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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 만 리 길 푸른 물빛을 묻히고 온 작은 ‘아가씨’
5월 하순, 모란도 하루가 겨운 듯 꽃잎을 떨어뜨리는 오후. 서양 꽃처럼 생긴, 어쩌면 그 모란 잎이거나 심청이 타고 왔을 연꽃 한 송이 같은 이혜진 씨를 만난다. 비린 것을 내놓는 바다 집이어서 그럴까. 문득 푸른 물결이 속눈썹 속에서, 눈시울 속에서 출렁거린다. 꽃잎들이 일시에 바다로 떨어져 은 부스러기처럼 빛난다. 발걸음도 웃음도 손짓도 모두 물결이다. 그 옆을 우럭, 가오리가 너울너울 헤엄쳐 지나간다. 넓적한 전복도 인천 앞바다 향기를 피운다.
서른 몇 살의 황해 물이 정말 이처럼 푸를 수 있을까. 아니, 황해 물뿐이 아니다. 마음도 그냥 풍덩 뛰어들고 싶을 만큼 코발트빛이다. 그래서 몸 맡기고 있는 곳 옥호(屋號)가 대청도(大靑島)일까. 푸르러도 크게 한번 파도처럼 푸르른 섬. 물드는 가슴. 파도가 몸부림치듯 스러지는 모래사장에서 바라보는, 푸른 물이 드는 그것이 젊고 상냥한 이혜진 씨의 마음일까.
서른 몇 살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 알 수 없는 먼 데서부터 초가을처럼 덥지 않은 바람이 불어온다. 여자의 전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바람 부는 서장(西藏)의 어느 바위 언덕이나 키르기스스탄의 아편꽃이 피는 등성이, 그리고 아라비아, 여기저기 발길을 가로막는 막막한 모래사장…. 문득 그런 곳 어느 한 군데에서 만날 것 같은 어린 이방인 아가씨의 얼굴.
그렇다. 정말 이 어린 처녀 같은 어른 여자가 저 먼 만 리 서역(西域)에서 물길을 헤쳐 온 것이 아니라면 어느 별 밤, 발밑에 부스러지는 모래의 울음소리를 남긴 채 긴긴 비단길을 지나왔을지도 모른다. 낙타 발걸음처럼 타박타박, 순하디 순한 걸음을 걸어왔을 것이다. 와서는 이렇게 매일, 대청 비단 섬을 쓰다듬고 있는 꽃잎 같은 고운 파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에게서는 이런 느낌이 난다.
가슴 왼쪽에 달려 있는 이름은 이혜진. 그러나 이 이름이 본명은 아니다. 그것은 대청도, 이 집에서 손님들이 불러 주는 이름이고, 또 본인이 스스로 예뻐하는 이름일 뿐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광릉 수목원의 짙은 나무 그늘이 내려앉는 근처라면 더 잘 알 수 있는 곳. 그곳에서 태어나면서 부모가 지어 주신 이름은 이정호(李貞鎬). 내리 딸 넷을 둔 그녀의 부모들이 이번만은 제발 아들이기를 하는 바람 때문에 지은 이름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은 딸만 일곱인 7공주 집인데 제가 다섯째예요. 하지만 저는 아들 하나 낳았어요. 지금 초등학교 5학년짜리….”
그러면서 웃는다. 검은 눈동자, 머리를 뒤로 바짝 당겨 묶어 더 톡 불거진 이마, 그리고 실 주름 하나 없는 그런 맨들한 얼굴로 조금 수줍어한다. 영락없는 이국인, 먼 나라 바다 물결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숲 근처에서 태어난 것이 오히려 이렇게 낯선 바다 냄새를 내게 하는 것인지.
“남편은 운수업도 했었고…, 지금은 조그만 택배 업체에 있어요. 12년 전에 결혼했는데 그이가 이것저것 한다고 하다가 다 실패하고 지금 그거 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맞벌이하면서 빚은 이제 거의 다 갚았어요. 집도 작은 것 하나 장만했고요.”
