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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한잔에 시 한 수 그 낭만 사라지고 추억만 남아
막걸리 한잔에 시 한 수
그 낭만 사라지고 추억만 남아
‘정에 취하고 맛에 반하다.’ 인천의 오래된 선술집들엔 연탄불처럼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지역의 시인, 화가, 문인, 사진가들의 단골집, 그들은 이곳에서 세상을 얘기하고 예술을 논했다.
선술집들은 세월을 켜켜이 쌓으며 역사가 되었고 지역의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막걸리 한 순배가 돌면 이곳에선 누구나 친구가 된다.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엔 진한 사람 냄새가 녹아있다.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사진 류재형 자유사진가
신포주점
닭강정의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기는 신포국제시장 들머리를 지나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정직한 고딕체로 쓴 간판, 낮은 조명,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글귀들이 낙서처럼 벽을 도배하고 있는 정감 넘치는 선술집을 만날 수 있다. 신포주점, 이곳에서만 48년째 영업 중이다.
현재 주인장은 장경희(61) 씨다. 2대째 사장이다. 이 집은 고정 메뉴가 없다. 주인이 그때그때 시장에서 물 좋은 생선, 조개, 두부, 꽃게 등을 사다가 조림이나 무침, 구이를 해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먹음직스러운 두부는 3개 3천원, 5개 5천원이다. 막걸리 한 모금 들이켠 뒤, 뜨끈한 두부에 새빨간 김치를 척 얻어먹으면 금세 입안이 풍성해진다.
지금 주인은 장경희 씨지만 손님들은 1대 사장인 김영숙 씨를 더 많이 추억한다. 김 씨는 자존심이 세고 가게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다. 손님을 가려서 받았고, 추태를 부리거나 싸가지 없이 굴면 쫓아내기 일쑤였다. 취객이나 젊은 사람들은 출입이 쉽지 않았다. 문화예술인이나 인천에서 어깨에 힘 좀 들어갔던 사람들 중 단골이 많았다.
오랜만에 이곳에 들렀다는 이기훈(57) 씨는 “예전엔 이곳에서 한잔 하고 싶어도 어르신들의 위압에 눌려 들어올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가게에는 단골 문인, 화가, 시인들이 술값 대신 놓고 간 작품들이 소박하게 걸려있다. 화가 정순일의 ‘불심’, 옥계 오석환의 ‘게’, 최병구 시인의 ‘꽃같은 강산애’ 등. 창작의 고뇌를 안고 이 집 문턱을 간단없이 드나들었을 옛 문화예술인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1대 사장 김영숙 씨가 지병으로 몸져누우면서 현재 사장이 4년 전 가게를 이어받았다. 그도 이 집의 단골이었다. 손님들의 말 상대, 친구가 되어주는 넉넉하고 따듯한 품을 가진 사람이다.
신포집에 오면 누구나 친구가 된다. 일면식이 없던 사람들도 막 걸리 한 순배가 돌면 통성명을 하고 정을 나눈다.
신포동 대전집
1972년 문을 연 대전집. 주인장 오정희(77) 어르신은 대전에 아이들을 남겨둔 채 혈혈단신 인천에 올라와 식당, 남의집살이를 하며 모은 종잣돈으로 가게를 차렸다.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다. 아침 6시부터 장사를 시작해 혼자서 음식을 만들고 팔았다. 손맛이 좋아 내놓는 음식마다 호평을 받았다.
대전집의 인기 메뉴는 동치미와 족발, 보쌈이었다. 겨울이면 동치미 무 2~3천 개를 한꺼번에 절이고 담았다. 살얼음에 띄워진 아삭아삭한 동치미와 담백한 족발은 당시 이 집을 찾던 손님들이 즐겨 먹던 메뉴였다. 술로 쓰린 속을 확 풀어주는 동치미 국물은 별미였고, 대접시에 가득 채워져 나오는 족발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불티가 났다. 여름에는 시원한 짠지를 담아내었다. 당시만 해도 신포동 주변으로 인천시청을 비롯한 관공서와 동양석유, 현대중공업 등 주요 기관들이 몰려있어 목이 좋은 곳이었다.
