음을 종각 밑에 있는 ‘ㄷ’자형 한옥 건물로 옮겼다. “이·호·예·병·형·공”, “이·호·예·병…” 마루에 앉자마자 손녀뻘 되는 아이들은 박정자 해설사 할머니를 따라 손가락을 꼽으며 지방 관아 조직에 대해 주문 외우듯 암기했다. 이곳은 관아 중의 하나인 이방의 집무장소였던 이방청(吏房廳 시 유형문화재 26호)이다. 이방청은 온돌방이 8칸, 마루방이 12칸, 부엌이 1칸으로 모두 78평 가량되는 크기이다. 1654년 효종 5년에 건립해서 정조 7년(1783년)에 대대적으로 고쳐 지었다. 한때 이방청은 강화등기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탐방을 마칠 쯤 고요한 고려궁지 안으로 한줄기 4월의 봄바람이 불어왔다. 그 속에 역사의 향기가 실려 오는 듯 했다. 폴짝폴짝, 까르르 하면서 반나절 동안 고려궁지를 탐방한 아이들이 그 바람 속에서 고려와 조선 그리고 구 한말 까지의 숨결을 얼마나 느꼈는지 궁금해진다.
글 _ 유동현 · 사진 _ 김성환

 

 

 

찾아가는 길 _ 강화 읍내로 들어서 강화군청 길을 지나 오른편에 농협 팻말이 보이면 우회전 해 비탈길을 오른다. 언덕 끝까지 오르면 넓은 주차장과 승평문(昇平門)이라는 출입문이 보인다. 읍내 큰길에서 도보로 5분 거리다. 고려궁지를 둘러 본 후 근처 5분 거리에 있는 ‘강화도령’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을 비롯해 병자호란 때 폭약으로 자결한 우의정 김상용 순의비 그리고 100년 세월이 녹아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 등 유적지를 함께 둘러보기를 권한다.

 

 

 


항몽의 기개 서려있는 강도 궁터

 

몽골이 우리나라를 침입하자 고려 조정은 1232년(고종 19) 6월 16일 서울을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길 것을 결정한다. 불과 20여일 후인 7월 7일에 왕은 서둘러 바다를 건넌다. 강화도에 새 도읍을 건설했는데 그곳이 바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궁터’이다.
그들은 두고 온 개성을 잊지 못해 산과 궁의 이름을 개성 때의 이름을 붙여서 위안을 삼았다. 강도(江都)의 주산을 송악산이라 칭하고 그 자락에 궁궐을 앉혔고 다른 지역에 연경궁, 수창궁, 용암궁 등 별궁을 세웠다. 송악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자락 견자산 기슭에 법왕사 같은 사찰을 비롯해 국자감, 태묘 등도 지었다.
강도 건설은 군인들과 각 지방에서 모은 백성들의 힘을 빌어 고종 21년에 본격적으로 진행돼 몽골의 제 3차 침입이 시작되는 고종 22년 이전까지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무신들도 많은 사람을 동원해 개성에서 목재를 실어와 견자산 부근에 궁궐에 버금가는 저택들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고려궁터는 궁궐이 들어서기에는 너무 협소할 뿐 아니라 아쉽게도 그곳에는 고려에 대한 흔적이 거의 없다. 39년간 몽골에 줄기차게 항전했던 고려가 1270년 5월 몽골과 강화(講和)를 맺고 개성으로 돌아가면서 궁궐과 성의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불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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