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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부근리 지석묘 (사적 제 137호)

2005-09-01 2005년 9월호
천년의 메아리…아이들의 고막 울리다

열세 살 동갑내기 서정준, 이지은, 고한솔은 성동학교에 다닌다.
성동학교는 청각장애아들이 다니는 학교로 6학년이라고 해야 고작 6명. 이대로 중·고등학교까지 함께 간다.
보청기를 달고 건청인과 대화할 때는 구화(口話)를 하지만 그들끼리는 수화(手話)를 한다.
개구쟁이 성준이, 꿈 많은 지은이, 책벌레 한솔이가 수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의 숨소리를 들으려한다.
이금주(이지은 엄마. 36)씨도 목청을 조심하며 아이들과 하나가 되는 방법을 선택했다.
선사시대 원시인들은 수화를 모른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역사의 숨결은 만질 수 있다.
천둥 같은 천년의 메아리가 고막을 울려줄 테니…


세계 인류의 귀중한 보물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할 만큼 수량 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단연 으뜸이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사람의 무덤으로 탁자처럼 생긴 탁자식, 바둑판처럼 생긴 기반식, 굄돌 없이 땅에 놓여진 개석식 3종류로 나뉘는데 고인돌은 순수우리말이고 지석묘는 일본학자들이 연구하면서 부른 것이라고 한다. 강화고인돌은 중부 지역에서 보기 드문 거대한 탁자식 지석묘로 그 모습이 웅장하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안내소에서 신진숙(51) 문화유산해설사가 일행을 맞이했다. “땡볕을 겁내지 마세요. 역사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 눈을 크게 뜨고 청동기시대로 가 봅시다.” 해설사는 용감하게 8월 복중의 이글거리는 벌판으로 나선다. 아이들도 시원한 등나무 그늘을 아쉬워하며 역사의 들판으로 따라 나섰다.
지난 2000년 11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 고인돌은 이른바 북방식(탁자식) 지석묘라고 분류되는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의 하나이다. 흙으로 바닥을 수십 층 다진 뒤 굄돌을 좌우에 세우고 한 쪽 끝에 막음돌을 세워 묘실을 만들고 시신을 넣은 다음 나머지 막음돌을 막아 무덤을 만들었다. 현재 두 끝의 막음돌은 없어진 상태이고 석실 내부가 긴 통로와 같다. 길이 7.6m 폭 5.5m나 되는 거대한 돌을 사용했으며 그 밑을 2개의 굄돌로 세워서 받쳤다. 전체의 높이는 2.6m이며 대략 남북방향으로 놓여져 있다.
“저 큰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몇 사람이 동원됐을 것 같아요? 그 당시 저 웅장한 거석을 장비없이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올렸을 텐데 짐작이 안 가죠? 저 덮개돌 무게만도 50톤이나 되는데 장정 500~600명의 노동력이 있어야 축조가 가능했다고 해요.”
“그렇다면 이 지역에 많은 사람이 살았다는 건데… 돌의 크기가 죽은 사람의 신분에 따라 다르다면서요? 그럼 권력자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은이 엄마는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아주 먼 옛날 족장을 만나고 온 듯 연신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주기 바쁘다.
“돌이 무거워 기울어졌어.” 지은이가 궁금증을 겨우 털어낸다.
“양쪽 굄돌을 여간 튼튼하게 땅에 박지 않고는 50톤 덮개돌을 지탱하기 힘들지요. 땅속에 3분의 2가 잠겼다는군요. 그 보다 더 놀라운 것은 굄돌 두개가 20도나 기울어져 받치고 있는데 2~3천년을 쓰러지지 않고 버텨온 거예요. 건축가들 말에 의하면 한번 건물이 기울기 시작하면 금방 무너지는데 원래부터 기울이지 않았나, 추측하죠. 현대과학의 힘으로도 밝힐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터에 고인돌만 달랑 있었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부족 등으로 학생들이 이곳에 오면 그냥 큰 바위구나 생각하고 위에 올라가 눕고, 뛰어내리고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 등록 후 잡풀이 무성했던 밭과 공터였던 곳을 공원으로 만들고 해마다 가을이면 강화고인돌축제를 연다.


