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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부릅 뜬 호랑이 포대
2005-10-01 2005년 10월호
눈 부릅 뜬 호랑이 포대
키가 커서 짝꿍이 된 안대현(신촌초 6)과 김근영(효성초 6)은 해바라기만 했다. 1학년 때 시작한 둘의 우정이, 여자친구 근영이가 전학을 가면서 흔들리나 했는데 ‘가뭄에 콩 나듯’ 한번씩 전화하게 된 것이 벌써 5년째. 대현이는 발바닥 길이 290mm, 키 166cm로 초등학생 같지 않은 몸집이 되었고, 근영이도 이에 질세라 엄마 옷이 맞지 않을 정도로 훌쩍 커버렸다. 조영란(김근영 엄마·37)씨와 김인태(47)문화유산해설사가 어깨근육을 바짝 긴장시켰다. “요 녀석들! 분명 어딘가 애티가 줄줄 흐를 거야” 둘은 보조개를 물고 웃어댔다.
인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포대
논현동의 옛 이름은 논고개(고개에 논이 있다)마을이다. 옛날 이곳 포구에서 중국으로 배가 다녔는데, 가족이 중국으로 떠날 때 배웅 나온 식구들과 ‘이것저것 의논하며 넘는 고개’란 뜻이다. 논현동에는 지난 70년대까지 드넓은 남동염전이 있었다. 대부분 이 동네 서남쪽 호구포 앞에 있던 것으로 바닷가의 개펄을 이용해 만들었다. 지금은 매립되어 공단이 조성됐다.
논현포대(論峴砲臺)는 조선말기에 만든 포대 가운데 유일하게 인천에 남아있는 포대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돼 있다. 달리 입간판조차 눈에 띄지 않아 찾는데 수월치는 않았다. 포대 주변이 외진데다 잡풀이 무성해 이곳이 문화재가 있는 곳이란 말에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논현사거리 서쪽방향으로 진입하면 논현초등학교가 나오는데 그 부근에 마을 소공원 크기로 자리하고 있다.
김인태 문화유산해설사가 사전에 조사한 자료집을 들고 두두룩하게 언덕진 포대 앞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 포대는 병인(丙寅). 신미(辛未)양요를 거치면서 경기 연안의 군비강화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가 해안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외세를 사전에 방어하기 위해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에게 명해 군사시설을 확충토록 해 1879년 축조됐지요. 축조 당시에는 지명을 따서 호구(호랑이 입 모양)포대로 명명했는데 현재는 논현포대로 바꿔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포대가 능처럼 보여요. 아래 구멍 두개도 궁금하구요.” 근영이가 포좌 구멍을 들여다보자 해설사는 “그 구멍에 청동대포와 청동중포를 놓았던 자리지요.”라고 답한다.
해안요새를 지키던 홍이포
<한국고지도>에 의하면 이때 축조된 포대로는 제물남변포대 5좌, 제물북변포대 8좌, 북송곶남변포대 5좌, 북송곶북변포대3좌, 묘도남변포대 5좌, 묘도북변포대 5좌, 연희포대(일명 용두포대)와 호구포대 2좌 등 장도(소래)3좌가 있다. 현재는 호구포대(논현포대)만 남아있다. 나머지 포대는 1930년대 매립공사와 부두 축조과정에서 모두 파괴되었다.
인근에 설치되었던 묘도포대, 제물포대 등과 함께 화도진에 소속되었다가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면서 이 논현포대도 폐쇄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포좌에는 이동식 홍이 중포 2문이 설치돼 있다.
해설사는 이곳에 왜 포가 설치되었는지 설명을 이어 갔다. “강화도조약 체결 후 정부는 경기 연안에 대한 군비강화를 기했지요. 손돌목을 위시한 풍덕, 통진, 덕진 요새의 포대와 포군을 증설하는 한편 교동도, 영종도, 월미도, 팔미도 그리고 남양 대부도에 이르기까지 방어시설을 확충했어요.”
