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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에도 역사는 흘렀다

2005-08-01 2005년 8월호

그 해 여름에도


역사는 흘렀다


김민수(대정초 1학년)는 젓가락질이 서툴고 연필 잡는 게 부자연스럽다. 공책이 구멍 날 정도로 연필에 힘을 줘 꺾어 쓰기를 한다. 아직은 언니처럼 0.5mm샤프를 욕심내지 않고 용돈으로 예쁜 스티커를 사지 않는다. 그런 일곱 살 동생은 다른 학교 운동장에 왜 왔냐고 묻는다. 언니 계령(같은학교 4학년)이는 영어를 잘해 통역사를 꿈꾼다. 우리 역사를 외국인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다부지게 말한다. 그게 아니면 첼리스트는 어떨까도 생각해 본단다. 탄산음료 병뚜껑이 퍽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여름하늘을 박차 오르는 희망이다.

옹기 종기 역사의 현장
부평초등학교 안에는 부평도호부청사와 어사대, 욕은지 등 귀중한 문화유산이 있고, 교정 한 모퉁이에 서있는 보호수 두 그루는 언뜻 보기에도 오랜 역사의 풍상을 느끼게 한다. 높이 25m 가량 되고 나이는 약 600년으로 짐작하는데, 조선 초 어느 시기에 청사 안에 심은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일행은 역사의 그늘로 모여들었다. 계령이와 민수는 아름드리 나무를 감싸안고 줄자처럼 팔을 늘리고 엄마 홍유림(39)씨도 나이테를 생각하며 동그란 줄긋기를 해 본다. 단아한 옷 매무새가 어여쁜 김용분(47) 문화유산해설사가 부평의 역사를 아이들에게 전해주었다.
도호부청사 주변은 작년 12월 쉼터가 조성돼 전통담장, 석등, 원형의자, 수목식재 등 주민들의 휴식공간이 생겼다. 이때 구는 그 동안 분산돼 있던 부평부사 공덕비 21개와 어사대 표지석 등 문화재를 도호부청사주변으로 이전해 문화재 보존은 물론 주민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공개했다.
헌데, 엄마 홍유림 씨는 한 가지 서운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도호부청사와 욕은지, 어사대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철 담장을 쳤는데 그 키가 어른의 한 배 반 정도나 되다니요. 숨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없고 얼기설기 철망사이로 눈을 갖다 대어야 빗금의 방해 없이 전체를 볼 수 있어 답답하네요. 안내표지판까지 담장 안에 들어가 설명을 읽기 힘들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보호 보다는 역사를 가두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장에 축구공이 넘어가면 도둑처럼 담을 넘어야 하고, 열쇠를 구하려면 학교 행정실로 달려가야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역사는 장식장에 잘 보관돼 사람 발길이 끊긴 습한 그늘에선 초파리들이 티끌처럼 날렸다. 역사는 본의 아니게 ‘넘어오지 마시오. 보호되고 있음’을 외친다. 심정이 불편해 보였다. 그런 불편함만 아니면, 마당 안 역사를 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어 친근할 텐데….

일제에 의해 훼손된 부평도호부청사 (富平都護府廳舍)
해설사는 미리 준비한 <부평의 지명 변천사>를 참고 인쇄물로 건냈다. 삼국시대부터 근대이후까지 인천, 부평, 강화를 비교하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번 탐방은 걷는 보폭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다. 탐방의 역사 흔적이 부평초등학교 담 모퉁이에 한데 모여 있기 때문이다.
부평은 고려 의종 4년(1150)에 안남도호부가, 고종 2년(1215)에 계양도호부가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 13년(1413)에 부평도호부가 각각 설치되었다.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부평도호부 내에는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 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내아(동헌이라는 견해도 있음) 건물은 당초 ‘ㄱ’`자형 건물이었으나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一`’자형건물로 변형되었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도리집이다.
“본래의 모양을 잘 유지해 오던 부평도호부청사가 그 모습을 잃은 것은 일본이 그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지요. 그들은 대부분의 건물은 헐어 버리고 동헌만을 초등학교 한 모퉁이로 옮겨 짓고, 학교 건물의 일부로 이를 사용했어요. 조선시대 지방 행정 조직의 심장부인 도호부 터를 학교로 만들어 식민 교육의 발판으로 삼은 일본의 침략 정치를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임금님이 손 씻은 연못
해설사는 청사 건물 앞 물이 없는 연못을 가리켰다. 욕은지(시문화재자료 제1호)는 원래 지금의 자리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고종 24년(1887)에 이전하며 보수한 것이라고 전한다.
길고 큰 돌로 가로 18m, 세로 16m 규모로 쌓은 조선시대 네모꼴의 인공연못이다. 연못 안에는 돌로 작은 동산을 만들어 각종 풀과 꽃을 심었다. 또 연못 쪽으로 돌다리를 놓았다.
정조(定祖)는 왕위에 오르자 생부인 장헌(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1년에 한 차례씩 찾았다. 특히 21년(1789)에는 먼저 할머니인 인현왕후의 묘소인 김포 장릉을 참배하고 부평, 안산을 거쳐 수원의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했다. 이때 정조는 부평에 머물며 부평 부사를 만나 활을 쏘고 이곳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고 한다. 지금은 연못 동쪽 돌 축대 가운데에 ‘욕은지(浴恩池)’라고 새겨진 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뿐, 연못의 기능은 하지 않고 있다.
계령이는 “연못 바닥이 말라있어서 언제나 가뭄 같아요. 물이 차 있으면 문화재가 더 아름다워 보여서 임금님이 다녀가실만 하구나 하고 생각이 연결 될 것 같아요. ” 한다. 연못이라는 얘기를 듣고 내심 기대를 했었나 보다.
욕은지 동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는 정조가 활을 쏘던 ‘어사대(御射臺, 시 문화재자료 제3호)’ 표지석이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을 참배하러 가던 길에 들러 활을 쏘았다고 한다. 정조는 활 쏘기를 좋아해서 수원에서도 여러 차례 활을 쏘고 신하들에게도 활을 쏘게 한 기록이 남아 있다.
어린 민수는 담장 아래서 쥐며느리 잡느라 쭈그렸던 허리를 폈다. “엄마, 난 공덕비 세는 게 좋아요. 스물 한 개예요. 숨바꼭질도 재밌구요.”
민수처럼 역사의 지식을 챙겨가지 않아도 좋다. 여름 바캉스, 빙수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유혹을 멈추지 않더라도 ‘내고장 역사의 숨결’ 그 맥박에 나침반을 얹어놓자. 멀찌감치 600년을 서있는 암·수 은행나무의 그리움을 달래주자.

글 _ 조은숙 (부평사람들 기자·eyagi9090@yahoo.co.kr)
사진 _ 김성환 (자유사진가·koin1@incheon.go.kr)


찾아가는 길 _ 인천지하철 1호선을 타고 계산역에 내린 후 계산1동사무소 방면 출구로 나와 계산1동사무소에서 50m 정도 가면 부평초등학교가 나온다. 그 안에 부평도호부청사, 욕은지, 어사대, 은행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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