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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건의 용동 큰 우물

2003-05-07 2003년 5월호


1930-40년대에는 인천의 미술가들 중 일본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어 눈에 띤다. 특히 김영건(金永建·1915~1976)은 인천 중구 내동출신으로 10대 나이에 일본에 유학하여 태평양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귀국,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3회 입선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답동 근처에 「선미사(線美社)」라는 간판집을 운영하였는데, 신분이 화가인지라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일거리도 많고 어느 정도 생활에 여유도 있었다. 이러한 여유로움을 기반으로 김영건은 당시 인천시장이었던 윤갑로(尹甲老)를 비롯하여 유희강, 장인식, 박응창, 우문국, 이경성 등과 함께 주도한 오소회(五素會)전에 1회전부터 꾸준히 참여하는 한편, 두 번에 걸친 개인전도 열게 된다.
김영건은 기초적 데생은 물론 오늘날 모더니즘이라는 궤적 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인상파, 야수파, 그리고 추상파적 감각의 표현 기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훌륭히 소화해 내고 있다. 그의 그림은 인물, 풍경, 정물, 그리고 펜이나 연필로 그린 풍경소묘 등이 남아 있는데, 거의 한결같이 고른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 김영건의 작품은 고향인 인천에 대한 향토색 짙은 애정과, 서민들의 생활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리고 인물이나 동물의 자태에 대한 화가 나름의 관찰에 대한 반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동인천역에서 용동 마루턱으로 이어진 골목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는 세칭 <용동 큰우물>을 그린 것이다. 청록색을 주조로 한 야수파적 기법으로 분방하게 표현한 이 그림을 보노라면 망설임 없이 붓을 희롱한 화가의 감각적 필치에 새삼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아낙네들의 분주한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한 구석이 없으며, 내용상으로도 그 시절 이 일대 도심의 중요한 식수원으로 <용동 큰우물>의 토속적 풍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마치 어린이의 그림처럼 때 묻지 않은 화면은 작가의 심성을 그대로 노정시킨 것으로 오래 보아도 지루하지 않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경모(미술평론가/인천대 미술학과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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