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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동보다 '토지금고’라는 이름이 정겨운 동네

2016-01-05 2016년 1월호


용현동보다

'토지금고’라는 이름이 정겨운 동네


세상 어디에도 인천 같은 도시는 없습니다. 세계의 하늘 아래 긴긴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땅, 가깝고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168개의 섬. 하지만 무엇보다 인천을 빛나게 하는 건, 그 안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바로 당신입니다. 인천이라는 이름으로 너와 나 구분 없이 하나 되는, ‘우리는 인천’. 아름다운 사람들과 만나 인천의 어제와 오늘을 확인하고 내일을 그려 봅니다. 그 첫 번째로, 70년대 바다를 메워 만든 작은 인천 ‘토지금고 마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상덕 자유사진가


토지금고 마을 박물관 큐레이터는 모두 마을 주민이다. 좌로부터 박상윤(49), 김승란(67), 이민재(50), 도경남(67), 최형신(49) 씨 


용현초등학교 앞 부영주택가. 집집마다 새겨진 동그라미 무늬가 같은 건설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70년대식 양옥집이 허물어진 자리에 빌라가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다. 훗날 동네의 풍경을 그리자니 안타깝다.

바다에서 땅으로, 70년대 송도 같은 마을
“여기 사람들은 용현 5동은 몰라도 토지금고 마을이라고 하면 다들 알아요.” 남구에는 ‘토지금고’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동네가 있다. 용현 2동과 5동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이 지역 사람들끼리는 다 통한다.
마을은 원래 낮은 언덕과 바다로 이뤄져 있었다. ‘용마루’ 언덕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과수원과 별장이 있었다. 바다 가운데 있던 낙섬은 원숭이를 닮아 원도(猿島)라고 부르기도 했다. 1929년에 언덕과 바다 사이에 염전이 들어섰다가 66년에 문을 닫고, 이후 75년 ‘토지금고(현 LH 공사)’가 죽어 있던 땅을 택지로 개발했다. 오늘로 말하면 송도국제도시 같은 도시가 70년대에 이미 있던 셈이다. 반듯하게 지은 양옥집과 신식 상가건물이 들어서고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자리를 잡았다. 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왔다. 토박이보다 외지인 수가 늘면서 이 동네는 ‘작은 인천’으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번쩍번쩍한 이 신흥 주거지역에 살던 주민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1980년에 이사 왔어. 당시 이 집 가격이 1천800만 원이었으니까 꽤 비쌌지. 화장실도 수세식이고 부엌도 입식이라서 아주 편했어. 동네에 죄다 부자들만 살았지.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고, 지금은 함께 살던 이웃 가운데 한 삼분의 일이 남았나? 진작 여기서 나갔어야 부자가 됐을 텐데.” 김동주(65) 할머니는 용현 5동 용현초등학교 건너편에 있는 부영주택가에 35년째 살고 있다. 여기 눌러앉아서 부자가 가난해졌다고 말은 하지만, 정든 동네를 떠날 생각이 없다.

 
용정공원 가는 언덕 위 집에서 50년을 살아온 김학분(89), 홍순자(66) 모녀

토지금고는 살아있는 주택 박물관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집과 70년대 국민주택, 초창기 저층 아파트와 초고층 아파트가 공존한다. 2011년 세워진 ‘용현 엑슬루타워’는 당시 전국 아파트 가운데 최고층을 기록했다.

가로막힌 도로, 변화의 바람을 기다리며
나지막한 주택가 앞에는 높다란 막이 쳐져 있다. 개통한 지 47년 된 경인고속도로다. 그 너머로는 아파트 숲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용현 5동 주민자치위원회의 박상윤(49) 부위원장은 이 도로를 ‘인천의 삼팔선’이라고 말한다. “경인고속도로가 주민 간의 왕래를 막고 지역을 단절시켰어요. 이 벽을 걷어버리면 동네가 크게 발전할 거예요.” 오는 2017년 경인고속도로 인천 기점에서 서인천IC 구간에 대한 관리권이 인천시로 이관된다. 같은 해 제2외곽순환도로가 개통하고 경인고속도로 인천 구간 일반도로화 사업이 본격화되면, 두 동강이 났던 지역이 하나로 이어진다. 개발의 바람 속에 나지막이 엎드려 있는 이 동네에 변화의 물결이 일 날이 멀지 않았다.
주택가 가까운 곳에는 용정공원이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미군 저유소를 경비하는 군부대가 머물던 곳으로, 4년 전 주민을 위한 쉼터로 탈바꿈했다. 공원에는 마을 사람들이 힘 모아 꾸려가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 언덕배기 귀퉁이 집에 사는 한 모녀를 만났다. 어머니 김학분 씨는 89세, 딸 홍순자 씨는 66세. 사이좋게 나이 들어가는 이 모녀는, 옆집 담에 기대고 선 이 낡고 오래된 집에서 50여 년을 살았다. 담벼락 한편에 어젯밤 연탄을 태워 겨울을 난 흔적이 남아 있다. “살면서 손질은 했지만, 처음 지었던 그대로야. 동네 사람들 다 떠나고, 이제 우리만 남았어.” “아이고, 우리 아들딸들. 찾아줘서 고맙다 고마워.” 아는 이 하나둘 떠나보내고 덩그러니 남겨진 할머니는, 사람이 그립다. 깊게 주름진 얼굴에서 옅게 새어 나오는 미소가 쓸쓸하다.

