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보기
말이 없는 산
도봉산을 오르기로 했다. 느슨해진 마음을 조이기라도 하듯, 신발 끈을 바짝 동여매고 집을 나섰다. 싸한 기온에 며칠 째나 무겁던 마음이 가뿐하고 정신이 다 번쩍 난다.
마음만 있다면 일상에서 헤어 나오는 게 그리 어렵잖은 일이련만, 여기까지 오기가 그리도 어려웠으니. 전철로 시간 반만에 회룡역에 닿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 단숨에 북한산 입구에 들어섰다. 능선 따라 얼마를 오르다보니, 눈 덮인 산야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답답하던 가슴이 확 트이는 듯 하다. 나를 반기기라도 하듯, 한 자락 바람에 나뭇가지에 앉았던 눈꽃송이들이 머리 위로 포르르 떨어진다. 오늘 산행은 동행이 있는 것도, 일정이 짜여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서두름 없이, 망중한을 즐기며 천천히 걸어간다.
산새들도 나들이를 떠났는지 사방이 고요하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만 깊은 정적을 깰 뿐이다.
산기슭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오늘따라 더 정겹다. 커졌다 작아지고 다시 커지는 그 소리는 정적에 싸여있는 산사를 깨운다. 산의 정취에 푹 젖어 드는데, 머리 위로 무언가 휙 지나친다. 까치가 쉰 소리로 외마디를 지르며 날아간다. 나도 저렇게 날고 싶었는데.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따라 포대능선을 향해 잠자코 걷는다. 겨울 산의 고요 속에 뽀드득 소리를 벗하며 모처럼 호젓함에 젖어본다.
산을 오르다 보니 마음은 어느새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다. 오랜만의 산행이어 선지. 겨우 산허리쯤에 왔는데, 벌써 숨이 차고 다리도 뻐근하다. 고개를 들어 산마루를 올려다보니 아득하다. 정상이 아니면 어떠랴. 욕심부리지 말고 가는데 까지 가 볼 일이다.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인생 길도 마찬가지. 가노라면 순탄한 길이 있는가 하면, 가파른 길, 막다른 길에 부딪칠 때도 있을 게다. 또 지름길도 만날 터이고, 때론 길을 잘못 들어 헤맬 때도 있을 것이다. 어디에고 엉덩이 한쪽 붙이고 땀을 식히며 쉬어 가고 싶은데, 둘러 봐도 마땅치 않다. 산, 바위, 나뭇가지가 다 눈으로 덮혀 있어서다. 등산로 왼편 언덕바지에 팔자 좋게 드러누운 너럭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숨 돌릴 데를 찾았나 했는데, 맨손으로는 뛰어오를 수가 없어 한 발은 바위에 걸치고 한 손으론 솔가지를 휘어잡고 가까스로 바위에 올라섰다. 세상사 역시 혼자서는 힘들고 어려워도 누군가와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간다면 한결 가볍고 수월할 것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들을 내려다본다. 크고 작은 산들이 의젓이 앉아 있고, 이 산 저 산이 손에 손을 잡고 이어져 있다. 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들은 태생이나 생김새는 다 다르지만, 서로 얼굴을 맞대거나 어깨를 기대고 서 있다. 어제는 동지였는데,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고 말만 무성한 우리네 정치 판에 비하면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들인가. 천년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산과 바위, 나무들이 저희들끼리 울창한 평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저들과 마주 앉아 무언의 대화를 나누노라니, 마음이 절로 평온해진다. 소나무, 상수리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등 하 많은 나무들 중에 나는 어떤 나무일까.
소나무처럼 향기 그윽하며 늘 푸른 나무이고 싶었는데, 어느 듯 귀밑머리엔 서리가 내리기 시작이다. 가야할 곳이 어디인줄도 모르고 무작정 걸어온 나의 길. 돌아다보니 긴 행로다. 등산은 더 높은 곳, 더 전망 좋은 데를 찾아 오르기만 하는 걸까.
대자연의 품에 안기어 그 섭리와 산의 정취에 푹 젖어 보는 것일 게다. 저 산과 나무들처럼 따스한 정을 나누며 향기롭게 살아가야 할 진데, 너, 나 없이 더 높은 것, 더 많은 걸 누리며 차지하려고만 하는 걸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불현듯 성경 구절이 떠오른다.
오래 한자리에 앉아서도 지루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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