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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역 사람들
끝에서 다시 시작, 삶 위안하는 종착역
세상 어디에도 인천 같은 도시는 없습니다. 세계의 하늘 아래 긴긴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땅, 가깝고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168개의 섬. 하지만 무엇보다 인천을 빛나게 하는 건, 그 안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바로 당신입니다. 인천이라는 이름으로 너와 나 구분 없이 하나 되는, ‘우리는 인천’. 아름다운 사람들과 만나 인천의 어제와 오늘을 확인하고 내일을 그려 봅니다. 그 두 번째로, 수도권에서 가장 오래된 전철 종착역인 인천역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상덕 자유사진가
경인선 시작과 끝에 다다르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경인전철 1호선에 몸을 싣고 길을 나선다. 덜컹거리는 리듬 따라 차창 밖 풍경도 느리고 수수하다. 시간을 거스른 듯한 정취, 사람들의 표정엔 여유가 흐른다. 보송보송한 1월의 눈과 함께 인천역에 내렸다. 순간 영화 ‘철도원’의 한 장면이 그려진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시골 마을 종착역, 평생 이 역을 지켜온 철도원 오토가 눈송이를 쏟아내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지난날 잃어버린 소중한 이들을 떠올리며….
인천역은 1899년 9월 18일 경인선 개통과 함께 역사가 시작됐다. 수도권에서 가장 오래된 전철 종착역. 경인선 서쪽 끝까지 달려가야 다다를 수 있다. “이번 정차역은 인천, 인천역입니다.” 역사에 울려 펴지는 안내방송은 때론 시작을, 때론 마지막을 알린다. 열차는 이 역에서 그날 첫 기적을 울리고 하루 일을 마친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인다.
내려야 할 역을 놓치고 안절부절못하는 승객들을 보듬는 곳, 종착역 인천이다. 주인 잃은 물건들이 힘없이 쓰러져 있는 모습도 종착역답다. 그들을 챙기는 건 ‘인천역 사람들’이다. 청소를 맡고 계신 분들이 덤으로 하는 역할이다. “인천역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10년 전만 해도 일하는 사람도 많고 승객들 인심도 좋았어. 물건 챙겨주면 인사하고, 청소해줘서 고맙다고 음료도 건네고. 지금은 각박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서 힘들고.” 이한희(56) 아주머니는 인천 토박이다. 10년 넘게 인천역에서 일했다. 처음에는 한 반에 스무 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한 반에 일곱 명이 2조로 움직인다. 아주머니는 일손이 모자란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수송 담당 역무원 정성연(45) 씨. 석탄을 기차에 실어 전국으로 실어 나른 지 10여 년, 그 역할이 중심에서 밀려나는 현실이 서글프다.
화물열차는 달리고 싶다
인천역은 초창기에 사람보다 화물을 주로 처리했다. 그러다 1974년 8월 15일에 수도권 전철이 개통됐다. 하루 이용객 8천여 명, 지금도 여객 수요는 그리 많지 않아 화물을 운반하며 먹고산다. 특히 인천항을 통해 들여온 석탄을 전국 각지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 기차는 인천역 플랫폼 뒤편 화물열차 노선을 따라 지금도 멀리 충북 단양과 강원도 영월까지 달려간다.
인천역 가까이에 있는 축항조차장에서 정성연(45) 씨를 만났다. 처음 경인선의 부설권을 쥔 미국은 경인선을 우각동역에서 서남쪽으로 이어, 인천역을 현재 축항조차장 인근에 지을 예정이었다. 그는 자신을 인천역 수송 담당 역무원이라고 소개했다. 이삼 년 전까지 만해도 수송원으로 불렸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일컫던 명칭이다. 스무 살 때 인천에 들어온 그는 10년 전 시커먼 탄을 묻힌 수송원이 됐다. 연안부두에서 축항과 인천역을 오가며 기차에 석탄과 쇳덩이를 실어 전국으로 보냈다. “당시에는 거의 24시간 화물열차가 왔다 갔다 했어요. 하루 왕복 20회 이상은 다녔지요. 지금은 8회 정도? 일하는 사람들도 70여 명에서 29명으로 줄었어요.”
석탄과 철강뿐 아니다. 10년 전까지 만해도 열차는 소화물을 싣고 달렸다. 기차가 시골 어머니가 부친 쌀과 각종 살림살이를 인천역 한편에 있는 창고에 쏟아내면 사람들이 몰려와 찾아가곤 했다. 지금은 도로교통이 발달하면서 화물 수송 업무가 확 줄었다. 석탄을 배달하는 일은 25톤 거대한 덤프트럭이, 소화물을 전하는 일은 택배 회사가 대신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죠. 내 일이 추억으로 잊히는 현실이 서글프지만 할 수 없잖아요. 수익을 많이 내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어요. 모두 꺼리는 더러운 벌크 화물은 도로보다 철도를 통해 이동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한때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기여했을지언정, 이제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철도의 수송 환경이 좋아지면 좋겠어요. 경쟁력이 있을지 없을지는 가봐야 알겠죠. 안 그래요?” 되묻는 그이지만, 자신 없는 듯 말끝을 흐린다.
인천역은 곁에 월미도와 차이나타운만으로도 특별하다.