까만 산모기들이 사람 땀 냄새를 맡고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모기가 침을 놓고 난 자리엔 살이 퉁퉁 부어 올라와 체면없이 침을 발라 비벼야했다. 역사의 아픔도 모기가 침을 놓은 작은 상처쯤이었다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역사는 발자취마다 흉터를 드러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키가 커서 짝꿍이 된 안대현(신촌초 6)과 김근영(효성초 6)은 해바라기만 했다. 1학년 때 시작한 둘의 우정이, 여자친구 근영이가 전학을 가면서 흔들리나 했는데 ‘가뭄에 콩 나듯’ 한번씩 전화하게 된 것이 벌써 5년째. 대현이는 발바닥 길이 290mm, 키 166cm로 초등학생 같지 않은 몸집이 되었고, 근영이도 이에 질세라 엄마 옷이 맞지 않을 정도로 훌쩍 커버렸다. 조영란(김근영 엄마·37)씨와 김인태(47)문화유산해설사가 어깨근육을 바짝 긴장시켰다. “요 녀석들! 분명 어딘가 애티가 줄줄 흐를 거야” 둘은 보조개를 물고 웃어댔다.
인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포대
논현동의 옛 이름은 논고개(고개에 논이 있다)마을이다. 옛날 이곳 포구에서 중국으로 배가 다녔는데, 가족이 중국으로 떠날 때 배웅 나온 식구들과 ‘이것저것 의논하며 넘는 고개’란 뜻이다. 논현동에는 지난 70년대까지 드넓은 남동염전이 있었다. 대부분 이 동네 서남쪽 호구포 앞에 있던 것으로 바닷가의 개펄을 이용해 만들었다. 지금은 매립되어 공단이 조성됐다.
논현포대(論峴砲臺)는 조선말기에 만든 포대 가운데 유일하게 인천에 남아있는 포대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돼 있다. 달리 입간판조차 눈에 띄지 않아 찾는데 수월치는 않았다. 포대 주변이 외진데다 잡풀이 무성해 이곳이 문화재가 있는 곳이란 말에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논현사거리 서쪽방향으로 진입하면 논현초등학교가 나오는데 그 부근에 마을 소공원 크기로 자리하고 있다.
김인태 문화유산해설사가 사전에 조사한 자료집을 들고 두두룩하게 언덕진 포대 앞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 포대는 병인(丙寅). 신미(辛未)양요를 거치면서 경기 연안의 군비강화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가 해안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외세를 사전에 방어하기 위해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에게 명해 군사시설을 확충토록 해 1879년 축조됐지요. 축조 당시에는 지명을 따서 호구(호랑이 입 모양)포대로 명명했는데 현재는 논현포대로 바꿔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포대가 능처럼 보여요. 아래 구멍 두개도 궁금하구요.” 근영이가 포좌 구멍을 들여다보자 해설사는 “그 구멍에 청동대포와 청동중포를 놓았던 자리지요.”라고 답한다.
해안요새를 지키던 홍이포 <한국고지도>에 의하면 이때 축조된 포대로는 제물남변포대 5좌, 제물북변포대 8좌, 북송곶남변포대 5좌, 북송곶북변포대3좌, 묘도남변포대 5좌, 묘도북변포대 5좌, 연희포대(일명 용두포대)와 호구포대 2좌 등 장도(소래)3좌가 있다. 현재는 호구포대(논현포대)만 남아있다. 나머지 포대는 1930년대 매립공사와 부두 축조과정에서 모두 파괴되었다.
인근에 설치되었던 묘도포대, 제물포대 등과 함께 화도진에 소속되었다가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면서 이 논현포대도 폐쇄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포좌에는 이동식 홍이 중포 2문이 설치돼 있다.
해설사는 이곳에 왜 포가 설치되었는지 설명을 이어 갔다. “강화도조약 체결 후 정부는 경기 연안에 대한 군비강화를 기했지요. 손돌목을 위시한 풍덕, 통진, 덕진 요새의 포대와 포군을 증설하는 한편 교동도, 영종도, 월미도, 팔미도 그리고 남양 대부도에 이르기까지 방어시설을 확충했어요.”
까만 산모기들이 사람 땀 냄새를 맡고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모기가 침을 놓고 난 자리엔 살이 퉁퉁 부어 올라와 체면없이 침을 발라 비벼야했다. 역사의 아픔도 모기가 침을 놓은 작은 상처쯤이었다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역사는 발자취마다 흉터를 드러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글 _ 조은숙 (부평사람들 기자·eyagi9090@yahoo.co.kr) / 사진 _ 김정식 (자유사진가·jsjsm@in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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