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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주제는 '소풍'
어릴적 그 맛을 느낄 수 있다면
옛날 김밥 한줄 한줄엔
연로하신 어머니의 정성이 늘
가득 담겼습니다.
그러나 철부지였던 난
김밥색깔에 불만이었고
말아서 ‘툭’ 터져버린 김밥모양에
울음을 터 뜨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이 뭔지
주머니에서 쌈지돈을 꺼내시어
“니! 소풍 가서 다 사먹으래이”
지금은 그 추억의 돈이
황금보다 귀중한 어머니의 ‘사랑’이란걸
알았습니다.
터져버린 김밥의 감사함과
철부지인 울고 받은 사랑의 돈.
다시 어릴적 그 맛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김미경 (남구 주안4동)
흙투성이 김밥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의 소풍날이었다. 그 때는 엄마의 몸이 많이 좋지 않으셨고 오빠 언니들도 사회에 나가고, 또 공부하느라고 바쁘고 해서 몸이 안 좋으신 엄마를 도와 열심히 김밥을 싸서 동생과 함께 먹을 도시락에 담아 언니인 내 가방에 넣었다.
소풍 장소는 학교에서 1시간을 걸어야 있는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 가방이 무거웠지만 맛있는 김밥을 먹는다는 즐거움으로 기쁜 마음으로 메고 갔다.
드디어 점심시간! 동생과 함께 모래 위에 앉아 도시락을 열고 먹으려는 순간 동생이 가방 안의 음료수를 꺼낸다고 가방을 들어 김밥 위를 거쳐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다음 순간 김밥을 두 번째 먹는데 뭔가 씹히는데… 정말 먹을 수가 없었다. 모래가 김밥위로 솔솔솔… 정말 그림에 떡이라는 말을 이런 때 사용하는 건가. 나오는대로 욕을 했다. 동생한테. 그리고 울었다. 배가 고파서. 맛있는 김밥을 먹지 못해서 한 대 때렸다. 동생도 울었다. 아파서, 미안해서, 배고파서….
그 날 그렇게 우리 자매는 제일 좋은 소풍을 제일 슬프게 보냈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동생에게 미안하다. 욕해서, 때려서… 정말 정말 미안하다.
이상순 (서구 당하동)
비빔밥 도시락
고2 새 학기가 되고 얼마 안돼서 학교에서 봄소풍을 가게 되었다. 친구들과 나는 봄소풍에 무얼 가져갈지 한참을 고민했다. 매번 수학여행이나 소풍 때마다 싸가는 김밥에 지겨워진 우리였기에 좀더 색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 저번엔 참치 쌈을 해서 먹었고 이번엔 비빔밥으로 정했다. 주재료는 참치, 김치, 콩나물, 여러 가지 반찬, 상추, 고추장 그리고 커다란 양푼이었다.
드디어 소풍날. 전날에 잠을 뒤척이다가 새벽에 겨우 잠들었지만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이날 소풍은 독립기념관을 가는 것이었다. 모두들 신났고 들떠 있었다. 벌써부터 김밥을 꺼내서 먹는 아이들, 교복에 잔뜩 멋을 내고 온 아이들…. 유난히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우리들은 탱크 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전쟁의 흔적을 담은 이곳은 우리들의 웃음소리와 어우러져 더 이상 어둡고 고통스럽지 않았다.
한참을 웃으며 뛰어 놀다가 점심시간이 되었고 개인시간이 주어졌다. 우리는 아까 봐두었던 정자에 앉아서 싸온 점심을 꺼냈다. 큰 양푼에 밥을 넣고 참기름, 고추장, 참치, 콩나물, 김 등 여러 가지를 넣고 숟가락으로 슥~슥~ 비볐다.
“우와~ 맛있겠다!!!” 우리는 먹음직스런 비빔밥을 보며 대단히 만족해 했다. 한참을 먹고 있는데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신기한 듯 쳐다봤고 우리 중 한명이 큰 소리로 “코리안 비빔밥~!”이라고 말해서 모두들 한바탕 크게 웃기도 했다. 저쪽 편에서 김밥을 먹고 있던 친구들이 와서 비빔밥이랑 김밥을 바꿔 먹었고 푸짐한 양푼을 사진으로 찍기도 하고 싸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
분명 기억에 남을 소풍이었다.