원시인과 현대인의 만남 장소
한솔이는 사회역사시간에 고인돌을 봤다며 고인돌 만들기 체험 장소로 손을 끌었다. 굄돌, 막음돌, 덮개돌 이름을 불러가며 과정을 재현했다. 성준이는 비석치기 할 돌을 골라놓고 지은이는 팔방놀이 금 그을 뾰족한 돌을 발 사이에 감춰 놨다. “얘들아! 돌이 손바닥만 하지만 우리 무거운 척 하고 들어보자. 덮개 돌은 50톤이나 된다고 했잖아. 여엉차~” 엄마는 거짓도 용케 잘 써 먹는다.
대기의 더운 열기와 비온 뒤 땅의 습기가 마주쳐 후텁지근한 날씨다. 모자챙이 겨우 눈 밑 그늘을 만들어 준 것 외엔 중천에 뜬 해는 야박하기 그지없이 강화벌판을 내리쬔다. 쭈그리고 앉았다 일어나니 현기증이 돈다. 이마에 손을 얹고 움집으로 향했다.
해설사는 “움집은 요즘말로 하면 반지하 같은 곳이에요. 신석기시대부터 농업이 시작됐는데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선 한군데 정착해야했고 주거지가 필요했지요. 이때 음식 담을 토기가 만들어졌고 생선뼈로 긁어놓은 듯한 빗살무늬 토기가 생겨나게 된 거죠.” 볏짚으로 만든 움집 안을 들여다보며 원시인의 생활모습을 그려보았다.
고인돌 광장엔 눈으로 식별하기 힘든 진짜와 가짜가 섞여있다. 선사시대 유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모조물들이 세워진 탓이다. 고인돌 외엔 모두가 플라스틱으로 재연해 놓은 상징물이다. 특히 도로변 쪽엔 진짜 보다 더 웅장하고 크게 만들어 놓은 고인돌 모형이 있는데 이것은 고인돌 축제 때 개선문으로 사용된다. 일부 관광객들은 안쪽에 있는 진짜 고인돌을 보지도 못하고 플라스틱 가짜 돌 앞에서 사진만 찍고 간다고.
아이들는 더위와 피곤함에 탐방 내내 표정이 돌상처럼 굳어져 있더니 마지막 사진 찍기에서 모두들 시원하게 웃는다. 벌판 어디에선가 바람 한줄기가 시원하게 불어왔다. 우리가 듣지 못한 소리를 그들은 들은 것일까. 원시인들과 교감을 한 것일까. 그들의 미소에 시원한 바람개비가 돈다.
 


글 _ 조은숙 (부평사람들 기자·eyagi9090@yahoo.co.kr) / 사진 _ 김성환 (자유사진가·koin1@incheon.go.kr)
 


서구 대곡동 일대 110여기 고인돌 발견
서구 대곡동 일대에서 대규모의 지석묘(고인돌)군이 발견됐다. 현재까지 중부지역에서 발견된 지석묘군 중에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서구청의 의뢰로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문헌조사와 현장조사를 벌인 인하대박물관은 서구 대곡동 산 123의 1 가현산 북측사면 일대에서 110여기의 지석묘를 발견했다.
대곡동 지석묘군은 현재 인천시 기념물 33호로 지정돼 있으며, 이 중 7기가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지금까지 이 지역에 상당수의 지석묘가 있을 것으로 추정돼 왔으나, 체계적인 현장조사가 이뤄지긴 이번이 처음이다. 주변에서 지석묘에 쓰인 돌을 캐낸 흔적(채석흔)이나 판돌, 성혈 등을 함께 찾아내 현재 확인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지석묘가 이 일대에 분포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인하대박물관은 강화도의 경우 섬 전체에서 지석묘가 발견된 것과 달리, 대곡동 지석묘군은 좁은 지역에 많은 수의 지석묘가 발견된 것이 특징이라고 밝혔다. 가현산 주변은 낮은 구릉지와 한강하류에 펼쳐진 넓은 퇴적평원으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당시 대규모의 부족집단이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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