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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향기 풍기는 ‘에즈버리 동산’의 백향목
그리스도 향기 풍기는 ‘에즈버리 동산’의 백향목
졸업앨범에는 학교만 있지 않다. ‘인천’도 있다. 졸업 기념사진 촬영 때 학교 주변 동네의 풍광이 종종 카메라에 잡혔다. 교외(校外)에서 잡은 포즈나 학교 밖의 행사를 담은 사진은 더없이 귀한 인천의 과거이다. 지역 내 고교 앨범을 통해 수집한 사진을 통해 인천의 6, 70년대를 반추해 본다. 그 열두 번째, 마지막으로 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의 앨범을 들춰 보았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재촬영 홍승훈 자유사진가
각 학교 게재 월호
1월호 인천여상
2월호 동산고
3월호 인성여고
4월호 인천기계공고
5월호 중앙여상
6월호 인천대건고
7월호 인천해양과학고
8월호 재능고
9월호 박문여고
10월호 송도고
11월호 동인천고
최초의 서구식 초등 ‘영화학당’에서 출발
현재 인천 동구 창영동에 위치한 영화관광경영고의 역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 기관인 ‘영화학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학당은 1892년 8월에 내리교회 안에 설립되었다. 이화학당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던 마거릿 벤젤이 인천에 정착하여 여자 어린이 교육을 시작한 것이 영화학당의 시작이다. 처음엔 학교 운영이 순탄치 않았다. 당시 인천에서는 서양인들이 어린이 간을 약에 쓴다는 소문이 나돌아 1895년에야 겨우 학생이 2명 늘 정도였다. 당시 학생들은 가난해서 학용품은 물론 용돈까지 학교 측이 제공했다. 한문, 국문, 성경, 지리, 영어를 가르쳤다. 1909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정식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이듬해 싸리재에 있던 학교를 현 위치에 2층 벽돌집 교사를 마련해 이전했다.
영화학당보다 먼저 설립된 서울의 배재학당, 경신학당, 이화학당 등이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것과 달리 영화학당은 초등교육에 힘을 써 왔다. 최초의 여성 박사 김활란, 유아 교육 개척자 서은숙 등 한국 사회의 선구자들 중 다수가 영화학당 출신이다. 또한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도 이 학교 출신이다.
카지노 교육 과정 도입
영화(永化)는 기독교 이념의 ‘영생’과 ‘교화’를 뜻한다. 1966년 11월 17일 영화여자실업고등학교 설립 인가 후 ‘영화’의 이름은 변함없지만, 뒤에 붙은 명칭은 여러 번 바뀌었다. 영화여자실업고(1966), 영화여자상업고(1991), 영화여자정보고(2001), 그리고 2013년 영화관광경영고의 이름표를 달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화의 교명은 어찌 보면 사회 추세에 따른 학생들의 취업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상업과, 사무자동화과, 정보처리과, 경영정보과, 전자상거래과, 사이버정보과, 관광경영과, e마케팅과, 미디어디자인과, 관광경영과, 금융서비스과, 외식조리과…. 개교 이후 그동안 개설된 학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경제?사회 변천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영화관광경영고는 다시 한 번 변신을 꿈꾼다. 관광특성화고에 걸맞게 인천지역 최초로 2017년부터 카지노 교육과정을 도입한다. 관광경영과 3학년 교육과정에 카지노반(2개)을 운영할 예정이다. 영종도에 대형 카지노 리조트가 들어서는 시기에 맞춰 전문 관광 인력을 양성해 공급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영화관광경영고는 2016년 2월 현재 47회 졸업식을 거행하며 1만 5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약국이 있는 번화가 (70년도 앨범)
배다리철교에서부터 인천세무서까지 거리는 6, 70년대 꽤나 번잡한 골목통이었다. 헌책방, 아이스께끼집, 문방구, 분식집, 기념품 제작업체, 양복점 등 갖가지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영화학교 정문 앞에 기와집 영화약국의 모습이 보인다. 간판에 ‘2국’ 전화가 표시돼 있다.
뉴서울호텔 교환실 실습(70년도 앨범)
예전에는 교환원을 거쳐야만 호텔 내 프런트나 외부로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호텔의 교환원은 기본적으로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했다. 관광 관련 업체에 취업하기 위한 중요한 실습 중 하나였다.
자유공원 ‘인증 샷’ (71년도 앨범)
바다와 항구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유공원은 한때 인기 있는 관광지였다. 주말이면 웨딩마치를 막 끝낸 신혼부부를 태운 오색테이프로 치장한 ‘대절 택시’들이 공원 언덕길을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단체관광을 왔는지 학생들 뒤로 마이크로 관광버스 한 대가 서있다.
