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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開城에서 송도松島 까지 110년의 역사

2016-10-07 2016년 10월호


개성開城에서 송도松島 까지 110년의 역사

졸업앨범에는 학교만 있지 않다. ‘인천’도 있다. 졸업기념 사진촬영 때 학교 주변 동네의 풍광이 종종 카메라에 잡혔다. 교외(校外)에서
잡은 포즈나 학교 밖의 행사를 담은 사진은 더없이 귀한 인천의 과거이다. 지역 내 고교 앨범을 통해 수집된 사진을 통해 인천의
6, 70년대를 반추해 본다. 그 열 번째로 송도고등학교의 앨범을 들춰 보았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재촬영 홍승훈 자유사진가



“올해 10월 3일이 우리학교 개교 110주년입니다” 오성삼 교장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연이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고 이번 10월호에 송도고를 게재하기로 계획하고 옥련동에 자리 잡은 학교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날’을 전해들었다. 제대로 ‘날’을 맞힌 것이다. 송도고의 낡은 학교 앨범이 그 어느 때보다 귀하게 다가 왔다.  
송도고의 토대가 된 학교는 ‘한영서원’이다. 대한의 ‘한(韓)’과 영재의 ‘영(英)’을 합한 이름이다. 1906년 10월 3일 개성 송악산 기슭 산지현 마루턱에 터를 잡았다. 설립자 윤치호 선생은 단군이 이 땅의 하늘을 연 ‘그 날’을 의도적으로 잡아 학교 문을 열었다. 초가로 된 뜸집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이란 커다란 현판을 달았다. 개성  명물인 인삼을 재배하던 장옥을 교실로 사용했다.
개원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08년 9월 지하 1층, 지상 3층의 현대식 석조 건물을 신축하였다. 당시 보기 힘든 보일러 시설과 스팀시설을 갖춘 교사로, 학생들이 겨울에도 훈훈한 교실에서 오로지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목축, 과수재배 등의 실습장까지 갖춰 공부하면서 실습장에서 실습을 통해 학비를 충당할 수 있게 했다. 이른바 ‘반공생(半工生)제도’를 도입하여 본격적인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윤치호 선생은 일제에 투옥되었다. 부득이 외국인 선교사를 교장으로 모셔야 했다. 이런 와중에 1917년 조선총독부는 한영서원의 교명을 송도고등보통학교로 변경하게 했다. 광복 후 남북이 분단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가 속한 개성은 남한지역이었다. 그런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6·25 전쟁으로 개성은 공산치하의 붉은 땅이 되었다. 한때 개성이 수복됨에 따라 1950년 10월 9일에 다시 개교했지만 개성지구 후퇴로 인하여 학생과 교사가 뿔뿔이 흩어졌다. 결국 1950년 12월 13일 학교를 남겨 둔 채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남쪽으로 내려와 재개교를 어디서 하느냐는 문제로 고심을 하였다. 인천, 영등포, 수원 등이 물망에 올랐다. 경기지구와 강화도에 흩어져 있는 개성과 연백의 피난 학생들을 고려하여 인천에서 다시 문을 열기로 했다.
1952년 4월 5일, 자유공원 밑에 있는 교육구청사(현 인천시 남부교육청)에 임시 교사를 마련했다. 송학동 가교사에 남녀 피란학생 500 여 명이 모였다. 교실은 너무 비좁았다. 그때 일본 사찰재단이 소유하고 있던 답동의 적산사찰 ‘서본원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피란민이 살고 있었다. 군 첩보대 H.I.D가 사용하던 건물의 일부와 절간을 합쳐 새 학교 터를 그곳에 마련했다. 1953년 11월 9일 드디어 송학동의 교육구청사 내의 가교사를 교육청에 반환하고 답동으로 이전했다.
1983년 송도고는 중학교와 완전히 분리한 후 옥련동에서 새로운 출발을 한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송도’로 불리던 지역이다. 이로 인해 혹자는 “송도고가 송도로 제대로 갔다”고 얘기한다. 북한 개성부터 이어 온 송도고의 유구한 역사를 안다면 이런 혼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송도고의 ‘송도(松都)’는 옥련동의 ‘송도(松島)’와 다르다. 교정을 돌아보다 운동장 한쪽에 세워진 흉상과 마주했다. 송도고 출신의 윤영하 소령 상(像)이다. 교장실 벽면에 ‘연평해전’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각 학교 게재 월호
1월호 인천여상
2월호 동산고
3월호 인성여고
4월호 인천기계공고
5월호 중앙여상
6월호 인천대건고
7월호 인천해양과학고
8월호 재능고
9월호 박문여고




