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보기
새벽 1시, 그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새벽 1시, 그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세상 어디에도 인천 같은 도시는 없습니다. 세계의 하늘 아래 긴긴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땅, 가깝고도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168개의 섬. 하지만 무엇보다 인천을 빛나게 하는 건 그 안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
바로 당신입니다. 그 아름다운 사람들과 만나 인천의 어제와 오늘을 확인하고 내일을 그려 봅니다.
이번 호에는 햇살보다 먼저 새벽을 깨우며 부지런히 삶을 일구는 구월농산물도매시장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류창현 자유사진가
땅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식탁까지
온 세상이 잠든 듯 컴컴한 새벽길을 지나, 구월농산물도매시장에 이른다. 시장 안은 대낮처럼 환하다. 밤새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트럭에서 쏟아져 나온 농산물들이 시장 바닥에 수북이 쌓인다. 복숭아, 포도, 자두 등 여름 제철 과일은 보기만 해도 싱그럽고 탐스럽다. 경매사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새벽 공기를 가를 때마다 중도매인들의 눈짓과 손짓이 바빠진다. 구월농산물도매시장 과일동의 경매는 오전 5시 즈음 시작한다. 채소동 물건은 그보다 이른 오전 2시에 경매를 시작해 이미 제 주인을 찾아갔다.
새벽 5시, 활기 넘치는 구월농산물도매시장 과일동 경매장
1994년 1월, 인천에 전에 없던 규모의 시장이 생겨났다. 6만 872㎡ 부지에 인천 곳곳에서 유사 도매업을 하던 상인들이 모여 새 터를 꾸렸다. 구월농산물도매시장은 채소와 과일 등 농산물의 유통구조를 개선하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공정하게 보호하기 위해 문을 연, 인천 최초의 도매시장이다. 2001년 5월 부평에 삼산농산물도매시장이 개장할 때까지, 인천에서 유일했다.
구월농산물도매시장 발전협의회 이광우 회장
‘좋은 상품을 정당한 가격에 거래한다’는 사명감으로 50여 년 한 길을 걸어왔다.
구월농산물도매시장 발전협의회의 이광우(70) 회장이 당시 일을 떠올린다. 충청남도 당진에서 올라온 그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숭의시장에서 청과 도매업에 뛰어들었다. “구월농산물도매시장이 생기면서 인천 곳곳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한데 모였어. 함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안타까워들 했지. 우리는 고유 번호를 당당히 부여받은 중도매인들이잖아. 좋은 상품을 정당한 가격에 거래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이 컸어.”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그가 50여 년 한길을 걸으면서 늘 가슴에 품고 사는 신념이다. “인천시민에게 최고로 좋은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워.” 그의 화통한 웃음소리가 활기 넘치는 시장에 울러 퍼진다.
경매사 출신의 강관석 사장
한때, 시장 모든 사람들이 그의 손과 입에 집중했다
모두의 눈빛 모이던, 경매사의 손
경매가 한창인 과일동 한복판에서 강관석(66) 씨를 만났다. 경매사였던 그는, 현재 시장 내 공인된 네 도매 법인 가운데 한 곳에서 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70년대 초부터 경매 일을 해 구월농산물도매시장이 문을 열면서 이곳으로 왔다. 당시 경매 형태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디지털 방식이 아닌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하는 수지식이었다. 확성기도 없이 생 목소리를 내질러야 했다. 시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손과 입에 집중했다.
“새벽시장은 전쟁터야. 사람은 많지 시간은 한정적이지, 경매 시간은 닥쳐오는 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힘들 때도 많았어. 심지어 시간에 쫓겨 바지에 볼일을 본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몸이 고되어도 시세가 잘 나오고 물건이 잘 빠지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어.”
경매사는 생산자와 중도매인을 잇는 저울 같은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물건의 품질을 파악하고 빠르게 시세를 예측해야 한다. 그 길을 걸어온 자신이 자랑스럽다. 게다가 건강한 땀방울이 스민 손으로, 딸을 유학파 사진작가로 아들을 공무원으로 훌륭히 키워내지 않았던가. 낙찰가가 쉴 새 없이 번쩍이는 최신식 전광판 앞에서 머리 희끗한 옛 경매사가 환하게 웃음 짓는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고… 무거운 짐 속에 파묻혀 사는 하역원들.
취재 당시 8톤 트럭에서 수박을 내리는 데,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구월에서 남촌으로, 장밋빛 미래 꿈꾸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물건이에요. 오늘도 좋은 물건이 많이 들어왔네요.”
도매시장의 중심에는 중도매인들이 있다. 시장 골목을 빼곡히 메운 색색의 벌판은, 그들이 이른 새벽부터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인 대가다. 새벽빛이 부옇게 밝아올 때쯤, 경매를 마친 중도매인들이 분주함을 털어내고 다시 하루를 준비한다.
임재완 중도매인
잘 나가는 대기업에 다녔지만, 시장 안에서 그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임재완(53) 중도매인은 과일 도매업을 하던 장인의 권유로 1995년에 가게 문을 열었다. 모두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다녔지만 체질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시장 안에서 그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세상에 눈먼 돈, 눈먼 대가는 없습니다. 땀 흘린 만큼 결과가 정직하게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묵묵히 일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노력한 만큼 거두는 호시절이었다. 그러다 2004년에 삼산농산물도매시장이 문을 열면서 거래처가 옮겨가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지금 구월농산물도매시장은 좁고 환경이 열악하지만, 2019년이면 더 넓고 쾌적한 곳으로 이전하잖아요. 괜찮아요. 몇 년만 기다리면 사정이 훨씬 좋아질 거예요.” 한눈팔지 않고 한길을 부지런히 달려온 그에게, 앞날은 언제나 희망적이다.
