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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앨범-② 동산고등학교 편
민족사학에서 야구 명문으로
졸업앨범에는 학교만 있지 않다. 인천도 있다. 졸업 기념 촬영 때 학교 주변 동네의 풍광이 종종 카메라에 잡혔다. 교외(校外)에서의 포즈나 학교 밖의 행사를 담은 사진은 더없이 귀한 인천의 과거이다. 지역 내 고교 앨범을 통해 수집된 사진을 통해 인천의 6, 70년대를 반추해 본다. 그 두 번째로 동산고등학교의 앨범을 들춰 보았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재촬영 홍승훈 자유사진가
동산고등학교의 뿌리는 인천상업강습회다. 1938년 7월 율목동에 있던 ‘무덕관’을 빌려 인천상업강습회를 설립했다. 인천 10대 부호 중 한 사람이었던 이흥선을 비롯해 김윤복, 유군성 등이 사재를 털었다. 이는 조선인의 순수 재원으로 운영된 민족사학임을 뜻한다. 동산고는 이를 개교의 시발로 보기 때문에 올해 학교 문을 연 지 78년이 된다.
개교 이듬해 인천상업전수학교로 개편했지만 무술을 연마하는 도장에서 수업을 계속하는 데는 무리가 따랐다. 신축 교사를 짓는데 적당한 대지를 물색한 끝에 1941년 11월 송림동 배 밭 9천 917㎡(3천 평)을 매수해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했다. 당시 이곳 주변은 과수원, 밭 등이 있던 한적한 교외였다. 이곳이 동산고의 현 위치다.
1942년 3월 7일 무덕관에서 개교와 함께 입학한 120명 중에서 3년 과정을 마친 105명이 졸업했다. 국회 6선 의원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故 김은하 의원 등이 여기에 포함돼 있다.
1946년 동산중학교(6년제)로 교명을 변경해 운영 중 6·25 전쟁을 맞았다. 1951년 전시 중 학생과 교사를 불러들여 수업을 재개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학교는 UN군이 징발하여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인천에는 성한 건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웬만한 학교는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부득이 신흥초등학교 일부를 빌려서 전시 중 수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어린 학생들이 밀려들면서 신흥초등학교 교실을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 사동 30번지에 소재한 창고를 임대해 교실로 개축하기 시작했다. 피난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학생 수가 갑자기 늘어나는 바람에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신흥초등학교 오른쪽 높은 언덕에 소재한 동본원사 주지스님을 찾아갔다. 연합군이 철수할 때까지 사찰 내에 임시건물을 지어서 얼마간 사용할 수 있도록 선처를 구했다. 사찰 내에 3개 교실과 교무실 등을 축조하고 수업을 실시하였다. 한동안 불경소리와 책 읽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1953년 11월 15일 마침내 송림동 교사에서 UN군이 철수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청소하고 수리하는 등 학교를 재정비했다. UN군은 철수하면서 자신들이 건축한 샤워장 임시건물을 분해하여 가지고 가려 했다. 학교 측은 그것을 양도받아 그 자재를 사용해 시설물을 건축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드디어 1954년 7월 15일 가교사 목조 양철지붕 7교실을 마련하면서 오늘날 ‘동산’의 기틀을 마련했다.
황량한 부처산(1956년도 앨범)
학교 뒤편으로 부처산의 모습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돌부처 88개가 똬리를 틀고 있는 일본절이 있었다는 이유로, 혹은 산등성이가 부처 형상이라 하여 ‘부처산’ 혹은 ‘부채산’이라고 불렀다. 6·25 전쟁 후에는 피란민들이 모여 살면서 난민촌을 방불케 했다. 모르스 부호와 진공관 라디오 기술을 가르쳤던 무선학교(현 재능대)의 건물이 들어서기 전의 모습이다.
홍예문에 걸린 영화 간판(1958)
몇몇 학생들은 교정을 벗어나 추억을 담을 수 있는 장소를 고르다가 홍예문을 점찍었다. 그들은 돌문 앞에 섰다. 그 너머로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 잡혔다. 돌문 아치 위에 영화 간판이 걸려 있다. 동방극장에서 상영 중인 ‘황혼열차’라는 프로다. 당시 인천에서 이만한 영화 선전(홍보) 장소는 없는 듯하다. 당시 사람들의 왕래도 많았던 곳이다.
