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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강화의 낯선 여행

2014-06-02 2014년 6월호


익숙한 강화의 낯선 여행

길가의 돌멩이 하나 풀포기 한 줌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 땅.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역사 관광지다. 5천년의 흔적이 시대별로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선사시대 참성단과 고인돌부터 고려시대의 항몽(抗蒙) 유적, 조선시대 때 외세에 맞섰던 피의 현장들 그리고 분단의 역사까지 험난한 한반도의 역사 문턱은 강화도에서 시작된 게 많다. 이 땅은 한반도의 옹이 같다. 아픈 상처가 곳곳에 박혀 있는 분단 현장을 철책선 따라 버스 타고 기행한다.

글·사진 유동현 본지편집장



북녘 땅에 가장 근접해 달리는 노선버스
사람들은 강화도를 찾으면 열에 아홉은 섬의 남쪽, 기껏 올라가봐야 읍 근처의 중앙 지역을 훑고는 발걸음을 돌린다. 섬의 북쪽 길은 끊어져 있다. 바다가 한번 끊고 철조망이 또 한번 끊는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 단절일 뿐이다. 길은 끊어지지 않고 섬의 구석구석을 이어주고 다시 섬의 중심부로 돌아 나온다. 그 길 따라 강화를 강화답게 만드는 유적지와 관광지가 적지 않다. 오히려 한가함과 고즈넉함으로 섬 특유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느긋한 목가적 풍경과 예리한 긴장의 현장이 오버랩되는 묘한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이번 기행은 시골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은 마음에 아예 버스를 이용했다. 군내(郡內) 버스에 몸을 실었다. 털털털, 풀풀풀, 구불구불. 이런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이름만 생소할 뿐 군내 버스는 시내(市內) 버스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요금도 교통카드로 지불하고 안내 방송도 잘 나오며 잘 닦인 아스팔트 위를 시원스레 달린다. 게다가 정류장 표지판에는 개별 고유 ID가 적혀 있어서 휴대폰으로 버스 도착 시간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마을 사람들은 이 첨단 서비스를 이용할 일이 없다. 유치원 아이부터 팔순 할머니까지 자기 마을 앞 버스 도착 시간을 분 단위까지 정확히 꿰고 있다.
26번 군내 버스를 송해면사무소 앞에서 탔다. 이 버스는 강화종합버스터미널을 출발해 섬의 북쪽을 돌다가 다시 터미널로 되돌아가는 순환버스다. 오전 오후 각각 세 번, 하루에 여섯 차례만 운행한다. 이 버스는 당산리에서 해병대 검문소를 통과해 ‘민통선(民統線·민간인 출입통제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북녘 땅에 가장 근접해 달리는 노선버스일 것이다. 이것이 이 버스를 탄 이유다.
“읍내에 나가 장보고 오는 길이야. 목욕하고 머리하러 갈 때 그리고 동네 할멈들이랑 외식하러 갈 때도 이 버스 타고 나가.”
꿱꿱 소리 지르는 산 닭을 손에 쥐고 버스 탄 아주머니의 모습은 이제 옛날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풍물이다. 이곳 할머니들은 교통카드와 신용카드를 손에 쥐고 읍내 마트에 가서 쇼핑을 한다. 승객은 모두 8명. 얼추 봐도 60세는 넘어 뵈는 할머니들과 운전기사 옆 좌석에서 한담을 나누는 아저씨 한 명 뿐이다. 한낮 도시 버스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시골 길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 차창 밖의 풍경뿐. 지금은 농부들이 가장 바쁜 농번기다. 물을 가득 채운 논에서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다. 큰 논 작은 논 할 것이 없이 대부분 트랙터를 타고 일한다. 그 때문인지 버스는 이동 중인 트랙터들과 쉴 새 없이 도로에서 마주친다.



