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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비 국왕 별장 짓던 목수, 대한민국 명장 되다

2017-01-04 2017년 1월호

팔레비 국왕 별장 짓던 목수, 대한민국 명장 되다

나무가 좋아서 시작한 목공 일이 이제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나무를 깎았는데, 어느덧 자기 자신을 깎고 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는 나무와 삶, 이 두 분야에서 명장이 되었다. 대한민국 목재창호 명장 가풍국. 그는 70세가 넘은 지금도 여전히 나무처럼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글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나무 사랑이 만들어낸 ‘우리나라 나무 표본’

톱밥 쌓인 작업대와 연탄난로, 여기저기 쟁여놓은 목재와 줄줄이 걸려 있는 연장들, 고운 나무 가루가 폴폴 날리는 작업장에서 나무 다듬기에 여념이 없는 가풍국(71) 목재창호 명장.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 굵고 거친 그의 손마디가 지나온 시간들을 보여준다.
“나무를 대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남들은 제가 나무에 미쳤다고들 하죠. 오로지 나무밖에 몰라서 그런지, 제 인생 전체가 나무 같습니다. 허허.”
가풍국 명장은 나무 이야기를 꺼내자 어린아이처럼 반가워한다. 얼굴에 굵게 진 주름 사이로 눈을 반짝이며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요즘엔 나무를 깎는 목공인도 나무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우리나라 나무의 70%는 약재에 쓰일 만큼 좋은 나무가 많은데, 나무의 소중함을 모르니 안타깝죠.”
가 명장의 이런 아쉬움을 담아 탄생한 것이 3년여 동안 전국의 주요 산을 돌며 찾아낸 우리나라의 ‘토종 나무 표본’이다. 그는 밤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오리나무 등 우리가 익히 알던 나무부터 사스레 나무, 쪽나무, 팔배나무, 쉬나무 등 생소한 나무까지 토종 나무들을 총망라한 표본 ‘아끼자 사랑하자 소중한 우리 나무들 100가지’를 만들어 학교와 박물관, 공공기관에 꾸준히 기증해오고 있다. “우리 나무의 표본 작업을 하면서 나이테가 정말 아름답다고 새삼 느꼈습니다. 세계에서 우리 나무만큼 나이테가 아름다운 나무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나이테를 활용해보고 싶었습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땅에서 자란 나무들은 세월을 나이테로 그려내면서 다양하고 독특한 무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가 명장은 우리 나무의 아름다운 나이테를 어떻게든 제품에 표현하고 싶어 고민하다 꿈속에서 얻은 영감으로 나무의 나이테를 상감 기법으로 박아 넣은 문을 만들게 되었다. 예술성과 실용성을 함께 갖춘 ‘원목 나이테 상감문(門)’은 그렇게 가 명장의 대표작이 되었다.




국졸 목수, 팔레비 국왕 별장을 짓다

가 명장은 충남 서산에서 형님 일을 도우며 목공을 배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고, 그때부터 그는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그에게 나무는 단순한 땔감이 아니라 호기심과 지루함을 달래주는 친구였다.
19세 때부터 대패와 톱을 잡고 목수 일을 터득한 후 서울로 올라온 그는 ‘굶기도 숱하게 굶으며’ 건축 현장의 목수로 일했다. 군 제대 후에는 1972년 건설기능공훈련원에 들어가 건축목공 기능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일본 오키나와 건설 현장에서 근무했는데, 서툰 일본어 때문에 차별이 심해지자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혔다. 하도 지독하게 공부를 하니까 주위에서 ‘일본인 양자 되려고 그러느냐?’며 놀리기도 했다. 비록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열심히 공부한 덕에 언어 소통이 자유로워졌고, 공사 현장의 반장까지 맡게 됐다. 일본 건설회사 소속으로 이라크 파견 근무를 거쳐 이란에서 팔레비 국왕의 별장을 짓는 일에 투입된 그는 그곳에서도 언어 문제로 차별을 받자 틈틈이 영어 공부에 매진했고, 결국 영어로도 소통이 가능해 목공감독으로 일하게 됐다.
“의사소통이 안 되면 일을 할 수 없었지요. 처음엔 언어 때문에 무시도 많이 당했어요. 공부한다는 건 그 시간에는 모든 걸 다 버린다는 뜻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술 마시고 도박하는 동안 저는 어학 공부만 했어요.”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가 명장은 나이 50에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공장의 지하 창고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느라 매일 새벽에야 귀가하다 보니 나중에는 아내에게 의심까지 받았다고. 어려서 배웠던 한학과 건설 현장에서 닦은 일어, 영어가 도움이 되었다는 그는 1996년과 1998년에 고입검정고시와 대입검정고시에 최고령으로 합격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머리털이 빠지고 몸무게가 48kg으로 떨어졌던 그는 교육청에서 상을 받으러 오라는 걸 딸이 알고 아내에게 알렸을 만큼 비밀리에 공부했다. 검정고시며 기능자격시험,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하느라 1년에 8번 시험을 치르기도 했고, 여러 번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는 가풍국 명장. 결국 그는 58세의 나이에 성화대학 건축과를 졸업했다.