희귀한 항공사진(1963)
당시로서는 아주 드문 항공사진이다. 학교가 들어설 때 이 지역은 한가한 농촌 지역이었다. 동산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주위가 발전했는데 항공사진을 촬영했던 1963년 학교 주변 모습과 반세기가 지난 현재의 모습은 주택, 도로 등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언덕 위 성채 전도관(1960)
조회 시간, 학교 앞으로 산 하나가 보인다. 초가집들이 납작 엎드린 그 산 꼭대기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건물 하나가 서 있다. 흔히 ‘전도관’이라 불리는 건물이다. 당시 인천의 어느 곳에서든 볼 수 있었다. 그곳의 주인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선교사이자 의사로서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알렌은 1890년 고종황제의 땅 옆에 둥근 돔 스타일의 2층 별장을 지었다. 1907년 알렌은 미국으로 귀국했고 그 자리를 이완용의 아들 이명구가 차지했다. 1927년에는 이화여전 출신의 이순희 남매가 그곳에 흔히들 개미학원이라고 불렀던 계명학원을 세웠다. 광복 직후에는 서울 한 대학의 분교가 개교하기도 했다. 그 다음은 박태선 장로가 교주였던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가 차지했다. 그 건물을 헐어내고 수많은 신도들의 벽돌을 이고 지고 언덕을 올라 그 자리에 1957년 10월 전도관을 세웠다.
인천의 명물 밴드부(1963)
동산 밴드부는 광복 전 1944년에 이미 조직될 만큼 인천의 명물이었다. 6·25 전쟁으로 30인조 악기는 완전히 분실된 채 흔적이 없어졌다. 밴드부 학생들은 각자 소지하고 있던 악기를 가지고 와 연습하며 다시 밴드부를 조직했다. 이후 동산밴드부는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명성을 이어갔다. 인천신문이 주최한 제1회 경기도 내 초·중·고교 학생음악콩쿠르대회 입상자 발표회 모습 사진이 보인다.
안익태 선생 연주회(1961)
1961년 5월 24일 강당에서 인천시향 단원들과 함께 강당 낙성을 기념하는 연주회가 개최되었다. 주야 2회를 연주한 음악회는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Korea Fantasy와 베토벤 교향곡 5번 등이 연주되었다. 이날 안익태 선생의 지휘 하에 온 청중이 기립해서 애국가를 합창해 큰 감동을 자아냈다.
1인용 개인의자 설치한 강당(1963)
학교 직원들은 하천에서 모래를 채취하여 시멘트 벽돌을 만드느라 얼굴이 검게 그을렸고, 학생들도 벽돌을 나르는데 가끔 동원되었다. 그런 노력 끝에 1961년 4월 10일 동산의 강당이 건립되었다. 1층 좌석 800석, 2층 150석, 합계 950석의 웅장한 시설이었다. 인천에서 유일하게 1인용 철재 개인 의자를 설치한 강당이었다. 문화공간이 없던 인천에서 문학제, 연극제, 음악제 등 차원 높은 예술 행사가 끊임없이 열렸다.
필수과목 교련(1970)
70년대 교련은 고등학교의 중요한 교과목이었다. 1968년 청와대 기습사건을 비롯하여 울진·삼척 등의 무장공비사건 등 북한의 도발이 심상치 않자 1969년부터 고등학교에서 교련이 실시되었다. 남학생들은 교련수업이 있는 날 교련복을 착용하고, 카빈 소총 모형을 들고 제식훈련과 총검술을 배웠다. 여학생들은 제식훈련과 구급법을 배웠다. 매년 숭의운동장에 시내 학교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교련 실기 대회를 실시했다. 당시 남학생들은 교련복을 지금의 아웃도어 복장처럼 활용했다.
1. 이왕 졸업사진 찍는 거 늘 가고 싶었던 애관극장 앞에서 평소 아껴 입었던 외투를 입고 멋지게 포즈를 잡았다. 디즈니사에서 만든 ‘백설공주’가 상영 중이고 다음 프로는 ‘백치 아다다’이다. 그들은 졸업하면 가장 먼저 달려가고픈 곳이 극장이었으리라.(1956)
2. 지금은 폐쇄된 송도유원지에는 보트장이 있었다. 연인들은 물론 소풍 온 학생들은 오릿배를 발로 젓거나 작은 보트를 노 저어 타곤 했다. 현재 이 자리는 중고수출차 하치장으로 사용하고 있다.(1974)
3. 원통형의 하얀색 인천기상대는 자유공원의 기념 촬영 포인트였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그 원통 건물은 지난 2012년에 사라져 낡은 앨범 속에서만 볼 수 있다.(1958)
4. 6, 70년대 학생들의 취미로는 우표수집이 최고였다. 각 학교에는 특별활동으로 ‘우취반’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인천공보관에서 열린 우표 전시회 모습.(1972)
전국 최강 동산 야구
동산고등학교하면 이제 류현진(졸업 사진)이 떠오른다. 그만큼 야구와 인연이 깊다. 동산의 야구부는 1945년 9월에 창단되었다. 그동안 청룡기 3연패, 청룡기 통산 6회 우승, 전국대회 22회 우승이라는 화려한 전적을 쌓았다. 류현진 뿐만 아니라 박현식, 신인식, 최관수, 정민태, 위재영, 송지만, 송은범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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