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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의 웃음을 웃는 의사 선생님

2004-05-01 2004년 5월호

세상의 죄가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그런 얼굴빛. 일흔이 넘었어도 발그레한 동자(童子)의 웃음을 웃는 의사 선생님, 전의철(全毅哲) 박사(인천중앙감리교회 장로). 육신의 절반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아무 불평이 없고 비관이 없다. 캄캄한 체념이 없으니 언제나 천진한 아이의 말투를 가지고 있다. 느릿느릿 말하고 조용히 웃는다. 마치 하느님이 옆에 계시기라도 한 것처럼 .
이분은 언제나 ‘멜빵바지에 눌러쓰는 납작한 모자, 그리고 나비넥타이’를 매는 인천 유일의 상징이며 멋쟁이다. 이런 취향을 갖게 된 것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에서 유학을 시작하던 1963년부터.
공부로 낮밤을 지새우던 시절이라 이런 장신구가 그때그때 몸치장하기에도 간편하고 또 시간이 절약이 된다는, 나름대로 실용적 판단 때문에 착용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평생 몸에 익어 버린 습관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연세가 드셔서 색깔을 바꾸셨는데 사실 전에는 붉은색을 제일 좋아하셨어요.”
매일 아침 그 호랑나비들을 바로잡아 매 주는 분. 어쩌면 부군을 따라 자신도 몰래 그렇게 되기를 하느님께 자청했는지, 똑같이 신체의 반이 불편해진 부인 김광신(金光信) 여사가 누르스름한 바탕에 점이 박힌 나비넥타이를 꺼내놓으며 웃는다. 아마 당신 부군께 이걸 매고 사진을 찍으시라는 뜻 같다. 그러나 사진은, 사진 찍는 사람의 말을 좇아 좀 푸른 기가 도는 것을 매고 그냥 또 빙그레 웃으며 찍어 본다. 그러다가 결국은 다시 또 더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의 누른색으로 바꾸어 맨다.
“몽골에 간 것은 집의 애가 이야기를 해서 가게 된 거지요.”
꼭 슈바이처 박사를 꿈꾼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든 무의촌 아무 곳이나 찾아가서 그저 짐승처럼 순박하고 언제나 성자처럼 말없이 가난한 그런 사람들 곁에 조용히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아픈 곳을 가슴 속으로부터 아물게 해 주는 것이 전 박사의 젊은 시절부터의 꿈. 그러나 세상살이에 바빠 마음뿐이었다가 다시 그 꿈을 생각해 낸 때가 주안 세광병원을 설립한 뒤 환갑을 지내고 나서였다.
아아, 목숨이 남아 있다면 앞으로 10년은 이 지상에서 가장 낮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위해 바치자. 하지만 국내에는 이분이 갈 만한 무의촌이 없었다. 여러 날 물색을 해서 마침내 떠나기로 마음을 정한 나라가 지구 저 편에 있는 파라과이. 의사가 부족한 나라였다. 그곳으로 가는 거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세브란스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아들이 몽골을 추천한 것이었다.
몽골. 라마교와 유목민의 나라. 겔과 허르호크, 그리고 초원의 풀을 뜯는 말과 소와 양과 염소의 한가로운 풍경의 나라. 봄이면 고원 언덕에 잠시 피었다 지는 이름 모를 풀꽃. 그 무렵이면 거기에 하얀 나비도 팔랑팔랑 날던가. 전 박사가 몽골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아들의 추천에 따라 1993년 전 박사는 모교인 연세대학교 선교 현장 시찰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고, 몽골을 돌아보고는 선뜻 마지막 ‘10년 삶의 장소’를 결정한 것이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세워진 연세친선병원은 그 이듬해 우리 국경일 개천절에 맞춰 문을 열었다. 그것도 어떤 의미라면 의미였다. 그리고 이제 전 박사는 이 병원의 자원봉사 의사가 되었고 거기에 부인은 ‘못 살고 더러운 몽골 사람의 모습으로 어느 때든 예수님이 다시 오실 수 있을 거’라며 남편을 전적으로 돕고 나섰다. 이것이 이 두 부부의 진실이고 믿음이고 소망이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필경 목련의 얼굴이었을, 언제나 환한 안색의 부인과 그리고 그 옆에 항상 온유하게, 내면의 미소를 짓는 죄 없는 동자의 얼굴, 남편. 선한 마음들. 두 사람은 이제 이국에서 펼칠 의료 선교의 동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7년 반의 몽골 생활. 채소와 과일이 없는 텅 빈 몽골의 산언덕과, 그러나 틀림없이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더없이 깨끗하고 좋은 공기와 늘 맑은 하늘을 보이는 날씨와 고원의 밤하늘에 뜨는 수만 개의 찬란한 별빛. 그러나 인간의 삶은 온통 질곡뿐이었다.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는 죄 없는 아이들의 가난과 벙어리 세 모녀, 열 살짜리의 키를 가진 성인 여자의 눈동자, 갓난아기의 몸을 짐승처럼 자신의 혓바닥으로 핥아 주는 어미,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다면서도 아기 어머니가 된 것이 행복하다는 산모. 7년 반 동안의 이 처참하고 행복한 몽골 생활의 의미는 ‘나그네를 돌봄이 곧 나를 사랑함이다’라는 하느님 말씀 그대로였다.