대전집이 있는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매립 상가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쥐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낡은 건물이었다. 1997년 IMF 때 개·보수를 하던 중 일본식 주춧돌이 드러났고 건물의 상량식을 알리는 대들보도 나왔다. 소화 7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1932년이다.
이 집의 주인장인 오정희 어르신은 신포동 골목의 여장부였다. 정도를 벗어나거나 무례한 사람들은 가게에 발을 들여놓지를 못했다.
대전집은 독특하고 재미있는 인테리어로 손님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나름의 문화와 맛이 조화를 이룬다. 가게 벽에는 창업자인 오정희 어르신과 큰아들 가족사진과 이 집을 드나들던 문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천장은 연안부두에서 가져온 생선 궤짝을 붙여뒀다. 문화공간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신포동 다복집
대전집 바로 건너편에 있다. 영업한 지 50년 가까이 됐다. 다복집 문에는 이 집의 단골손님이었던 고 최승렬 시인의 두상을 본뜬 석고상이 걸려있다.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찾았던 집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다복집의 명물은 단연 빨간 스지탕이다. 스지는 힘줄의 일본말로 소의 사태살에 붙어 있는 힘줄을 말한다. 스지를 오랫동안 푹 삶은 다음 다시 양념을 해서 크게 자른 감자와 함께 내놓는다. 그 모양새는 약간 불투명하지만 맛이 쫀득쫀득하고 국물도 도가니탕처럼 뽀얗게 우러나 영양을 겸비한 술국으로는 그만이다. 스지탕은 처음엔 족발보다 덜 나갔지만 사람들의 소문을 타면서 이 집의 별미로 자리 잡았다. 추억의 고정식 가스불판과 황토색 테이블도 재미있는 볼거리다.
다복집을 연 창업자는 한복수 씨다. 7년 전 작고했다. 현재는 아내 이명숙(71) 씨와 맏딸이 함께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테이블 3개로 시작했지만, 장사가 잘돼 가게도 넓히고 테이블도 늘렸다. 가게는 항상 내 집처럼 푸근하고 친근하다. 다복집을 사랑했던 원로시인 최승렬은 3일에 한 번 씩 이곳에 들러 약주를 마셨고,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진, 문인, 화가들의 출입이 잦았다. 가게는 문화예술인들의 채취와 함께 신포동의 명물로 남아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찾는 공간이 되었다.
화수부두 앞 부산집
화수부두는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인천 제2의 어항이었다. 연안부두가 생기고 어시장이 들어서면서 추억의 부두가 됐지만, 70년대만 해도 연평, 백령도 근해에서 잡은 생선의 집하 부두였다. 한때는 어선들이 늘 빽빽하게 들어차 만선의 기쁨을 나누던 곳이었다. 목숨만 부지하던 화수부두가 최근 어시장이 생기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아직 예전의 영광을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어시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늘고 있다.
이 한적한 부둣가에 43년의 세월을 지켜온 허름한 선술집이 있다. 이름은 ‘부산집’. 이집 주인인 유임상(88) 어르신의 고향은 경상남도 거창이지만 간판은 부산집으로 달았다. 그 간판도 오래전 태풍에 날아가 버렸다. 할머니는 43년간 안주 없이 오직 막걸리와 소주만을 팔았다. 화수부두에 고깃배가 수도 없이 드나들던 시절엔 각지에서 온 뱃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이 가게 한가운데에는 연탄화덕이 있다. 연탄불은 일 년 내내 꺼지지 않았다. 선원들은 안주로 생선을 가져와 구워 먹었다. 화수부두가 쇠락하면서 가게도 함께 스러져갔다. 옛 단골들은 새로운 생계의 터전으로 흩어져 갔다. 지금은 동네 어르신들이 가끔 들르는 마실집이 되었다. 소금장사 할아버지, 이웃집 할아버지의 맥쩍은 기침소리만 가게를 채운다.