김동숙 (서구 가좌동)
생태기행에서 배운 교훈
작년 가을 우리반은 소풍 겸 생태기행을 하러 무의도에 갔다. 엄마께서 예쁘게 싸주신 꼬마김밥과 간식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며 배를 타고 무의도에 도착하니 산과 바다가 정말 환하게 보였다. 처음으로 우리는 나무이름을 적어서 빙고게임을 했다. 생강나무, 소나무, 은행나무, 붉나무, 산초나무…. 이 게임을 하고 느낀 것은 이 나무들만큼은 자신있게 알 수 있어서 내가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집에서만 먹던 ‘생강’은 직접 보고 냄새를 맡아보니까 향이 독해서 얼른 코를 가리기도 했다. 또 ‘난’에다 수태를 넣어 화분도 만들었다. 난이 갇힌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아팠다. 식물도 생명이라고 하던데….
난 다짐했다. ‘예쁜 친구야 너를 끝까지 아끼고 잘 자랄 수 있게 지켜줄게’라고.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김밥을 먹으면서 많이 느끼고 정말 식물 하나 하나 잘 자라고 있으니까 자연은 소중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시간도 사람들이, 또 내가 숨을 쉬듯이 식물들도 항상 숨을 쉰다는 것을 명심하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꺾지 않는 은지가 될 것을 나 자신과 약속하며 좋은 추억의 소풍이 되었다고 쌩긋 웃어본다.
박은지 (구월서초등학교 4학년)
부스러진 빵
그 날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봄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선미야 옛 다.”“어? 이거 돈이네, 고맙습니다.”
어머니의 미소를 담뿍 담은 얼굴을 뒤로하고, 복사꽃이 파릇파릇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하는 논두렁길을 단숨에 달려서 읍내까지 왔다. 가방 속에는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께서 정성 들여서 싸 주신 김밥과 삶은 달걀 그리고 사이다 한 병도 들어 있었다. 게다가 호주머니 속에는 10원짜리 동전들이 내가 팔짝팔짝 뛸 때마다 장단이라도 맞추는 냥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마침 학교 근처 빵 가게를 지나게 되었다.
날마다 눈으로만 먹고 침을 삼키던 커다란 보름달 빵이 눈에 들어 왔다.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가게에 들어서서 보기에도 먹음직한 빵을 한 개 집어 들었다. 주인아주머니께 동전 10개를 내밀었더니, 빙그레 웃으시며 10원짜리 한 개를 도로 내 손에 쥐어 주셨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와서 정말 신나고 즐겁게 소풍을 갔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보물찾기를 하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아침에 산 보름달 빵은 그냥 만지작거렸을 뿐 먹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집에 계신 할머니가 자꾸 생각나서였다. 그래서 빵을 그대로 가져다가 할머니께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해가 커다란 미루나무에 걸렸을 무렵에야 나는 집으로 돌아 왔다. 텃밭으로 달려갔더니 할머니께서 시금치를 다듬고 계셨다. 할머니께서 소풍 잘 다녀왔느냐고 물으시는 것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가방을 통째로 쏟아 보름달 빵을 꺼내어 내밀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게 웬일인가?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아 버릴 것 같았던 빵이 몽땅 부스러져버린 것이 아닌가? 할머니께서 빵을 받아 드시면서 “에구, 내 강아지. 이걸 샀으면 먹지. 뭘 가지고 와. 할미 주려고 가져 왔구먼. 기특하기도 하지”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두르고 계시던 앞치마를 풀어서 흙이 묻지 않게 깔아 놓으시고는 부스러지다 못해 가루가 된 빵 봉지를 뜯어서 꽁꽁 뭉쳐서 내 입에 넣어 주셨다. 나도 빵을 꽁꽁 뭉쳐서 할머니 입에 넣어 드렸다. 할머니의 주름 진 얼굴에도, 내 얼굴에도 웃음이 묻어 나왔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다시는 빵을 사 드릴 수 없는 먼 나라로 가셨다. 지금도 나는 그 때 그 날의 봄 소풍을 잊을 수가 없다.
김선미 (남동구 만수3동)
소풍? 그래도 가야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초등학교 5학년 소풍 때 일이다. 소풍 가기 전날 들뜬 기분에 친구들과 학교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우리학교 운동장엔 타이어를 반쯤 땅에 줄지어 박아놓은 놀이기구가 있었다. 거기서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놀고 있었다.
그러다 조금 큰 타이어를 손 짚고 뛰어 넘는데 아차!!! 그 커다랗고 묵직하고 단단한 타이어에 내가 오른쪽 이마와 눈두덩이를 박은 것이다. 머리가 하얗고 세상이 노래지는 기분. 별이 번쩍번쩍했다. 진짜 아차하는 순간이었다.
욱신거리는 이마를 잡고 집에 왔다. 엄마가 멍이 들거라고 하시는 거다. `내일 소풍가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 주위로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누구한테 제대로 한방 맞은 사람처럼. 어린 나이였지만 그 몰골을 하고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소풍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일!!! 난 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만 해도 설레고 들뜨고 신나는 일이 소풍이니까!!! 그때 찍은 사진이 지금 없는게 아쉽긴 하지만….
