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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대한 나의 헛된 몽상
2014-06-02 2014년 6월호
섬에 대한 나의 헛된 몽상
글 이세기 시인

우리는 왜 섬과 바다를 극진히 모시지 않는가.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이 치민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의 시간을 보내고 태어난 섬과 바다가 아닌가. 나의 헛된 망상이면 어떠한가. 나는 가끔 ‘황해의 정원’인 인천의 섬들을 몽상한다. 원시의 ‘숨’을 머금고 있는 섬만은 비사유화의 영역으로 내버려둘 수 없는가. 나의 이러한 심중은 고황(膏?)이 되어 버렸다.
3천400여 개의 섬을 가진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인천 앞바다에는 170여 개의 섬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바다와 섬을 홀대한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나라에 사는 축복을 새까맣게 잊고 있다. 그것은 곧 재앙이다. 우리 고장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무참히 침몰한 것도 바다를 홀대한 나라가 겪은 아픔이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바다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오직 뭍에서만 길을 찾은 탓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이 빠져있는 무기물이 되고 있다. 나는 그래도 몽상한다. 섬과 섬을 연결하는 뱃삯이 마을버스 차비와 같아야 하겠다. 꽃게, 민어, 새우의 산란 터인 모래를 파서는 절대로 안 된다.
1도(島) 1경(景)을 나는 상상한다. 소도(小島)인 자족 공동체를 꿈꾸어보자. 미술관, 영화관, 박물관, 문학관이 있으면 좋겠다. 섬 둘레에 원시의 해조음을 들을 수 있는 ‘갯팃길’을 왜 시멘트로 포장하는지, 그것은 정말 천치나 바보가 하는 짓이다. 섬마다 그 많던 은모랫벌과 해송과 개울물은 다 어디로 갔는가. 와글와글 생명이 숨 쉬는 덕적도, 문갑도, 선갑도, 못도, 울도, 백아도, 굴업도를 잇는 섬공동체가 이 땅의 보루(堡壘)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끝없는 몽상의 화수분.
우리에게 과연 혜안이 없는가. 뜻을 모으되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군집이 불가한가. 생각건대 섬의 공도화(空島化)를 피하기 위해서는 학교가 살아야겠다. 덕적군도만이라도 공립형 기숙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이 모랫벌에서 맘껏 뛰어놀고 주말에는 부모가 살고 있는 섬으로 가는 꿈을 꾸자. 섬공동체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 학교는 거대한 뿌리이자 기둥이 되어 주어야 한다.
섬을 섬답게 하자는 것이 한갓 생명주의자의 몽상이면 어떤가. 당연한 이치인데, 우리는 만인이 누려야 할 사랑을 부정한다. 이 또한 천치나 바보와 진배없다. 알고 보면 모든 섬사람들은 원래 생태주의자다. 집에 들어오는 선새미 한 마리조차도 허투루 대하거나 살생하지 않는다. 메주나 고구마나 강아지와 누룩구렁이, 갯바위의 갱조차 다 식구이기에 극진히 모신다. 나는 섬사람들의 생태적 삶에서 그물코인 벼리로 관계 맺어진 신성한 장소인 만다라(曼陀羅)를 발견한다. 우리에게 섬과 바다가 있다는 것은, 우주를 품었다는 것이고, 유무기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자, 사랑이라는 영성을 각자가 우리 안에 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위대한 사상을 가진 도시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홀대하는 바다와 섬이 보물인 까닭이다.
내 가슴에 새긴 한 구절
“한갓 미물조차 생명 가진 것을 헤치지 마라”
나는 이 말에서 대대로 섬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어머니와 어머니를 생각한다. 우리의 어머니는 모두 위대한 생태주의자. 한갓 미물조차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나는 생명에 대한 모심을 배운다. 미물조차 극진히 대접하고 응대해야 한다는 섬 범부들의 이 말에서 내 삶의 길을 구한다. 비록 궁핍하게 살 망정 남을 헤치지 말고 미물에게도 정성을 다하여 보살피라는, 마음을 키우는 ‘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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