주인장 할머니는 소금장사 할아버지가 시킨 막걸리를 들이켜며 “지 한잔 먹고, 내 한잔 먹고 하지” 하며 씁쓸히 웃는다. 막걸리 가격은 3천원이지만 동네 손님들에겐 2천원도 받고, 1천500원도 받는다. 주는 사람 마음이다. 그래도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년의 쓸씀함을 잊고 산다. 고양이 두 마리와 간판 없는 가게, 그리고 막걸리 한잔. 화수부두의 역사는 부산집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숭의동 마산집
1965년 인천 숭의동에 문을 연 마산집. 이 집은 타일로 장식된 연탄화덕과 그날그날 목포와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가져온 싱싱한 생선을 얼음과 함께 가득 채운 저장고가 이색적이다. 이 집만의 독특한 생선 보관 방식이다. 녹은 얼음의 양만큼 그날그날 새것으로 채운다.
마산집의 현재 사장은 박인순(62) 씨다. 2대 사장이다. 94세가 된 1대 사장 송부연 어르신으로부터 7년 전 인수했다. 이 가게에도 메뉴판이 따로 없다. 고등어부터 갈치, 민어, 가리비, 피조개까지 싱싱한 생선이 당일 시가로 상 위에 오른다.
연탄화덕이 운치가 있어 이 자리만 찾는 손님도 많다. 빨갛게 올라온 연탄불에 굽는 생선 맛이 그만이다. 연탄에 구우면 생선 맛이 최상으로 유지된다. 여기에 막걸리, 소주 한잔을 더하면 감미로움이 절정에 달한다. 가게는 오랜 역사와 맛으로 정평이 나있어 유명 인사들이 자주 찾는다. 주인 박 씨는 젊은 시절 국제복장학원에서 의상디자인을 배워 23년 동안 신포시장에서 옷가게를 운영했다. 인천 토박이다. 그녀는 중구 중앙동의 일본 적산가옥을 개조해 만든 카페 ‘팟알’에서 태어나 결혼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팟알로 변한 그 일본집은 친척의 집이었다.
마산집은 인천축구전용경기장과 가까워 경기가 있는 날에는 손님이 부쩍 늘어난다. 외관은 허술하다. 그러나 한번 찾은 손님들이 꼭 다시 찾는 맛집이다.
부평 막걸리집 개코네
1호선 부평역의 한길안과병원 뒷골목에도 오래된 선술집이 있다. 17년 역사를 가진 이 집은 후덕한 주인장 때문에 단골손님이 많다.
주종은 인천 막걸리인 소성주. 찌그러진 주전자에 두 병이 들어간다. 10년 이상 사용한 주전자만 해도 십여 개가 넘는다. 이 집의 볼거리다. 안주는 1만 원에서 1만5천 원 선으로 저렴한 편이다. 녹두전, 생굴, 두부김치, 도토리묵 등. 인심 좋고 싸고 맛깔스럽다. 단골들은 이곳 막걸리가 신선해 특유의 트림이 없어 좋단다. 주인장 이수언(62) 씨는 춘천 출신이지만 99년 남편과 함께 춘천과 부평에 막걸리 집을 열었다. 춘천은 이 씨가 부평은 남편이 맡아서 했지만, 부평의 장사가 잘 안되면서 이수언 씨가 인천으로 올라왔다. 아이 넷을 떼어놓고 올라와 매일 새벽시장에서 안주 준비를 하고 다음 날 새벽까지 장사를 했다. 힘에 부쳐 서서 잠을 청할 때도 있었다. 그녀의 고된 인생은 올 초 큰 병으로 나타나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개코네 막걸리는 손님들과 동고동락하며 여기까지 왔다. 시민들은 인생의 시름과 걱정을 막걸리 한 사발에 녹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막걸리 한 사발에 서로 마음을 열고 훈훈한 정을 주고받는다. 주인장은 막걸리를 팔아 인생을 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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