전 박사가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은 당뇨 환자이면서도 선교 생활 7년 반 내내 여러 사람을 먹이는 힘겨운 식사 당번 노릇을 했던 부인의 나날들.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전 박사는 안경 속에서 가느다랗지만 한없는 애정이 숨겨져 있는 눈길을 부인 쪽으로 보낸다. 인천에 단 두 사람밖에 없는 ‘신사임당상’을 수상한 고운 부인이 그것을 눈웃음으로 받아들인다. 따듯하다. 꽃불을 켠 듯 붉고 환하다. 그리고 주위가 모두 훈훈할 만큼 아름답다.
그런 것일까. 부부의 마음은 그런 것일까. 부인이 자기는 이제 거기 몽골 사람이 되었다고 거기서 죽고 싶다고 말했을 때, 정말이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애틋한 마음이 들었었다는, 아니 지금도 그 말만은 귓가에 생생하다는 이분의 얼굴이 조금은 더 홍조를 띠는 듯하다.
전 박사는 196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인천기독병원 외과의사로 있으면서 특히 전간(癲癎) 치료에 남다른 정열을 쏟아 부었던 경력이 있다. 어느 병인들 불행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웃에도 부끄럽고 흉한, 이 불치로 알려졌던 간질병의 불행을 이분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 당시 미국인 여선교사 닥터 로빈슨이 결성한 ‘장미회’라는 봉사 단체에 참여해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따지고 보면 무의촌 순회 진료에는 어느 병원보다도 적극적이었던 기독병원에 이분이 20년을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전 의철 박사는 몽골에 가서 의료 선교를 베푼 보답으로 1999년 연세대 의과대 봉사대상을 받았다. 또 2000년에는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그리고 몽골 보건복지부장관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지난 3월에는 건국대학 설립자 유석창(劉錫昶) 박사를 기념해 제정된 상허상(常噓賞) 제 15회 의료부문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몽골연세병원 초대 원장, 몽골연세사회복지재단 지부장을 지냈고 지금은 몽골연세친선병원 이사장으로 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2003년에는 상허상 수상 상금 2천만 원에다 자식들이 보탠 1천만 원으로 남동공단에 인천자선클리닉을 설립했다. 외국인 노무자들을 보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작년 봄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 그래서 왼쪽 몸 절반이 불편해진 것. 그러나 지금은 많이 회복이 되어가고 있다. 하느님이 귀에 대고‘너 다시 일어나 내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하느님의 음성을 기다린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요즘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편한 사람 이상으로 바깥나들이가 빈번하다.
웃음을 웃는 것도 육신을 반만 놀릴 수밖에 없는 것도 다 하느님 뜻이라고 말한다. 마주앉은 부인이 넘겨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미국 달라스에서 매형을 도울까 해서 달려온 처남 박광제(朴光濟) 목사도 이 광경에 끌려 들어와 똑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인간의 훈장도 받고 다른 상도 받았지만 이분에게 내릴 하느님의 상은 과연 어떤 것인지….
창 밖의 봄날이 아주 좋다. 뚝뚝 목련이 지고 있다. 순리다. 그래서 꽃이 지는 게 그다지 쓸쓸하지가 않다.
글 _ 김윤식(시인) · 사진 _ 김보섭(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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