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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격전현장, 이제는 흔적만 남았네요
엄마와 함께 문화재 탐방 ⑥ | 계양산성 (시 기념물 제10호)
이번 호 엄마와 함께 하는 문화재 탐방에는 신채연 어린이(부평북초등학교 4)와 엄마 이정라 씨가 함께 했다.
항상 친구처럼 다정하다는 모녀의 탐방 길에는 문화유산 해설사 이성수 씨가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올 봄에는 봄 장마라고 할 정도로 비가 자주 내린다. 일찌감치 문화재 탐방할 날짜를 잡아 두었는데 마침 약속한 날 아침부터 안개가 끼고 하늘은 잔뜩 내려앉아 있더니 약속시간 무렵에는 한 두 방울씩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한껏 걱정을 하며 약속장소인 계양산 입구에 도착하니 문화유산해설사 이성수 씨와 채연이, 그리고 채연이 엄마 이정라 씨가 우산을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다. 날씨와는 정 반대로 표정은 사뭇 밝기만 하다. 이왕 나선 길이니 비가 조금 오더라도 꿋꿋하게 탐방을 진행하자는 이성수 씨의 말에 용기를 내 계양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부평의 진산 계양산
도심 속에 자리잡고 있는 터라 동네 뒷산 정도로 여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기 시작한 계양산은 그리 녹녹하게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계양산은 해발 394.9m에 지나지 않지만 삼국시대부터 부평의 진산(鎭山)으로 자리잡아오고 있는 터다. 진산이란 각 고을을 품는 가장 큰산으로 그곳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기때문에 부평도호부에서는 계양산을 주산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계양산은 인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남서줄기는 장명이고개를 지나 가정동 철마산(226.5m)으로 이어진다.
다소 가파른 산길을 오르며 이성수 씨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계양산(桂陽山)은 옛날부터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다고 해서 계수나무의 계(桂)자와 회양목의 양(陽)자를 따서 계양산으로 불렀어요”라는 이성수 씨의 설명에 채연이와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을 오르다 가장 먼저 마주 대한 것은 계양산의 생태를 한 눈에 드러나게 설명한 안내판. 오늘의 탐방이 우리시 문화재인 계양산성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지만 이왕 산에 왔으니 생태계에 대한 생각도 함께 해보자며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
삼국의 격전지 계양산성
삼국시대 이래로 계양산 일대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하천이 흘러서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좋았다. 고려시대에는 안남도호부가 설치되었고, 1413년(조선 태종13년)에는 부평도호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부평도호부청사는 현재 계양산에서 멀지 않은 부평초등학교 안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할 무렵 등산로를 약간 비켜난 곳으로 이성수 씨가 일행을 이끌었다. 그곳에 바로 계양산성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계양산성은 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주된 봉우리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를 에워싸는 형상으로 축조된 테두리식 산성이다. 성벽은 8부 능선 즈음인 표고 202m 지점에서 동남쪽으로 589m의 담을 쌓았다. 지금은 산성의 모습은 사라지고 부분부분 산성을 쌓았던 돌들만 남아서 산성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데 바로 이곳에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부평도호부 고적에는 ‘부평의 계양산 고성은 삼국시대 축조된 석성으로 주위가 1,937척이나 모두 퇴락하였다’고 적혀있다. 계양산성이 자리잡은 곳은 한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길목으로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끊임없이 벌어졌던 곳이다. 계양산성은 이때 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계양산성에 대한 설명을 듣고 몇 발자국을 더 오르니 어느덧 팔각정이 있는 산의 정상 부분에 도착했다. 이성수 씨는 이제 계양산과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때 무학대사는 능선이 100개가 있는 곳으로 정하라고 했어요. 계양산의 봉우리가 100개인 줄 알고 이곳을 도읍으로 하려다가 실제로 계양산에 올라 봉우리를 세어 보니 99개 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쉽게도 이곳에다 도읍을 정하지 않았죠. 만약 지금의 동암역 근처인 원통이 고개를 합해서 세었더라면 100개가 되었을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고개를 원통이 고개라고 부른다고도 해요”라며 재미있는 이야기로 채연이와 엄마의 흥미를 자아냈다.
임꺽정이 살았던 징맹이 고개
계산동에서 서구 공촌동으로 넘어가는 계양산 서쪽의 고개를 장명이고개 또는 징맹이고개라고도 하는데 길이가 8㎞에 이르는 인천에서 가장 길고 높은 고개다. 이 고개는 고려의 충렬왕이 매사냥을 즐겨 매를 사육하는 관청을 설치하고 좋은 매를 징발한 것에 유래하여 ‘징맹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경맹이고개’라고도 하는데 이는 충렬왕이 매사냥을 즐길 때 매를 경쟁시켜 산짐승을 잡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전해진다.
징맹이고개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예로부터 계양산 기슭과 징맹이고개에는 많은 도둑들이 우글거렸다고 하며 한때 임꺽정도 이 계양산을 소굴로 삼았다고 한다. 이 고개의 도둑들은 사납고 무섭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이 고개를 흔히 천명고개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고개를 넘어갈 길손이 1천명은 모여야 넘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이 고개는 천명이고개, 징맹이고개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설명이었다.
산 정상에 오르니 비가 오는 날인데도 빽빽한 아파트 단지들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야트막한 산봉우리가 넘겨다 보인다. 맑은 날이었다면 서쪽으로는 서해바다 건너 영종도와 강화도 등 주변 섬들이, 북쪽으로는 한강과 행주산성 그리고 일산신시가지가 건너다 보일 터였다. 김포평야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비행기도 보일 듯 싶었다.
다시 산을 내려오는 길. 올라올 때 보다 발걸음이 가볍다. 약간의 비를 맞으며 오른 산이었지만 계양산에서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우리 지역과 관련된 재미있는 옛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고생은 큰 보람이 될 듯 싶었다.
글 _ 정경애 · 사진 _ 김성환
중요 군사 거점의 증거
계양산성은 계양산(해발 395m) 중턱에 있는 삼국시대의 퇴뫼식(山頂式) 산성이다. 한강하류 초입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중요한 군사거점이었고 고려시대에 와서도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와 불과 2리밖에 있는 산성으로서 역사, 교통, 통신, 전략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1.2km이고, 성벽의 외부는 잘 다듬은 돌로 약 5m높이로 쌓아올리고, 내부는 흙으로 쌓았다.
이 지면은 초등학교 학생과 학부모의 참여로 구성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면 찾아가 보고 싶은 문화재와 가고싶은 날을 적어 편집실(우편번호 405-750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1138 인천광역시청 공보관실 <굿모닝인천> 편집팀 앞, 전화 440-2072)로 보내주십시오. 특히 강화군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참가한 학생에게는 문화상품권(1만원권 2매)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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