 
마을 아이들이 새겨 놓은 희망의 메시지


동갑내기 마을 친구 김승란, 도경남(67) 할머니

서울 소녀, 인천 할머니로 나이 들다
공원 언덕으로 오르면 파란색 컨테이너 건물 두 채가 시야에 들어온다. ‘토지금고 마을박물관‘이다. “주민이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마을박물관이에요. 우리가 사는 동네의 역사를 바로 알고 소통하자는 뜻에서 지난해 10월 문을 열었어요. 여기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먼 훗날 우리 동네를 자랑스럽게 기억하면 좋겠어요.” 박물관장님으로 통하는 이민재(50) 씨는 25년 전 토지금고 시장이 있는 주택가로 시집왔다.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보따리는 조상 대대로 이곳에 터를 잡아 온 시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박물관에는 언덕과 섬이 하나로 메워지고 사람들이 모이기까지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사연은 장롱 속 낡은 앨범에서 꺼낸 빛바랜 사진 속에도 담겨 있다. “여기가 지금은 사라진 낙섬이에요. 내 손 꼭 잡은 이 사람이 함께 대성목재에 다니던 내 단짝 최 직장 딸.” 사진 속 주인공 김승란(67) 할머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애관극장 옆 고려가구점에서 사업을 하면서 서울에서 이사를 왔다. 뽀얀 얼굴의 새침데기 서울 소녀는 사진 속 어여쁜 아가씨에서 어느덧 칠순을 앞둔 할머니가 됐다. 대성목재를 다니며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키우며 인천 사람으로 늙어갔다. “용현동은 제2의 고향이에요. 정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이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정이 많아. 여기서 행복하게 살다 하늘나라 가야죠.”


동네 사랑방 주인 같은 양경분(67) 상인 회장


배백(66) 할아버지는 토지금고 시장 앞에서 22년간 구두를 닦아왔다. 원래도 유명인사이지만, 최근 마을 홍보 동영상에 출연하면서 인사를 더 받고 있다.



하나로쇼핑센터 최고 미남 이정구 약사

지나온 시간보다 더 나을 내일
언덕 아래 바다가 물결치던 동네. 먼 옛날 배를 타고 건너던 이곳을 지금은 뚜벅뚜벅 걸어서 간다. 용현 5동 미래로마트 옆에는 ‘낙섬터 원도사지’ 표석이 있다. 표석은 택지를 개발하기 전인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수영과 낚시를 즐겼으며, 조선시대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전한다. 가게 안에는 암벽이 온전히 남아 있다.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바위를 보면 이곳이 바닷가였다는 사실이 살갗으로 전해져온다. “아파트고 집이고, 이 주변에는 이런 바위가 곳곳에 있어요. 그것 때문에 공사라도 하려면 영 불편해.” 처음 보는 사람은 마냥 신기한데, 동네 사람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다.
하나로쇼핑센터에도 토지금고 마을 사람들의 굴곡진 삶이 흐른다. 1984년 처음 쇼핑센터가 문을 열을 때만 해도 미래는 장밋빛이었다. 구월동 희망쇼핑센터에 이은 인천의 두 번째 대형 쇼핑몰. 하지만 인근 버스터미널이 관교동으로 이전하고 송도유원지 개발이 주춤하면서 이곳의 시간도 멈추어버렸다. 쇼핑몰에서 하나뿐인 약국을 운영하는 이정구 약사는 동네 최고 미남으로 통한다. 하지만 반듯한 이목구비와 달리 얼굴빛이 밝지만은 않다. “상권이 완전히 죽어버렸어요. 처음에는 130여 개 점포가 있었는데 지금은 텅텅 비었지요. 나도 3, 4년 후쯤 정리할 생각이에요.” 팍팍한 현실에서도 인심은 여전히 후박하다. 극구 사양하는데도 낯선 방문객의 두 손에 따끈히 데운 피로해소제를 쥐여준다.
쇼핑센터에서 25년을 장사해 온 양경분(67) 상인회장은 늘 밝고 유쾌하다. “잘나갈 때는 한 달에 천만 원도 넘게 벌었지. 가게를 세 개 터서 옷을 팔았으니까. 지금은 먹고살 정도. 그래도 우리 가게는 여전히 사랑받아. 물건은 안 사도 커피 마시고 이야기 나누다가 가고들 하지. 여기가 우리 동네 사랑방이야.” 조 회장은 7년 전 송도국제도시로 이사 갔다가 결국 2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정을 끊지 못해서다.

한겨울의 해는 짧다. 어느덧 세상이 검기울고 드문드문하던 인적마저 뚝 끊겨 간다. 하지만 낡고 거대한 쇼핑센터 안의 사람들은 늦은 시간까지 불을 켜고 손님을 기다린다. 지나온 시간보다 더 나을 내일에 대한 믿음을 가슴에 품고. 70년대 부자 동네 토지금고 마을 사람들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


‘낙성터 원도사지’ 표석이 있는 미래로 마트. 건물 안에 남아 있는 암벽이 이곳이 바닷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올해로 서른 두 살 먹은, 인천의 두 번째 대형 쇼핑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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