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보기
그 앞에 서면 당신의 뜨거운 숨결 들리는 듯 합니다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 적과 이웃했던 강화군과 옹진군의 섬 주민들은 자유수호를 위해 온 몸으로 맞섰다.
유격대원으로서, 첩보대원으로서 백의종군하며 자신을 장렬히 산화시켜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 대한민국을 구해냈다.
그들은 오늘도 남북통일을 염원하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충혼비 **중구 을왕동 산119번지
1950년 11월 17일 평안북도에 진격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략적인 후퇴를 하게 되자 평안도 일대 각 면의 치안대가 힘을 모아 1950년 11월 22일 백마부대를 만들었다. 백마부대는 서해의 여러 섬으로 다니며 유격전을 펼친 끝에 북한군 사상자 5,400명, 포로 235명, 귀순자 42명, 애국동포 구출 15,000여명, 반공애국청년 구출 2,800여명 및 적군시설 폭파, 적 선박 파괴 및 격침 등 엄청난 전과를 올렸지만 아군의 피해 또한 컸다.
그때 희생당한 552명 확정전사자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휴전 뒤인 1953년 10월 13일 용유도 을왕리에 탑 2.5m 높이로 충혼비가 세워졌다.
강화군 현충탑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산20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휴전이 될 때까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몰한 강화출신 군경 및 유격대원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3년에 건립되었다. 1994년 6월 현 위치에 기단높이 1.5m, 비높이 17.1m 크기로 재건립하였다. 이곳에는 강화군 출신 전몰군경 1,033위를 각인했다.
강화특공대 의적 불망비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산6
1950년 10월 30일 중공군 개입으로 북진한 국군이 후퇴할 때 강화군 하점면에서 250명의 향토방위특공대가 조직되어 강화군에 침입한 공산군과 격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명의 특공대원이 장렬히 전사했다. 그들의 전공과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비를 건립하였다.
반공유격용사 위령탑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산6
북한군의 불법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평안도, 황해도, 개성 그리고 개풍군 출신들로 구성된 월남애국청년들은 육군 제5816부대 유격대로 편성되어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며 북한군에 맞서 싸웠다.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대병력을 상대로 강화도 사수는 물론 적의 중추시설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지만 그들도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산화한 용사들의 공적과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기단높이 1m, 비높이 13.5m의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이 위령탑에는 육군 제5816부대 유격대와 제4863부대 강화 유격대 그리고 을지 타이거여단 소속의 영령을 봉안하고 있다. 또한 강화군 양지면 인화리 주민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순의비도 위령탑 건립 시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한국유격군 을지타이거여단 충혼전적비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산8-2
육군 을지 제2병단과 함께 ‘타이거여단’이란 이름의 반공유격대 8240부대 용사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이 6·25 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던져 조국을 구했다. 그들은 소총이나 폭발물만 지니고 적의 군사시설에 벌떼처럼 달려들어 폭파시키고 흉탄에 맞아 피 흘려 쓰러져 갔다.
신명을 조국수호에 바친 호국의 영령을 위해 북녘 산천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출격기지였던 교동도에 기단높이 1.2m, 비 높이 7.2m의 돌비석을 세웠다.
해군 영흥도 전적비 **옹진군 영흥면 내리 산314번지
영흥도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한 첩보활동의 주요 기지였다. 미 극동사령부 크라크 대위 일행과 우리 해군 첩보대원 17명, 그리고 영흥도의 애국청소년 60여명은 소사나무 숲이 있는 십리포 해변에 기밀 첩보작전기지를 두고 죽음을 각오하고 섬 해안을 경비하면서 첩보전을 수행하였다. 성공리에 세밀한 정보가 수집되어 9·15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9월 14일 영흥도 동남쪽에 있는 대부도에서 인민군 부대가 영흥도를 기습하여 우리 해군과 대격전 끝에 해군 10여명과 영흥도 애국청년인 해군의용단원 등 많은 전사자를 냈다.
<민족의 증언>에 의하면 ‘대부도에서 인민군이 영흥도로 14일 1개 대대가 기습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때 크라크 대위 일행은 13일 영흥도를 떠나면서 우리 해군에게 ‘영흥도를 사수하라’고 하면서 떠났다. 우리 해군은 첩보기지 정리 등으로 미처 떠나지 못하고 14일까지 체류하면서 영흥도 청소년들과 같이 섬 사수를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인민군 부대에 밀려 모두 전사했다.
그들의 영혼을 달래는 전적비는 아쉽게도 40년이 지난 1992년 12월2일에야 높이 12m, 청동상조각상 2.7m의 크기로 영흥도에 건립되었다.