시립도서관 한옥 정문(64년도 앨범)
인천시립도서관은 1922년 지금의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자리(옛 세창양행 사택)에서 개관했다. 1941년 신흥동에 있던 옛 인천지방법원 청사를 수리해 이전한 데 이어 1946년 일본인 정미업자의 별장 자리였던 율목동으로 옮겼다. 사진은 ‘인천시립도서관’의 현판이 달린 한옥 정문의 모습이다. 시립도서관은 2009년 남동구 구월동에 터를 마련해 ‘미추홀도서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운동장 옆 도원극장(64년도 앨범)
송도고는 신흥동 시절 학교 운동장이 협소해 숭의공설운동장을 빌려 교내 체육대회를 진행했다. 언덕 위 전도관과 도원극장이 눈에 들어온다. 도원극장은 1957년에서 59년 사이에 개관한, 변두리 3류 극장이었다. 1966년 12월 13일  영사실 천장에서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나 극장 건물이 불타기도 했다. 1979년 극장 폐관 후 한동안 카바레, 나이트의 도원회관으로 운영되었다.



맥아더처럼 ‘상륙’(65년도 앨범)
맥아더 동상은 1957년 9월 15일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세워졌다. 당초 이 제막식에는 맥아더 장군이 가족들과 함께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상, 미국 정치 분위기상 등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한 대한민국 최고위급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동상 옆에 상륙 장면의 부조상도 함께 건립되었다. 인천 상륙이 아니라 필리핀 상륙 사진을 참고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동상과 부조상 바로 앞까지 접근이 가능했다. 관람객들이 맥아더의 손등을 만져 그곳만 반질반질했다.   




미군 클럽 앞에서 찰칵(66년도 앨범)
6·25 전쟁 후 중구 하버파크호텔 앞쪽 해안을 끼고 미군부대가 줄지어 있었다. 길 건너 중앙동 주변에는 미군 관련 가게와 그들을 상대하는 여자들이 적지 않았다. 창고를 개조해서 클럽과 술집을 만들었다. 카네기홀, 유니버살, 인터내셔널클럽, 휄리비타운, 위스키메리, 다리야, 키클럽, 에이후레임, 아리곤부룸, 세븐구락부, 시멘스클럽, 럭키클럽…. 인천에 있던 클럽들이다. 학생들이 중앙동 키클럽과 위스키 메리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 클럽은 현재도 영업 중이다. 



싸우며 건설하자(69년도 앨범)
1968년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무장공비 규탄대회의 모습이다. 그해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가 서울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1·21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공비(共匪)’는 무장한 공산 게릴라들을 뜻하는 말로 1980년 대까지는 매우 익숙한 단어였다. 스탠드 상단에 붙은 ‘싸우며 건설하자’ 현판은 지금도 유효한 듯하다.



나라 위한 결핵 예방(69년도 앨범)
결핵은 후진국병이다. 6, 70년대 결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경제와 환경이 좋아지면서 우리나라 질병 순위에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현재 OECD 국가 중 우리나라가 결핵 발병률 1위이다. 답동 육교에 결핵 예방 현판이 걸려 있다. ‘나를 위한’이 아니라  ‘나라 위한’ 결핵 예방이란 표어에 눈길이 간다.   