세상을 여는 아름다운 문을 만들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남에게 묻지를 않아요. 기술이라는 건 후배에게도 배워야 합니다. 몇 년을 고생해도 알 수 없는 것도 배우려는 자세로 다가가면 바로 알 수 있거든요.”
가 명장은 쉰을 바라볼 무렵 전통 목재창호를 배우기 위해 전통 창호 무형문화재 김순기 선생(시도무형문화재 제14호)을 찾아갔다. 엄격하고 성격이 불같기로 소문난 김순기 선생의 밑에서 2년간 스승의 보이지 않는 시험을 묵묵히 통과하고서야 그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던 이수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모든 노력이 하나로 모여 마침내 2004년 목재창호 부문 대한민국 명장에 ‘가풍국’이라는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의 손을 거친 아름다운 창호들이 세상을 여는 문이 되기 시작했다.
스승과 함께 경회루(국보 제224호), 광화문, 서울역사(驛舍)의 창호 문을 복원했고, 개인적으로는 경교장(사적 제465호), 홍난파 가옥(등록문화재 제90호), 천년 고찰 안심사(충북유형문화재 제112호) 등의 창호 문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지금도 1년에 반 이상은 문화재 복원 작업에 매달린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봉숭아’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의 가옥을 복원한 거죠. 이 집의 창문은 창에 추를 달아 문틀 상부에 댄 도르래에 걸어 내려 상하로 오르내릴 수 있는 ‘오르내리창’인데, 추 무게와 문짝의 무게가 동일해야 하고, 수리하기가 까다로워서 복원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오르내리창은 고장 시 여닫이ㆍ미닫이창에 비해 수리가 곤란한 것이 단점이지만, 서양식 건축물 대부분에 사용되어 있어 오래된 문화재의 복원 작업이 종종 필요하다고. 중구 항동에 있는 인천우체국(현 인천중동우체국)의 200짝 되는 오르내리창도 가 명장의 손에 의해 모두 복원됐다. 이런 목공 기술을 전수해야 하는데, 목공 일은 ‘돈이 안 된다’며 배우지 않으려는 요즘 세태가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아버지를 따라 목공인의 길을 걷는 아들

가풍국 명장은 후배를 많이 길러냈다. 80여 명에게 목공 관련 각종 자격을 취득하게 했고, 기능경기대회 나갈 때 학력이 없어 꺼리는 후배들에게 자신도 초등학교 졸업이라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는 후학들에게 자격 취득자는 일반 기능인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며, 기능인으로서의 인격도 갖추어야 함을 누누이 강조해왔다. 또 목공인은 평생을 배워도 모자라니 집념을 가지고 최고가 되겠다는 각오로 자기 분야에 대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귀동냥으로 알려 하지 말고 사명감을 갖고 임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목공인이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는 가 명장.
“어려운 길이죠. 옷 한 번 깨끗하게 못 입는 직업이기도 하고요. 쉽게 이루려 하고, 또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없습니다. 다행히 아들 녀석이 아비의 길을 이어가겠다고 하네요.”
가 명장은 지방 기능경기대회에 부자가 나란히 같은 창호 부문에 출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대회에서 두 번은 자신이 이기고, 한 번은 아들에게 졌다며 껄껄 웃는 그는 아들과 함께 일하니 ‘든든하고 도움이 많이 된다’라고 흐뭇해했다.
“평생 나무가 좋아서 시작한 일입니다. 친구 만날 시간도 없고, 특별히 돈 되는 일도 아니지만 늘 바쁘네요. 나무가 친구고, 나무가 일이고, 나무가 인생인 셈이죠.”

우리나라에서 목공인으로 사는 길은 녹록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듯이 그는 앞으로도 나무를 손에 쥐고 변함없이 제 길을 갈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나무처럼 묵묵히.


가풍국 명장이 복원작업을 마친 홍난파 선생의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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