수업 대신 규탄 대회 (71년도, 76년도 앨범)
‘신고하고 애국하고 자수하여 행복 찾자’ ‘살인마 김일성아 적화음모 그만두라’ 가장 만만한 게 학생들이었다. 각종 규탄대회에 학생들이 자주 동원되었다. 물론 학생들은 수업을 빼먹을 수 있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격세지감’ 계몽 행렬 (73년도 앨범)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개교기념 축제 가장 행렬 장면. 지금의 정책 당국자들이 보게 되면 펄쩍 뛸 ‘어이없는’ 계몽 정책을 홍보하고 있다. 인구 감소를 위한 ‘산아 제한’, 쌀 소비를 줄일 ‘혼식 장려’ 등.
설탕공장 견학 (77년도 앨범)
1970년 수인역 부근 신흥동 8만㎡ 부지에 제일제당 공장이 준공되었다. 이 공장에서는 사탕수수 원료를 수입해 ‘백설표’ 설탕을 생산했다. 인천에서는 보기 드문 ‘대기업’이었던 제일제당으로 학생들이 현장 실습(견학)을 다녀왔다.
용감한 처녀 뱃사공 (78년도 앨범)
2011년 문을 닫은 송도유원지는 국내 최대 인공 해수욕장이었다. 해수욕장 옆으로 커다란 호수가 있어 다양한 보트를 탈 수 있었다. 여학생들은 보통 발로 젓는 오리 보트를 탈 만한데 이 두 여학생은 ‘겁도 없이’ 노 젓는 배를 타고 있다.
동인천 광장의 인파 (65년도 영화여중 앨범)
무슨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인천 광장에 행인과 차량으로 가득하다. 동인천은 한때 시외버스 터미널 역할도 했기 때문에 버스와 합승 차량이 많이 정차돼 있다. 1955년에 생산된 시발택시 형태의 지프차도 줄지어 있다. ‘미풍’ 네온간판 맞은편에는 ‘미원’ 불빛이 들어왔다.
1 실업계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취업한다. 사회의 일원이 되는 그들에게 미용강좌는 빼놓을 수 없는 교육이다. 학생에서 숙녀로 변신하는 이 특강은 그 어느 수업 보다 집중도가 높았다. (71년도)
2 이 언니, 분위기 평정하다. 소풍 행사 중 하이라이트는 단연 반별 장기 자랑 대회. 노래 실력은 모르겠고 선글라스 소품만은 점수 좀 얻었을 듯하다. (71년도)
3 참새들이 매점을 점령했다. 도시락은 도시락일 뿐이다. 삼립 단팥빵과 크림빵 하나 먹어줘야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던 여고시절. (76년도)
4 ‘아르바이트’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세뱃돈, 용돈 등을 아껴 학교은행에 저축했다. 은행원은 주로 학생들이 맡았다. 일종의 실습이었던 셈이다. (74년도)
5 ‘미션스쿨’ 영화학교에서 맞는 성탄절 행사는 남다르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예배, 합창, 촌극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76년도)
6 화생방 훈련에 빠질 수 없는 준비물은 비닐봉지였다. 여학생들은 비닐을 뒤집어쓰고도 수다를 떨며 마냥 즐거워했다. (76년도)
7 딴스를 허하라. 한때 포크 댄스가 유행했다. 학교, 직장 심지어 교회에서도 열풍이 불었다. 선생님과의 포크 댄스는 스텝보다 분위기 때문에 어려웠다. (78년도)
영화 유치원
여선교사 사택
영화학당 교사
파란 눈의 선교사들이 살던 마을
영화관광경영고가 위치하고 있는 우각로는 우리나라 개신교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 학교 옆에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선교사들은 1893년 선교기지를 세우기 위해 이 일대의 땅을 매입했다. 그들은 이곳을 ‘에즈버리 동산’이라고 불렀다.
현재 영화학교 내에는 1911년 완공된 반지하 1층과 지상 3층의 영화학당 교사가 일부 남아있다. 1, 2층의 창은 오르내리창으로 주철 도르래를 달아 움직였으며 십자형 평면의 구조로 된 3층은 예배실로 사용했다. 학교 옆에는 현재 안데르센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고풍스러우면서도 앙증맞은 여선교사 사택이 있다. 지상 2층, 지하 1층 건물로 마루가 깔린 복도를 따라 아래 위층에 각각 5개의 방이 있다. 서울과 평양에 주재하고 있는 여선교사들이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는 휴양공간을 겸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옆에는 남선교사합숙소(현 인천세무서)가 이웃하고 있었다.
좀 더 언덕을 오르면 현재의 인천성서침례교회가 나온다. 이 자리에는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1890년대 말 경 아펜젤러 사택을 세웠다. 이 교회 옥상에 올라서면 왜 이곳을 선교사의 사택으로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사방팔방 인천이 한눈에 시원스럽게 들어온다. 특히 건너편에는 선교사이자 의사로서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알렌이 1890년 둥근 타워 돔을 곁들인 2층 별장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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