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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드러밍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2014-07-11 2014년 7월호

그의 드러밍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글 정경숙 본지편집위원   사진 김보섭 자유사진가



계절이 여름을 향해 내달리는 한가운데, 쏟아지는 드럼소리가 들려온다. 그 역동적인 비트가 이끄는 대로 지하 계단을 내려간다. 중구 신흥동에 있는 한 작은 건물의 지하. 드럼 세트와 타악기가 즐비한 음악연습실 한가운데 한 남자가 연신 땀을 흘리며 드럼을 두드리고 있다.
바로 40여 년 넘도록 줄기차게 드럼을 연주해 온 인천 드러머 1세대 정재형(59)이다. 내년이면 환갑의 나이, 하지만 미국의 기타리스트 슬래쉬(Slash)가 새겨진 티셔츠에 질끈 묶은 긴 머리는 자유로운 로큰롤 뮤지션의 모습 그대로다. 몸집은 왜소하지만 다부진 눈빛과 탄탄한 팔에선 관록의 드러머 냄새가 난다.
축현초등학교 밴드부 시절 드러머로 음악을 시작한 정재형은 동산중학교 밴드를 거쳐, 인천의 클럽과 부평 미8군 공연장의 무대에 오르며 본격적인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70년대 당시 피끓는 인천 젊은이들의 아지트였던 신포동 ‘유니온 클럽’과 ‘Key 클럽’, ‘위스키메리 클럽’ 등이 그의 무대였다.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들과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그의 음악과 함께 생에 가장 빛나는 시절을 보냈다. ‘올림푸스’, ‘인천회관’, 당시 외국의 뱃사람들이 즐겨 찾는 그리스 바였던 ‘하버라이트(등대경양식)’에서도 그의 드럼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후 그는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사랑과 평화’ 같은 유명밴드의 세션으로 참여하며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그 긴긴 시간 음악을 놓지 않을 수 있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밴드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의 말을 인용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의 50%만 보여 주는 사람들은 아무 데서도 받아 주지 않는다. 내가 가진 능력의 150%를 발휘해야한다. 그건 지금 무엇을 하든 또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똑같다.’ 그는 과거에도 지금도 그러하듯,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드럼스틱을 놓지 않고 연습하고 또 연습할 거라고 했다.
4년 전에는 그의 음악적 열정이 꿈틀거리고 뮤지션의 꿈으로 피어난 인천에 드럼연습실을 열었다. 후배들을 이끌어 7,80년대 록음악으로 뜨거웠던 인천에 다시 음악의 불을 지피고 싶어서다. 며칠 후면 무대를 갖추고 밴드공연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연습실을 옮긴다며, 그는 활짝 웃었다.
“제 평생 드럼을 연주했고, 후회는 없습니다. 드럼의 강렬한 비트가 처음 심장을 두드렸을 때처럼, 앞으로도 음악은 내 인생의 한가운데서 버티고 있을 겁니다.” 60에 가까운 나이이지만 그는 여전히 젊음이 충만한 음악을 한다. 드러머 정재형. 그의 음악인생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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