남양주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회사에 다니다가 남편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가 1992년. 신접살림은 서울에서 시작했다. 시댁은 그 유명한 일출(日出)의 고장, 강원도 정동진. 그리고 웬만큼 나가는 부잣집이어서 떼어 받은 재산이 제법 넉넉했다. 신혼 초는 참으로 재미있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마(魔)라는 것은 꼭 그런 뒤만을 좇는 법. 남편이 동대문 시장의 의류 사업에 손을 댄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좋았다. 얼마간 돈을 벌기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슨 다단계 판매업에 뛰어들었다가 그만 그제까지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몽땅 날려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구김살 없는 웃음으로 그런 옛날이야기들을 다 지워 버리고 만다. 아마, 남편이 위로 누나만 넷이 있는 외아들에 막내로 자랐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고운 웃음의 말과 함께.
인천에 오게 된 것은 시누이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인천에서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몇 푼 남은 돈으로 구월동에 산 오징어 전문 횟집을 냈다. 부지런한 만큼 장사가 되었다. 이렇게 어설프게나마 바다를 만지며 산 햇수가 그래도 6년여. 마침내 빚도 좀 가리게 되었고 숨도 좀 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 너무 경기가 안 좋아요. 평소 손님의 절반도 안 되거든요. 정말 월급 받기가 미안할 지경예요. 얼마나 있으면 좋아질까요? 이제 대통령도 다시….”
오징어 횟집을 닫고 남의 집살이를 시작했다. 몸은 더 고달플지 몰라도 마음은 중압감이 없어 편했다. 이제 이렇게 몇 년만 더 일해서 조금 남은 빚, 마저 정리해 버리고 나면 그만둘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계획에 차질이 올지도 모르게 자꾸 불황이란다. 실업자 이야기, 경제 이야기, 요 며칠 뉴스와 비슷한 이야기를 꺼낸다. 열심히 신문을 읽는 모양이다. 전생에는 정말 이방인이었을지도 모를 이혜진 씨에게 그래서 그 불황이 누구보다도 더 걱정인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이 와서 저, 아라비아나 아니면 무슨….”
따분한 실업 이야기, 경제 이야기가 싫어 문득 이렇게 시작했더니 그 따위 엉뚱한 이야기는 못 들었다는 듯, 아니면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잠시 다른 쪽을 보고 있다가 난데없이 우럭 말린 것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린다. 인천중앙길병원 응급센터 뒤, 대청도. 이 집에서는 요리 안 한 우럭 생짜를 팔기도 하는데 그야말로 순 대청도 산으로 아주 맛있다며 환하게 흰 이로 웃는다. 구덕구덕 잘 마른 놈을 구워서 고추장에 찍어 물 만 밥과 먹으면 기가 막히고, 짭조름하게 쪄 먹는 맛 또한 어디에 이를 데가 없단다.
그뿐이 아니다. 이 집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우럭, 그 싱싱한 놈을 야채를 넣고 백숙으로 끓인 탕이 또 그렇게 시원하다는 것이다. 정말 땀 흘리면서 소주 한 잔과 이 백숙 대청도를 훌훌 마시고 나면 감기가 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나을 것 같다. 그럼, 이 여러 날 된 감기가 낫듯이 최소한 그녀를 위해서라도 아픈 경제가 빨리 기운을 차릴 수 있을까.
제복을 입고 요리를 나르고 하다 보면 언짢은 일, 뜻하지 않은 일이 종종 생기기도 한다고 한다. 명함을 건네는 짓궂은 사람, 시시하게 농담을 하는 사람, 어떤 사람들은 아예 애기 취급을 하기도 하고, 좀 나으면 적당히 미스 리, 이렇게 불러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점잖고 예의 바른 단골손님이 훨씬 더 많다고 정색을 한다. 옳은 말이다. 그렇게 이 또랑또랑한 아가씨, 아주머니는 모든 걸 잘 참아 내면서 그 검은 눈동자에 언제나 웃음을 담는다. 그래서 누구나 기분이 좋아진다.
밤 10시. 이제 대청도에 불이 꺼진다. 이혜진 씨가 2층 계단을 내려와, 뭍으로 올라온다. 남편이 와 있을 것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서른 몇 살의 이 예쁘고 상냥한 황해물이 하루 종일 출렁거리며 내던 파도 소리를 데리고 집으로 간다.
오늘밤 누구의 꿈속에는 이마가 톡 불거진 흰 양귀비꽃이 피고, 혹은 타박타박 한 마리 낙타가 걸어오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옷을 조금 적신 채, 푸른 수평선이나 멀리 바라보면서 행복 연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모란은 또 한 잎 소리 없이 떨어지는데 뒤에서 누가 아아, 아라비아, 아라비아….
글 _ 김윤식(시인) · 사진 _ 김보섭(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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