구월농산물도매시장은 지금 새날을 기다리고 있다. 22년의 세월을 입은 시장은 시설이 낡고 주차공간이 부족해 이용객은 물론 중도매인들도 큰 불편을 겪고 있다. 하지만 오는 2019년 시장이 남촌동으로 이전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구월농축산물도매시장 관리사무소의 김범래(56) 소장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한다. “남촌동 부지는 17만 3천 186㎡으로 현재의 시장보다 약 2.8배 정도 규모가 큽니다. 시장이 그곳에 터를 내리면, 중도매인과 시민이 쾌적한 환경에서 질 좋은 농산물을 안정적인 가격으로 더 활발히 거래할 수 있습니다.”
구월농축산물도매시장 관리사무소 김범래 소장
남촌동 시장 이전까지 3년이 남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시장이 이전하기까지는 아직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새 시장을 성공적으로 열기 위해선 준비과정이 필요합니다. 일단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이에 김 소장은 상인대학을 운영하고, 힐링콘서트를 열고, 중도매인 평가 시스템을 도입해 운영하는 등 시장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달부터는 주차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차량 2부제를 운영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시민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비자가 찾는 시장이 됩니다.”
친절 중도매인으로 선정된 정만길 중도매인
그 사람 좋은 웃음에 반하면, 누구든 그의 가게를 다시 찾지 않을 수 없다.
시장 한복판, 사람과 사람 사이
2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시장은 나이 들었지만 사람들은 젊어졌다. 예전에는 6, 70대 중도매인이 많았다면 지금은 3, 40대가 주축을 이룬다.
정만길(36) 중도매인은 8년 전 구월농축산물도매시장에 발을 담갔다.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성공하기 위해 거친 시장 밑바닥에서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렇게 4년 후에 내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은 힘들지 않고 즐거웠다. “활기차고 사람냄새 나서 이곳이 좋아요. 어리다고 챙겨 주시고 실수해도 넘어가 주시고, 자리 잡기까지 선배님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손님들도 가족 같아요. 한번 오신 분들은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와주세요.” 그는 최근 친절 중도매인이라는 자랑스러운 타이틀을 얻었다. 그 사람 좋은 웃음에 반하면, 누구든 그의 가게를 다시 찾지 않을 수 없다.
박영희 중도매인
남보다 부지런히 삶을 일구는 속에서도, 그는 이웃을 먼저 생각한다.
박영희(69) 중도매인은 30여 년 전 부평 깡시장에서부터 장사를 했다. 그늘막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물건을 팔았는데, 이곳은 천국이었다. 평생 낮과 밤이 바뀐 삶을 살았지만, 아직 힘든 기억은 없다. “얼마나 뿌듯해요. 식재료를 내 손 거쳐 구치소에도 보내고, 20년 이상 아이들 학교 급식에 납품하기도 했어요.” 그는 구월농산물도매시장, 아니 전국에서 유일한 여자 조합장이다. 그만큼 화통하고 품이 넓다. 제 몸 건사하기도 힘들 텐데 새벽 경매 후 남은 폐지를 모아 불우이웃을 돕고 있다. 지난해에는 사회복지시설에 쌀 1톤을 기부했다. “아직 힘이 있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남은 생 봉사하다 가는 거지, 딴 거 없어요. 도울 일 있으면 무조건 돕는 거야.”
북적이는 시장 한복판에 서면, ‘내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모두 잠든 한밤중에 일어나 묵묵히 자신들의 삶터로 향하는 사람들. 전국에서 온 농산물을 시장 골목에 차곡차곡 쌓고, 좋은 물건을 골라 가판에 그득 채우고, 바쁜 와중에도 이웃에게 어제의 안부를 물으며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넨다. 새벽시장을 가르는 찬 공기에는 36.5도의 온기가 스며있다. 구월농산물도매시장 사람들, 그들이 있기에 오늘도 삼시 세끼 마음까지 든든히 채울 수 있어, 감사하다.
농산물도매시장, 구월에서 남촌으로
구월농산물도매시장이 오는 2019년 남동구 구월동에서 남촌동으로 자리를 옮긴다. 현 시장의 노후화에 따른 것으로 새로운 유통환경에 걸맞는 최신식 도매시장이 기대된다. 새 시장은 남촌동 177의 1 일원 17만 3천㎡에 3천60억 원을 투입해 조성하며, 중도매인 점포와 각종 편의시설, 물류·전처리시설 등이 들어선다. 현재 건축 허가 및 실시설계를 인가받았으며, 향후 2018년 2월까지 토지 및 건물 등의 보상협의를 마치고, 2018년 3월에 착공 2019년 8월에 준공 및 이전할 계획이다. 한편 구월동에 있는 현 시장은 대규모 쇼핑·문화 복합단지로 탈바꿈한다.
구월농축산물도매시장 관리사무소 440-6970
- 첨부파일
-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