뭔가 봤어도 못 본 척 해야지
숭뢰리로 접어들자 오른편 창으로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길게 이어진 철조망과 경계 초소. 바다와 육지를 분리하는 높은 철책선이 끝없이 이어진다. 도로 옆으로 검문소를 알리는 표지판도 보인다. 잠시 후 버스 앞창으로 해병검문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장한 초병 두 명이 버스를 꼿꼿이 바라보고 서있다. 저 쪽 너머부터는 민통선 지역이다. 순간 자동모드로 몸이 굳는다. ‘내가 신분증을 가져 왔나?’, ‘무슨 용무로 왔냐고 하면 뭐라 말하지?’ 머리도 함께 굳어진다.
승객들을 둘러보았다.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들이다. 초병이 버스에 올라 타 검문을 할 때 눈을 감을까? 군사지역을 지날 때 ‘민간인’은 눈감은 척, 뭔가 봤어도 못 본 척, 카메라는 가방 깊숙이 넣는 것이 상책 아닐까?
버스는 ‘다행히’ 정차하지 않고 운전기사와 초병들 간 거수경례를 교환한 후 무사통과. 바리게이트를 요리조리 피한 버스는 다시 북쪽으로 내쳐 달린다. 지금 이 버스에 탄 할머니들은 모두 민통선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이 상황은 일상일 뿐이다. 그들에게 이곳 검문소는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같은 정도의 시설물로 여기는 듯하다.



모기는 오가는데 우리는 막혀 있다
버스는 이제 거의 철책선과 붙어 달린다. 착시인가. 가득 채운 논물 때문에 철책선은 마치 이 바다와 저 바다 한가운데 쳐놓은 그물망처럼 보인다. 철산리에 접어들자 멀리 야트막한 산 위에 하얀 건물이 보인다. 강화평화전망대이다. 내리기 위해 엉거주춤 서 있자 운전기사가 한마디 던진다. “오늘은 시야가 별로 안좋네요. 그래도 올라가면 볼 수 있을 거예요.”
2층 전망대에 섰다. 물길을 가운데에 놓고 남과 북이 마주하고 있다. 이건 국경(國境)이 아니라 접경(接境)이다. 헌법상 그곳은 아직 수복(收復)하지 못한 우리 땅일 뿐이다.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바다 왼편으로 예성강이 흐르고 오른편으로는 임진강과 한강이 흘러들어 서해로 내려가기 전 전망대 앞에서 소용돌이치며 합수된다. 한반도 지형에서 이렇게 한 공간에 세 개의 큰 강이 합류하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물은 그렇게 어깨 싸움을 하듯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며 매일 이곳에서 만나고 있다.
북한 땅과 가장 근접한 거리는 불과 1.8㎞. 소리라도 지르면 북녘 산에 부딪혀 메아리로 되돌아올 정도의 거리다. 하긴 두 땅이 너무 가까워 북한 쪽에서 말라리아가 발생하면 강화도 사람의 헌혈은 받아주지도 않는다고 하던데. 모기는 남북을 넘나들며 피를 나누는데 정작 피를 나눈 우리는 서로 막혀 있다.
해무로 인해 시야가 희미하다. 물길 너머의 땅에서도 한창 모내기 준비로 바쁘겠지. 옥외 전망대에 설치된 고성능 관광용 망원경에 눈을 댔다. 500원짜리 주화가 망원경 몸속으로 ‘땡그렁’하며 들어가자 희미하나마 북녘의 산하가 좀더 가깝게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가지 못한다. 절대 못 간다. 피사체만 커질 뿐 우리는 그곳으로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한다.
강화평화전망대는 얼마 전 그 이름을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로 개명했다. 제적봉(制赤峰)의 ‘제적’은 말 그대로 ‘빨갱이를 제압 한다’는 의미다. 제압과 평화가 공존할 수 있을지. 해무만큼이나 희뿌옇게 된 마음을 안고 밑으로 내려왔다. 이제 버스는 전망대를 기점으로 머리를 살짝 남서쪽으로 돌린다. 철책선은 북성리 지나면서 시야에서 멀어진다.