소년, 역무원으로 돌아오다
인천역은 우리에게 단순히 열차가 멈추는 역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곁에 월미도와 차이나타운, 자유공원이 있기 때문이다. 경인선 열차가 이끄는 대로 서쪽 끝 세상에 닿는 순간, 일상을 넘어 여행이 시작된다. 그 옛날 월미도가 유원지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엔 너도나도 인천역행 티켓을 끊었다. 한때 앞문보다 월미도 방향으로 난 뒷문이 더 북적이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월미도에서는 놀이기구가 뱅글뱅글 돌아가고 낭만이 넘실거린다. 배고프면 차이나타운에서 짜장면 한 그릇 비우고, 좋은 이와 손잡고 걷는 것만으로도 좋다.
“어릴 때 가족과 함께 인천역에 와 월미도를 구경하고 차이나타운에서 짜장면을 먹었던 기억이 나요. 한 15년 전인가? 그때는 다들 하인천역이라고 불렀어요. 오래되고 친숙한 느낌이라 그 이름이 좋아요.” 인천 사람들은 인천역 일대를 ‘하인천’이라고 불렀다. 상인천역이라고 한 동인천역의 상대어다. 지금까지도 그리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정재형(27) 역무원은 첫 발령지로 인천역에 부임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열차가 달린 역에서 일하게 되어 기뻤단다. 인천에서 50여 년을 산 부모님도 뿌듯해하셨다. 가족과 하인천역으로 나들이 나왔던 꼬마는 이제 어엿한 청년으로 커 인천역을 지킨다.
인천역의 채상태(52) 역장. 그는 인천역을 거대한 역사(歷史)를 품은 역사(驛舍)라고 말한다.
수인선 시운전 현장에서, 장재영(43) 업무팀장. 인천역은 지금 새로운 변화 앞에 서 있다.
관제를 담당하는 홍성완(54) 팀장. 역무원들에겐 무엇보다 ‘고객 안전’이 우선이다.
변화 앞에 선, 오래된 종착역
인천역은 시골 여느 간이역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비둘기호가 다니던 시절인 1960년에 지은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예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다. 시간을 거슬러 서 있는 역사는 투박하지만 정감 있다. 광장에서 개찰구를 거쳐 플랫폼까지, 길지 않은 거리를 오르내리지 않고 나란히 걸어서 간다. 출구도 단 하나다. 수도권 전철역에서 이처럼 순수하고 소박한 역사는 없다.
로컬 관제를 담당하는 홍성완(54) 팀장은 인천역에서만 14년을 근무했다. 역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가 1998년도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단다. “하인천 쪽은 발전이 더딘 것 같아요. 인구가 줄어드니까 학교도 다 빠져나가고. 수인선을 개통하면 사람도 많이 찾아올 테고 주변 환경도 나아지겠지요.”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기적소리가 울렸다. 관제를 담당하는 역무원들은 인천역으로 오가는 모든 열차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고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역무원들에게 낡고 오래된 역은 바꿔야 할 대상이다.
인천역의 채상태(52) 역장은 1989년 처음 철도원의 길에 들어섰다. 인천역과 인연을 맺은 건 지난해 7월.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 시대를 연 상징적인 역이기 때문에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와 보니, 역사(歷史)는 거대한데 역사(驛舍)는 보잘 것 없었다.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화와 산업화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인천역은 인천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이 역에서 시작한 철도가 전국 각지의 공장을 움직이며 산업화에 기여했고, 그 역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한결같을 것 같던 인천역에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수인선이 연장 개통하면서 경인선과 환승할 수 있게 됐다. 하나였던 출구는 세 곳으로 늘었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작지만 큰 변화가 일었다. 먼저 외국어를 함께 표기한 크고 번듯한 새 역명표가 시선을 붙잡는다. 마감재와 벽을 보수한 대합실은 한결 넓고 쾌적하다. 삼발이 개찰구가 사라진 자리엔 날렵한 최신형 기계가 놓였다. 공사는 내년까지 계속된다. “인천역의 역사성을 기리기 위해 60년대 근대 건축물의 형식은 그대로 살리고, 고객 편의 중심으로 보수하였습니다. 인천역의 온전한 옛 모습을 그리워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인천역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변화였습니다.”
서쪽 끝 세상, 어머니의 품
인천역은 서쪽 세상의 끝이자 시작이다. 먼 길을 달려온 경인전철이 출발을 알리는 기적소리와 함께 다시 길을 나선다. 그렇게 열차는 쉬지 않고 한 세기 동안 우리 인생 한가운데를 달리고 달려왔다. 인천역 뒤편이 선창가일 때 우리의 어머니들은 큰 함지박에 생선을 담고 서울 노량진까지 가서 장사를 했다. 열차 안에 비린내가 진동했지만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꾸벅꾸벅 지친 몸을 뉘고 직장으로 향하고, 누군가는 책에 얼굴을 파묻고 학교로 갔다. 한편에서는 얼굴에 검댕 묻힌 이가 구슬땀을 흘리며 석탄을 전국으로 실어 날랐다. 인천역은 단순히 스쳐 지나는 역이 아니다. 아픈 역사의 상처가 스며있고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그리고 끝이지만 다시 시작하라고, 어머니의 품처럼 조용히 우리를 보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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