6용사 충혼탑 **옹진군 연평면 연평리 11-1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까지 진격하였으나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잔당들이 공비가 되어 양민을 무참히 살해하고 약탈했다. 이에 연평도 청년 30명은 공비토벌작전에 자진 참가하여 황해도 구월산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중 장희규, 김갑순, 유홍섭, 박정섭, 박광호, 박만복 등 6명이 1950년 12월 20일 적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6용사 영령에 대한 위령탑(기단높이 1.8m, 비높이 5m)을 30여년 후인 1982년 9월 8일에 연평초등학교 서쪽 산등성이에 세웠다.
연평해전 전승비 **옹진군 연평면 연평리 산16번지
북한이 북방한계선을 무효화할 목적으로 1999년 6월 7일부터 연평근해 북방한계선을 수차례 불법 침범하여 충동식 공격을 기도하였다. 이에 대해 역충돌식 밀어내기 작전을 수행하던 우리 해군이 6월 15일 적의 선제 사격을 받자 즉각 대응한 14분간의 해전이 바로 ‘연평해전’이다. 우리 해군은 이 해전에 초계함 2척, 고속정 10척이 참가하여 북한 해군함정 10척 중 어뢰정 1척 격침, 중·소형 경비정 5척을 대파시켜 한국 해전사상 유례없는 전과를 올렸다. 불굴의 투혼을 발휘한 해군장병들의 충정어린 감투정신과 빛나는 무훈을 기리고자 연평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탑신 높이 6m의 전승비를 세웠다.
충혼탑 **옹진군 덕적면 진리 산47
6·25 전쟁 당시 덕적면 출신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많이 전사했다. 이름 없이 죽어간 호국영령들의 넋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1959년 충혼탑을 세웠다가 1981년 6월 새 터전을 잡아 기단높이 1.92m, 비높이 1.8m로 다시 건립하였다.
해군14용사 충혼비 **옹진군 백령면 진촌리 35-1
1950년 3월 25일 해군 첩보대원 14명은 백령도 주둔 부대에서 해군 함정 302호 편에 승선하여 황해도 장연군 월래도(달래섬) 근방에 침투하였다.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에게 발각되어 무참하게 집단 사살 당했다.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충혼비를 건립했는데 6·25 동란 당시 공산분자들에 의해서 일부가 파괴되어 없어진 것을 수복 이후 기단높이 0.8m, 탑신높이 1.2m로 재건하였다. 파괴 당시의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비 하단부가 없어져 상단 7인의 명단만 보인다.
반공유격 전적비 **옹진군 백령면 진촌리 1184-1
1950년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1·4후퇴 당시 북한의 많은 사람들이 백령도로 피난왔다. 1951년 2월 28일에 유엔군 관할 하에 8,000여명의 반공유격대(8240부대 통키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황해도 일원의 기습작전과 백령도 수호를 펼치며 북괴군 4,000명을 사살하고 57명을 생포했다. 그 영령들을 위로하고자 기단높이 1.92m, 비높이 1.33m의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비에는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졌다.
글 _ 유동현
승리의 등불
팔미도 등대는 6·25 당시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길잡이 역할을 했다. 1950년 8월, 비밀부대 KLO(미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 대원들에게 팔미도 등대를 탈환하라는 극비명령이 하달되었다. 9월 10일 밤, 대원 25명은 북한군을 사살하고 등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닷새 동안 KLO 대원과 북한군 사이에 등대를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인천 상륙작전 D데이인 9월 15일 새벽 2시 20분 드디어 팔미도 등대에 불이 환히 밝혀졌다. 이를 신호로 7개국 연합군 261척의 함대는 인천항을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등대 옆에는 KLO 8240부대의 6·25 참전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시내에 있는 주요 현충탑
황해 마르도록 가슴에 남으리라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_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3천여 명은 축현초등학교에서 출정식을 갖고 남하해 수많은 전투에서 200여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내며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 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후세에 참다운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자유공원에 청동, 콘크리트재질로 육각연필형 참전기념비와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이 세워졌다.
수봉공원 현충탑 _ ‘나라를 지킨 영령들을 여기 모신다. 몸은 쓰러져도 넋은 나라를 놓지 않고 뜻은 겨레와 얽매이어 장하고 매운 정신 황해 마르도록 시민의 가슴에 흐르리라’. 인천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해 소중한 목숨을 바친 영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72년 4월 25일 수봉공원 정상에 세워진 것이다.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 _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본에 거주하던 애국청년 학도들이 의용군을 조직해 643명이 4차에 걸쳐 한국전쟁에 지원해 참전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에 편입되어 유엔군의 일원으로 조국전선에 참전했는데 이중 60명이 전사했고 87명은 실종됐다. 그들이 활약한 장한 뜻을 영원히 기리고 조국 땅에서 산화한 영령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1979년 10월 1일 수봉공원에 건립됐다.
인천지구 전적기념비 _ 인천지구 전적기념비는 인천상륙작전이 전쟁사에 길이 남을 사건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인천이 민족의 사활을 가름한 격전의 옛터로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역사의 현장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198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30주년을 기념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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