같은 이름의 땅, 여전히 단절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돌아간다. 26번 순환버스 노선의 반대 코스로 27번 군내버스가 시계 방향으로 운행한다. 길 건너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오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갈 수 있다. 검문소를 바로 지나 당산리에서 내렸다. 길가에 ‘고려고종사적비 입구’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바다 쪽으로 농로를 따라 10분 남짓 걸으면 커다란 철책이 길을 막는다. 이곳은 승천포다. 1232년 여름, 며칠째 그칠 줄 모르는 장맛비를 뚫고 수천 척의 배가 이 포구에 닿았다. 고려 고종은 칭기즈칸의 말발굽을 피해 10만 세대의 고려인들과 함께 개경을 떠나 강화 땅을 밟았다.
당시에는 이곳에 그럴듯한 마을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모내기를 앞둔 논들만이 철책선 앞에 펼쳐져 있다. 전쟁 전까지 이곳은 개성과 통하는 가장 가까운 나루터로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다. 뱃사람들의 안녕을 빌어주는 무당들이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당산리가 되었다. 그 옛날 포구자리 앞 언덕 아래에 고종의 도착과 대몽 항쟁을 기념하는 비석이 외롭게 서 있다. 철책 너머 건너편 이북에도 똑같은 이름 승천포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가 몽골과 단절하기 위해 넘어 온 땅, 이름이 같았던 그 두 땅은 900여 년이 지난 오늘도 또 다른 이유로 여전히 단절돼 있다.



강화도의 민통선

그 민통선(民統線)엔 민통(民痛)이 있다
민통선은 6·25 전쟁이 남겨 놓은 상흔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따라 한반도에는 군사분계선을 그어 여기로부터 동일하게 2㎞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뒀다. 중앙의 휴전선으로부터 남쪽 2㎞ 지점에는 남방한계선이 설정되어 있다. 민통선은 남방한계선 뒤쪽 5∼20㎞ 떨어진 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지역이다.
강화도는 북부지역 송해면 월곶리부터 양사면 인화리까지 민통선이 그어져 있다. 얼마 전까지 월곶리 연미정도 민통선 안에 있어 이곳을 관람하려면 해병대 초소 검문을 받아야 했으나 지금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당산리 승천포 방문도 해병대 사전 허락이 있어야 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평화전망대를 가려면 당산리 검문소를 거쳐야 한다. 모든 차량을 검문 하지는 않지만 간혹 일부 차량에 대해 검문을 하고 신분증 제시를 요구 받는다.

강화평화빌리지 송해면 숭뢰리 일대에 자리 잡은 휴식공간으로 약 5천㎥ 부지에 숙박시설 6동과 사무동, 정자, 잔디밭, 벤치 등을 갖추고 있다. 강화나들길 1코스와 18코스가 가까이에 있으며 북한지역을 맨눈으로 조망할 수 있다. 숭뢰저수지를 중심으로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평화로움을 맛볼 수 있다.(930-4333)

화문석문화관 송해면 양오리에 있는 화문석문화관에서는 전국 유일의 왕골공예품인 화문석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다. 1층 우수작품전시관에는 각종 문양의 화문석과 꽃삼합 등 소품이 전시돼 있다. 2층 문화관에서는 왕골공예 제작 과정과 장인들이 제작한 화문석 대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930-7060)

강화은암자연사박물관 화문석문화관 바로 옆에 있는 강화은암자연사박물관에 들어서면 ‘티라노사우루스’ 등 커다란 공룡들이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한때 양당초등학교 교정이었던 박물관 마당은 흡사 쥐라기 공원을 재현한 것 같다. 교실을 개조한 전시관에서는 헤라클레스투구벌레, 백올빼미 등 세계 각 국에 서식하는 희귀한 패류를 비롯해 곤충·나비류, 조류, 동물류 그리고 화석류 등을 볼 수 있다.(934-8872)

강화참전기념탑 북한군의 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평안도, 황해도, 개성 그리고 개풍군 출신들로 구성된 월남애국청년들은 유격대를 편성해 북한군에 맞서 싸웠다. 그들은 강화도 사수는 물론 적의 중추시설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지만 그들도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6·25참전유공자회, 6·25참전청소년유격대, 6·25참전청소년유격대기념사업회, 향토방위특공대, 베트남참전전우회 등 강화군 5개 보훈단체는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송해면 하도리에 강화참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26번 군내버스 주요 정류장
터미널-강화군청 앞-서문-송해삼거리-송해면사무소-숭뢰2리-당산리검문소
-평화전망대-북성교회- 생설미-양사면사무소-신봉삼거리-하점면사무소
-고인돌-송해삼거리-서문-강화군청 앞- 터미널(순환)
터미널 출발(오전 6:25 9:30 10:40 오후 1:00 3:30 7:05)
북성리 출발(오전 6:55 10:05 11:10 오후 1:30 4:00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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