 
‘농구’ 하면 송도, ‘송도’ 하면 농구다. 유희형, 김동광, 이충희, 강동희, 정덕화, 김승현… 한 시대를 풍미한 우리나라 농구계의 ‘지존’들이다. 농구부 창단의 계기는 1931년 당시 졸업반이던 김정배가 서울 황성기독청년회(현 YMCA)에서 농구를 정식으로 배워오면서 였다고 한다. 그에 앞서 1928년도부터 이미 교내 농구대회가 열릴 만큼 학생들 사이에서는 일반화된 스포츠였다. 1952년 인천에 재개교한 후 좁은 운동장 때문에 농구는 교기로 적극 육성되기 시작하였다. 체육관이 없던 초기에는 야외코트에서 운동을 했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농구대 백보드에 전등을 매달아 놓고 훈련을 했다. 그 결과 송도 농구부는 전국 최강으로 우뚝 섰다.

 

1 콜레라 예방 ‘출장 주사’. 불결한 환경과 방역 시스템이 미비했던 1960년대 우리나라에는 콜레라가 세 번 창궐했다. 63년 316명, 64년 2명, 69년 137명이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콜레라가 돌기 시작하면 방역 당국은 바로 주사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서 행인들의 팔뚝에 주사기를 꽂았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단체로 맞았다. 주사를 먼저 맞은 자와 기다리는 자의 표정은 하늘과 땅 차이다.(70년도)]



2 먹고 돌아서면 또 배고팠던 때다. 성장이 왕성한 고교시절엔 도시락만으로 허기를 채울 수 없다. 점심시간은 물론 휴식시간엔 매점으로 달려간다. “친구야, 여기 콜라!” “우와, 콜라” 모두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다. 파는 자, 사는 자가 모두 학생인 자율매점이다.(75년도)



3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교내 등록금 수납 창구. 요즘은 인터넷뱅킹 등으로 등록금을 납부하지만 예전에는 부모님이 주신 공납금(등록금)을 학생들이 학교에 직접 납부했다. 이 때문에 간혹 교실에서 등록금 도난 사고가 발생하곤 했다.(71년도)



4 송도고는 농구부를 비롯해 유도부, 송구부(핸드볼), 육상부, 정구부 등 다양한 운동부가 운영되었다. 응원전을 펼칠 기회가 많아 학년별로 여러 명의 응원단장들이 있었다. 그때의 몸짓, 지금 아이들보다 멋지다.(66년도)    



5 “하나라도 더!” ‘체력장’이란 이름의 체력 측정 모습. 학생이나 교사나 안경 쓴 사람이 하나도 없다. 체력은 몰라도 시력만큼은 지금보다 월등했다.(77년도)



6 학교생활에서 하기 싫은 것 중 하나는 교실 청소다. 요령이 생겨 쓰레기만 줍고 줄 맞추고 대강 끝내기도 한다. 하루의 끝은 교실 청소. 끝나고 분식집에 갈 마음에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70년도)

  
전남포
  예성강 철교


1911년도 재학생 일동


개성 교정에서의 운동회

1937년(제 19회) 앨범 속 북한 풍경

송도고는 40년대와 50년대 졸업앨범이 없다. 전쟁 난리통, 그리고 그 이후의 불안정했던 시기에 미처 앨범을 챙기지 못했다. 그 와중에 ‘1937년 앨범’ 한권을 극적으로 보관하고 있다. ‘개성 남대문 내 개성사진관’에서 제작한 것이다. 송도고는 물론 우리나라 고교 역사의 흐름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송도학원 80년사’에 의하면 송도고는 개성 시절, 고등학교 수준으로는 세계 제일을 자처한 웅대한 캠퍼스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송도고등보통학교를 둘러 본 많은 사람들, 특히 일본인들은 와세다대학보다 더 웅대한 캠퍼스에 질려버리곤 했을 정도였다. 이 캠퍼스는 현재 북한의 정치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앨범에는 학생들이 소풍갔던 개성 선죽교, 예성강 등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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