세상의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멋진 소풍으로 좋은 추억 만들 길 바란다.
김성진 (남동구 간석동)
고지식했던 30년전 소풍날
소풍가기 전날 저녁 부엌에서 엄마는 밤과 계란을 삶아놓고 아침에는 김밥을 싸느라 분주하다. 그 옛날에는 국민학교 소풍이면 온가족이 나들이 길이었다. 그런데 소풍날 아침 국민학교 2학년짜리 여자애는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전날 선생님께서 가족들은 오지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혼자 가야 한다고 우긴다. 할 수 없이 엄마는 무언가를 하나 들려준다.
여자아이는 따라오지말라고 당부하고는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른 애들은 선생님 말도 듣지 않고 가족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닌가. 석남국민학교에서 불로목장까지 가는 동안 울고 싶었다. 나만 혼자라서… 선생님은 우리들만 가는 거라고 해놓고 엄마랑 같이 온 애들은 혼내지도 않고… 그때 그 기분이란….
선생님에 대한 원망, 내가 오지 말라고 해서 오지 않은 엄마에 대한 원망…다른 애들이 무지하게 부럽고 혼자 앉아서 도시락 먹을 생각을 하니 눈물까지 나오려고 한다.
그렇게 걸어 걸어 도착한 곳에 엄마가 보인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고모도. 너무 좋아서 펄쩍 뛸 것 같기도 하고 아침에 엄마한테 오지말라고 눈까지 흘기던 내가 너무 창피하고….
30년 전의 소풍날이었다. 고모와 엄마는 가끔 그 얘기를 하신다. 날 놀리시려고…. 그렇게 고지식한 여자애가 지금은 그만한 아들을 키우고 있다. 헌데 다행한 것은 그 아들은 그 엄마의 고지식함은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마~~ 고지식한 딸내미 키우느라 힘들었지. 사랑해!!!
박미아 (연수구 연수동)
잊지못할 유년의 사진 한장
여름과 겨울에 놀러간 일은 기억에 많지만 봄에 놀러간 일은 그리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겐 잊지 못할 과거의 한 조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때 단발머리 언니들과 빡빡 머리인 오빠 그리고 아버지 이렇게 다섯이서 꽃이 만발한 어린이대공원으로 놀러간 적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고, 우리 집 역시 그러했다. 우리집 보물 1호인 카메라를 메고 나들이를 갔다. 공원엔 벚꽃이 한창이었고 소풍온 인파로 가득했다. 아버지께 이것저것 사달라고 보챘는데 아버지는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날의 우리 가족 소풍은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가족사진만이 그날의 증거가 되어 사진첩에 남아있어 봄이 시작되는 길목에 서면 그 날의 봄나들이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께 죄송스럽고 우리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서 입가에 미소가 넘쳐흐른다.
강영숙 (부평구 삼산동)
소풍간다네
예쁜찬합에
아기자기 예쁘게 담은 도시락
굽이굽이 오르는 오솔길
옥수수밭이 하늘하늘
물결치네
山으로 가자
시원한 바람아 불어라
젊은 詩人들을 따라서
나도 山을 오른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세상이 평온하네
산새가 반겨주고
풀벌레가 합창을 하네
이 시간 귀한 시간
행복한 시간
세상 근심을 묻어두고
즐겁게 노래 부르자
김하주 (연수구 선학동)
치마입고 산으로
초등학교 5한년 때다. 봄 소풍 전날 녹색 빛의 멜빵 원피스와 하얀 블라우스를 선물 받았다. 어찌나 기뻤던지 내친김에 더 떼를 썼고 드디어 검정 구두에 머리핀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딱 맞춤이었다.
당장이라도 입고 나가 자랑하고 싶은데 하루 밤을 자야한다는게 나에게는 벌서는 것보다 더 가혹하게 느껴졌다.
소풍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산으로 가는데 무슨 치마에 구두냐며 엄마부터 셋째 오빠까지 차례로 핀잔을 줬지만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렇게 차려입고 학교로 갔다. 치마입고 나타난 사람은 나 하나... 하지만 난 기죽지 않았다. 산도 잘 올라갔고 보물도 찾아 상도 받았고, 장기도 선보였으니까.
지금도 가끔 치마입고 맨 앞에 앉아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면 그때 생각에 미소가 번진다. 아직도 치마 앞의 작은 단추가 봄 햇볕에 반짝이던 기억이 선명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소풍은 나에겐 의미있는 해프닝이었다.
장수진 (남동구 구월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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